소설리스트

화산귀환-836화 (833/1,567)

836화. 협의지문이 아직도 있었구나. (1)

“아아아아악!”

“사, 살려 주세요!”

장강 어귀에 위치한 한 마을이 금세 시뻘건 불길에 휩싸였다. 이리저리 달아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름 돋는 거치도를 든 이들이 위협적으로 고함을 질러 댔다.

“모조리 불 질러 버려라! 으하하하하핫!”

거칠게 수염을 기른 이가 번들거리는 두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비명을 지르며 죽기 살기로 달아나고 몸을 피하는 이들과 활활 불타는 집들.

“흐흐.”

사내가 입술을 한차례 핥았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보는 광경인가.

“두목! 곳간에 있는 건 모조리 털었습니다. 하지만 패물 같은 건 보이지 않았습니다.”

“쯧. 비렁뱅이들이 다 그렇지. 상관없다. 마을이 이곳만 있는 건 아니니까.”

사내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왜? 겁이라도 나느냐?”

“겁이 나는 건 아니지만…….”

“걱정할 것 없다.”

갈호파의 문주, 과맹(過孟)이 낄낄대며 말했다.

“평소였다면 정파 놈들이 득달같이 달려왔겠지만, 지금은 그놈들이 얼씬도 못 하는데 뭐가 문제란 말이냐?”

암묵적으로 장강의 이북은 정파의 영역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파들도 감히 장강 어귀에서는 큰일을 벌이지 못했다. 언제 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놈들이 달려올지 모르니까.

하지만 이제 저들은 더 이상 장강에 접근하지 못한다.

그리고 다른 정파 놈들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비호 없이는 수로채가 있는 장강에 접근할 담력이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장강 주변은 지금 무법천지나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장강 이북의 상황은 심각 그 자체였다.

“상단만 건드리지 않으면 된다! 수로채 놈들이야 상선을 털어 대는 게 일이니, 농사짓는 무지렁이를 건드린다고 해서 제 영역을 침범했다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참에 모조리 털어 버리자꾸나!”

“예, 두목!”

과맹은 불타오르는 마을을 보며 신나게 낄낄대며 웃었다.

‘난세는 이래서 좋은 것이지.’

구파와 신주오패가 서로 조용히 견제하던 시절에는 아무리 사파라 해도 함부로 날뛸 수 없었다. 잔잔한 호수에서는 작은 파문조차 크게 보이는 법. 괜히 함부로 눈에 띄었다가는 모난 돌이 정을 맞는 것처럼 본보기로 박살이 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으하하하하핫! 모조리 털어라! 모조리! 쌀 한 톨 남기지 마라!”

과맹이 신이 나서 외치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두, 두목.”

“뭐냐?”

“저쪽에서 뭐가 옵니다. 수가 좀 되어 보이는데.”

“뭐? 관인가?”

과맹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수하가 말한 쪽을 바라보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관은 아닌 것 같은데.”

관이라고 하기에는 또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게다가 애초에 관일 수가 없다. 애초에 그놈들이 이리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놈들이었다면 과맹이 마을을 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황도 모르는 정신 나간 정파 놈들이거나, 다른 사파 놈들이겠지. 신경 쓸 것 없다. 우선 여기부터 마무리한 뒤…….”

하지만 일은 그의 생각대로 호락호락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말을 채 다 잇지 못하고 슬그머니 입을 닫았다. 이쪽으로 접근하는 이들의 속도가 그의 상식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저 멀리 점처럼 보이던 인원들이 순식간에 커지더니 이내 사람의 형체를 완연하게 보였다.

“뭐, 뭣?”

그의 눈에 선두에서 달려오는 이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검은 무복을 입은 젊은 사내가 한 손에 검을 뽑아 든 채, 범 같은 노호성을 터뜨렸다.

“야, 이 개새끼들아아아아!”

한 줄기 섬전이 되어 달려든 이가 단숨에 거리를 좁혀 과맹에게 달려들었다. 과맹은 재빨리 손에 든 도끼를 들어 올렸다.

“어디 어린놈이!”

우렁우렁하게 고함을 친 과맹은 달려드는 어린놈에 맞서 달려 나갔다. 도끼에 어린 강렬한 부기가 날아드는 검과 맞닥뜨리기 직전이었다.

과맹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그의 도끼는 중병 중에서도 손꼽히는 중병이다. 저 얇은 검 따위로 막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걸 감안하지 못하고 머리에 피가 몰려 달려드는 것을 보면 이놈은 필시 애송이에 불과하다.

아마 소문을 들은 정파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장강으로 달려온 것일 터. 그럼 그는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주면 그만이다.

‘멍청한 놈! 죽어라!’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스륵!

그의 도끼를 향해 돌진하던 검이 순간적으로 수십 개로 분열했다.

