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3화. 그건 너희 대가리한테 가서 따지시고. (3)
“모조리 빼앗아라!”
반항하던 이를 거침없이 베어 버린 서홍이 낄낄 웃으며 고함쳤다.
‘이거지! 이래야지!’
그동안은 수적질을 하면서도 마음껏 날뛰어 본 적이 없었다. 영업이 과해지면 결국 정파 놈들을 불러들이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을 막을 정파 놈들이 장강으로 올 수 없는 상황. 차려진 밥상이라는 것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예전처럼 적당히 조율을 해야 한다. 물고기를 남김없이 잡아 버리면 그 호수는 죽게 되고 결국 썩는 길밖에는 남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한동안은 그동안 억제해 왔던 흉성을 마음껏 풀어도 될 것이다.
“두목!”
“뭐냐?”
“뒤쪽에서 배 한 채가 접근합니다.”
“뭐? 관이냐?”
“아닙니다. 다른 수채 같습니다.”
“수채?”
서홍이 눈살을 찌푸렸다.
“콩고물이라도 먹어 보겠다고 오는 모양이군. 내버려 둬라.”
“예.”
일단 내버려 두라고 얘기하면서도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도 상도의는 지켜야 하지 않나.’
수적의 법칙이야 아주 간단하다. 먼저 먹는 쪽이 임자. 자신들의 구역이라면 말이 다르지만, 이 구강의 주변은 대경채가 무너지면서 주인이 없는 상태다.
그러니 이 배를 털 권한은 먼저 온 그들에게 있다.
“불쌍하니 조금 남겨는 주…….”
콰아아아아아앙!
그 순간 천붕지음이 터지면서 그들이 탄 배가 뒤집어질 듯 뒤흔들렸다.
“어엇!”
“아아악!”
갑작스런 충격에 갑판 위를 뛰어다니던 수적들이 바닥을 구르고 비명을 질러 댔다.
“뭐, 뭐냐?”
당황한 서홍이 선수로 달려갔다. 사슬로 고정된 그들의 배 뒤쪽에 생경한 배 한 척이 처박혀 있었다.
“저, 저 병신 같은 놈들이!”
빠르게 접근하다가 제대로 조타를 하지 못해 들이받아 버린 게 분명하다 생각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물론 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수적들은 대개 조타에 능숙하니 어지간해선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지만…… 일단은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건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가자!”
들이받아 온 배에서 한 무리의 무인들이 솟아올랐다.
‘뭐?’
수적들이 입는 옷과는 확연히 다른 검은색 무복으로 복장을 완벽히 통일한 걸 보니 평범한 수적은 절대 아니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검과 가슴팍에 새겨진 매화 문양을 보는 순간, 서홍의 머릿속에 한 문파의 이름이 스쳤다.
“화, 화산파? 왜 여기에서 화산파가 나온다는 말이냐!”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새파랗게 질렸다.
일 년 전, 아니 불과 한 달 전이었다면 그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장강에서 화산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입지는 한 달 전과는 상전벽해 수준으로 달라졌다.
화산이 몇 되지도 않는 인원으로 대경채를 박살 내 버리고, 심지어는 흑룡채와의 결전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소문은 장강 인근에선 모르는 이가 없었다.
즉, 지금 장강에서 화산의 이름은 저승사자와 다를 바 없었다.
“아아아아악!”
“사, 살려……. 아아악!”
아니나 다를까, 배 위로 뛰어오른 화산의 검수들은 순식간에 수적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배를 터느라 본선에 남은 인원이 몇 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비, 빌어먹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한 서홍이 대처할 방도를 찾지 못해 허둥대던 그때였다.
“읏차.”
그들이 오른 상선으로 검은 무복을 입은 한 사내가 가볍게 뛰어들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그의 뒤로 다섯의 젊은 무인들이 뛰어 올라 선두에 선 이의 뒤를 받쳤다.
“흐으으음.”
배 위에 오른 이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 수적 새끼들이 겁 대가리를 상실했나? 어디 싸가지 없게 구강에서 영업질이야?”
“…….”
“누가 대가리냐?”
서홍이 굳은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나다. 그러는 너는 화산파인가?”