‘뭣?’

수많은 검영이 환상처럼 흩뿌려지더니 이내 수백 개의 붉은 검기를 뿜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과맹이 두 눈을 부릅떴다. 흩뿌려진 검기가 둔중한 그의 도끼를 스쳐 몸 쪽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이, 이건?’

붉은 검기가 휘날린다. 마치…… 꽃잎과도 같이.

그 순간 과맹은 공격해 온 이가 어디 소속인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화, 화산…….”

서걱.

날아든 꽃잎이 그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서걱. 서걱. 서걱!

연이어 그의 몸 곳곳이 검기에 베여 피를 흩뿌렸다.

“끄르르륵…….”

둔중한 도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과맹의 몸뚱이가 그 자리에서 엎어졌다. 어느새 과맹을 스쳐 지나간 사내는 이를 갈며 뒤를 돌아보았다.

“두, 두목!”

“두목이 일 검에…….”

그 광경을 본 이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물론 그들의 두목은 강호 전체로 따지자면 대단한 고수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 주변에서는 제법 이름깨나 날리던 이다. 절대 어린놈의 일 검에 목숨을 잃을 실력은 아니었다.

촤아악!

검을 떨쳐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낸 이, 조걸이 당황한 사파인들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이 개 같은 놈들이! 양민을 건드려!”

뒤이어 도착한 화산파의 제자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달려들어 사파들을 쓸어 버리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놈들!”

“어디 사파 새끼들이 설쳐 대!”

화산 제자들의 눈이 노기로 형형했다.

“인정사정 봐주지 마라!”

“오오!”

당황한 사파인들이 병장기를 들고 대항했지만, 애초에 장강 어귀의 작은 사파 따위가 화산의 상대가 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마을을 점거했던 때와는 달리 순식간에 그 기세를 잃고 처참히 무너졌다.

“불! 불! 아니, 지금 당장 그 새끼들을 때려잡을 일이 아니라! 불을 끄라고요, 불을! 그건 나중에 해도 되잖아요!”

“……아니, 이미 싹 다 탄 것 같은데.”

“저 개새끼들은 왜 멀쩡한 집에다 불을 지르고 지랄이야! 그냥 곡식만 털어 가면 되지! 에이, 빌어처먹을!”

있는 대로 욕을 내뱉은 조걸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앞쪽에서 신음하는 사파놈을 걷어차 버렸다.

“아아아악!”

“아프냐? 이 새끼야? 너 같은 새끼도 아프냐?”

콰악!

얼굴을 걷어차인 놈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거품을 문 채 혼절했다. 그걸 보고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조걸이 악을 썼다.

“불 끄라고!”

“알았다고, 이 새끼야!”

“에이, 빌어먹을!”

갈호파를 순식간에 정리한 화산파의 제자들이 불붙은 집에 달라붙었다. 몇몇은 우물가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지금부터 용을 써 봐야 건질 수 있는 집은 몇 채 되지 않을 성싶었다.

“끝이 없네. 끝이 없어.”

청명이 놈의 말이 맞았다.

- 뭐? 화산에 언제 돌아가느냐고? 뭔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있어? 이제부터 진짜 시작인데.

- 구파일방이랑 오대세가 새끼들을 얕보지 마. 그 새끼들이 하는 것 없이 이름이나 팔아먹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 이름이라는 게 중요한 거야. 놈들이 공식적으로 장강에 오지 못하게 됐으니 이제 난리가 날 거야.

- 아마 한동안은 다리가 부러져라 뛰어다녀야 할걸.

“끄응.”

조걸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조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난립하는 사파 놈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백천과 유이설, 윤종은 각기 화산의 제자들을 이끌고 장강을 순찰하고 있고, 당가에서 온 이들도 화산을 도와 장강을 안정시키는 중이다.

그럼에도 손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들만으로 감당하기에는 장강이 너무도 드넓기 때문이었다. 이만한 인원으로는 구강 주변을 안정시키는 게 한계였다.

사패련이야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다지만, 천하에 사파가 사패련뿐이랴. 평소 정파의 위세에 눌려 경거망동하지 못하던 어중이떠중이 사파 놈들이 불난 집에서 튀어나온 쥐떼들처럼 아우성을 치고 있다.

“망할 놈들이 진짜…….”

“저…… 무사님.”

“아? 예!”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조걸이 급히 시선을 돌렸다. 한 촌로가 쭈뼛대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조걸이 얼른 다가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겁먹지 마세요. 저희는 화산파의 제자들입니다. 해코지하지 않습니다.”

“아……. 아아. 그 화산파의…….”

“예, 그렇습니다.”

조걸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빼앗긴 곡식은 모두 다시 찾아가시면 됩니다. 다시는 저런 악인들이 넘보지 못하게 저희가 단단히 단속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촌로의 주름진 두 눈에서 안도의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있는 것을 다 빼앗긴다면 살아 봐야 어차피 산 것이 아니다. 먹을 것이 없다면 대부분은 올 해를 넘기지 못했을 테니까.

“다만 저 집들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목숨을 구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집이야 다시 지으면 되지요.”

“……죄송합니다.”

조걸이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빨리 왔다면 저 집들도 이 지경으로 불에 탈 일도 없었을 텐데, 하는 후회에서였다.

“걸아.”

“예, 사숙.”

“쓰러진 분들 중에 상처가 위중한 분들이 몇 계신다. 아무래도 섬으로 모셔 가야겠다.”

“많이 심합니까?”

“여기서는 치료가 어려워. 의원이 필요해.”

조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시 촌로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양손으로 쥔 촌로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목소리에 노기가 묻어나지 않게끔 조심조심 말했다.

“들으셨다시피 몇 분은 저희가 모셔 가야 할 것 같습니다. 화산이 진을 치고 있는 구강의 부두에 의원들이 있으니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의원이요? 그…… 너무 감사하고, 또 죄송하지만,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은 의원께 드릴 돈이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돈은 안 받으니까요.”

“예? 저, 정말입니까?”

“네. 그러니 촌장님께서는 놀란 분들을 다독여 주십시오. 집을 다시 짓는 데 필요한 게 있으시면 사람을 보내 요청하십시오. 최대한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그때였다.

“빌어먹을, 양곡이 탔다!”

“뭐?”

조걸이 고개를 획 돌렸다.

“사형, 어떡합니까. 이 새끼들이 수레를 집 옆에 붙여 놔서 양곡 중 반이 타 버렸습니다.”

“아니, 뭔……. 아오, 진짜!”

결국 다시 화가 뻗친 조걸이 달려들어 무릎을 꿇고 있는 사파 놈들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뭔 약탈도 제대로 못 하냐, 이 등신 새끼들아!”

분이 풀릴 때까지 사파 놈들을 걷어차 준 조걸이 씩씩대며 촌장을 슬그머니 돌아보았다. 그 얼굴에 확연히 어린 절망을 보니 한숨만 푹푹 새어 나왔다.

“사숙.”

“응?”

“돈 있죠? 재경각이니 비상금 들고 다니잖아요.”

“……야, 마음은 알겠지만 이건 쓰면 안 되는…….”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합시다.”

“청명이가 쓰지 말라고 한 건데.”

“……죽이기야 하겠어요?”

“…….”

“주십쇼.”

“…….”

“얼른.”

백상은 하늘을 한차례 올려다보고는 결국 품 안에서 전낭을 꺼냈다. 그리고 촌부의 손에 꼭 쥐여 주었다.

“아마 곧 장강 일대의 곡식 값이 뛸 테니, 이 돈으로 빨리 곡식을 사십시오. 그럼 겨울을 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촌로의 얼굴에 황망함이 어렸다.

“왜 이렇게까지…….”

“그런 거 아니에요.”

조걸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냥 돌아왔다고 하면 보나마나 그 마귀 같은 놈이 눈 쭉 찢어진 채로 길길이 날뛸 게 뻔해서 그런 거니까, 감사해하지 마세요.”

“……예?”

“화산에 조금 늦게 들어온 게 인생의 한이다. 인생의 한이야. 아오. 내가 그놈 사숙이었어야 하는 건데. 그럼 고 조동아리를 그냥!”

“그 말 그대로 전해 주마.”

“아, 사수우우욱! 이러깁니까?”

백상은 작게 웃더니 이내 다시 정색했다.

“부상자를 빨리 옮겨야 한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아, 그렇지.”

조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촌로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럼 저희는 가 봐야겠습니다.”

“버, 벌써요?”

“다른 곳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혹시 마을에 문제가 있으면 구강에 새로 생긴 부두로 찾아오시면 됩니다.”

“요즘은 매화도(梅花島)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으니 물어서 찾아오시기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예?”

“그럼.”

조걸이 몸을 돌리자 백상이 커다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저 사파 새끼들 모조리 묶어서 관아에 넘겨! 그리고 발 빠른 놈들은 저기 부상 입으신 분들 업고 섬으로 옮겨라, 빨리!”

“예!”

“움직여!”

마치 바람처럼 움직이며 정리를 하던 화산의 제자들은 삽시간에 마을에서 멀어져 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디라고 했지?”

“화산파라고 하던데.”

“화산……. 화산파라…….”

촌장의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협의지문이 아직도 있었구나. 다 옛날이야기인 줄 알았더니…….”

그는 옆에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은인의 이름을 기억하거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일 테니까.”

“예.”

고단한 세월에 주름진 눈이 멀어져 가는 화산파 제자들의 뒷모습을 내도록 좇았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주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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