“화산파인가? 화산파인가아아아? 너 이 새끼 말이 짧다? 어디 수적 새끼가 반말을 찍찍 해? 이 다 뽑아서 미음만 먹고 살게 해 드려?”
“…….”
갑자기 쏟아지는 폭언에 서홍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넌 누구냐?”
“나? 청명이다, 이 새끼야. 내가 말하면 뭐? 네가 아냐?”
하지만 의외로 서홍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처, 처, 청명?”
“어?”
그 반응에 고개를 갸웃한 청명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는 모양인데?”
“……알 만하지.”
“이제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하지.”
백천과 윤종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놈은 한 번씩 제 명성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측면이 있다.
“화, 화산신룡!”
마치 지옥귀 앞에라도 선 양 서홍의 얼굴에선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앞쪽에 쪼그려 앉은 이의 인상착의가 그가 들은 것과 동일했다. 게다가 벌어진 앞섶과 옷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에 감긴 붕대는 이 사내가 불과 얼마 전 치열한 격전을 치렀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화산신룡 청명.
대경채 채주인 잔포흑어를 베어 죽이고, 대경채를 와해시킨 화산파의 무인.
“그…… 그 패군과 호각으로 맞섰다는…….”
서홍의 중얼거림에 청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 씨, 호각? 허도 새끼가 방해만 안 했어도 내가 이겼거든?”
뒤에 서 있던 백천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아니, 그건 좀.”
“뭐?”
“사람이 양심이란 게 있어야지.”
“아니, 내가 이겼다니까? 끝까지 싸우면 내가 무조건 이겨! 누구든! 어느 새끼든!”
“아아. 그래, 그래. 앞에 보자, 앞에.”
“진짜라니까?”
“그래, 그래. 앞에 보라고.”
서홍의 손끝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무도한 수적들을 앞에 두고도 저들은 조금도 긴장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굴욕적인 일이지만, 사실 서홍은 굴욕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쳐들어가 잔포흑어를 잡아 죽인 후 수채를 와해하고, 사패련과 정파들이 전쟁을 벌이는 한중간에서 사패련주와 격전을 벌인 이에게 일반 수적 나부랭이 따위가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는가?
항전?
그런 건 생각도 할 수 없다. 상대가 화산신룡이라면 차라리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쪽이 살아날 확률이 더 높을 테니까.
하지만 칼로 항전하지는 않더라도, 아직 할 말은 남았다.
“저, 정파는 장강에 들어오지 못하는 법 아니오! 어, 어째서 그대들이 여기에 있소?”
“정파가 왜 못 들어와, 이 새끼야! 구파가 못 들어오는 거지. 우린 구파일방이 아니야. 옛날에 쫓겨났거든.”
“아니, 너 말이 지나치다. 왜 말을 그렇게 하냐! 쫓겨나다니!”
“사실이잖아?”
“같은 말이라도 좀 다르게 할 수 있잖아. 천우맹이라서 적용이 안 된다거나.”
“에이. 안 쫓겨났으면 우리도 못 왔지.”
“끄으으응.”
백천은 못마땅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며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푹 감쌌다.
청명이 턱짓으로 서홍을 가리켰다.
“구강 쪽에서 영업하다 걸리면 모가지 달아난다는 소리 못 들었냐?”
“그, 그게 무슨…….”
“모르는 모양이네? 뭐 어쩔 수 없다. 그럼 뒈져도 그건 너희 대가리한테 가서 따지시고.”
더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청명이 소리쳤다.
“흐하하하핫! 가진 것은 모두 빼앗고 반항하는 놈은 모조리 베어서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 줘라!”
“수적처럼 말하지 말라고, 이 새끼야!”
“틀린 말은 없는데, 기분이 이상하네.”
오검은 구시렁거리면서도 빛살같이 바닥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아래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자 배와 청자 배들이 배 위로 뛰어올라 수적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배 위는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한 배에 탈 수 있는 인원이야 애초에 한정되어 있다. 비슷한 수로 맞붙는다면 수적들 따위는 화산파 제자들의 식후 운동거리도 되지 못한다.
격렬히 저항하는 수적을 베어 넘기고, 항복하는 수적들을 제압한 화산의 제자들이 마지막까지 남은 서홍을 에워싸고 포위했다.
난간에 바짝 달라붙은 서홍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흐, 흑룡왕께서 결코 이 일을 좌시하지 않으실 거요! 나, 나를 죽인다면…….”
백천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고마운 충고긴 한데, 댁이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
서홍은 이를 악물고 독기 어린 눈으로 화산파를 노려보았다.
“장강에서 너희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아오, 씨!”
그 순간 뒤쪽에 있던 청명이 비조처럼 날아들어 서홍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빠아아아아악!
모두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한껏 젖혀진 서홍은 파들파들 경련하다 힘없이 난간 뒤로 넘어갔다.
풍덩!
“아오! 말이 너무 많아, 새끼가.”
청명이 이제야 속이 시원한 듯 손을 탁탁 털었다.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직 상처가 덜 나았다고.”
“저런 피라미 하나 잡는 게 뭐가 무리라고. 그냥 가벼운 운동이지.”
“어휴.”
백천은 못 말리겠다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하여튼 말 더럽게 안 들어 처먹는다.
“소소야. 다친 사람은?”
“죽은 사람은 없어요, 사형. 자상 입은 분이 몇몇 있기는 한데 목숨에 지장은 없을 거예요.”
“썩을 수적 새끼들.”
청명이 이를 갈며 한쪽에 묶인 수적들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수적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황급히 푹 숙였다.
“치료해 드리고, 뺏긴 물건들 다 주인 찾아 드려.”
“알았다!”
화산의 제자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구석에서 벌벌 떨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양민들이 그제야 용기를 내어 조심스레 다가왔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에이, 뭘요! 하. 하. 하. 정파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정파로서 당. 연. 히.”
“아…….”
눈을 끔뻑이던 이들이 살짝 당혹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이번에 사패련과의 밀약으로 정파는 장강에 오지 못한다고…….”
“그거 헛소리예요. 구파일방 새끼들이랑 오대세가 놈들은 못 오는 게 맞는데, 저희는 와도 됩니다.”
“……그, 그럼?”
“네.”
청명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이 구강 일대는 저희가 완벽하게 지켜 드릴 테니까 이쪽으로는 오셔도 됩니다. 수적 새끼들이 얼씬도 못 하게 해 드릴게요.”
“아아!”
“사람들에게 알려 주세요. 구강은 천우맹이 보호하는 구역이라고. 구강에선 수적들에게 당하시는 분들이 절대 없을 거라고 말이죠.”
그러더니 청명은 슬그머니 앞쪽에 선 상인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리고 구강에 있는 섬으로 저희가 다리를 놨거든요? 거기로 오시면 싸게 받고 이송도 해 드립니다.”
“저, 정말입니까?”
“허어? 속고만 사셨나! 저 청명입니다! 청명! 화산신룡!”
청명이 제 가슴을 탕탕 치며 말하자 상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그렇지요. 화산신룡!”
“그 유명한 화산신룡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지요!”
가만 듣고 있던 오검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가.’
‘사기와 패악의 상징이던 저 별호가 언제부터 신뢰의 상징이 되어 버린 거지?’
장강 일대에서 청명의 명성은 이전과는 비할 바 없이 높아졌다.
그리고 오늘 일이 퍼지기 시작하면 적어도 장강에서만큼은 천하제일문파의 이름을 화산이 차지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게 될 것이다.
감격에 겨운 상인들이 청명의 손을 잡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하하하하. 어떻게 갚긴요. 돈으로 갚으시면 되지. 은혜 갚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처럼 말하시네. 명색이 상인이라는 양반……. 읍! 으읍!”
백천이 자연스럽게 청명의 입을 틀어막고 뒤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얘가 다친 게 덜 나아서 지금 머리가 좀 이상합니다.”
“…….”
윤종이 멍하니 그 광경을 보는 상인들의 시야를 슬쩍 가로막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저한테 물어보시면 됩니다. 제가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 그럼 이거 하나만 좀 여쭤봐도 될지…….”
“네.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이거 굉장히 송구한 질문인데…….”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시죠.”
“그럼 염치 불고하고…….”
망설이며 쭈뼛거리던 상인이 크게 심호흡하더니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었다.
“그…… 저분이 진짜 그 화산신룡이 맞습니까?”
“…….”
윤종은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