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2화. 그건 너희 대가리한테 가서 따지시고. (2)
사패련이 구파일방과 강남 불침 조약을 맺었다는 소문은 폭풍처럼 중원을 휩쓸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던 이들도 연이어 같은 소식이 들려오니 결국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정파가 사파와 결탁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결탁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 않나?”
“이게 결탁이지, 아니면 대체 뭐가 결탁이란 말인가!”
“그렇긴 하지만…….”
소문을 들은 이들을 가장 분노케 한 소식은 그들이 장강을 버렸다는 것이었다.
장강의 수적들은 이번 전쟁으로 인하여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런 상황에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장강 땅을 밟지 못하게 된다면 그들이 미쳐 날뛸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 아닌가?
이건 구파와 오대세가가 강남의 양민들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세인들은 그 사실에 분노했지만, 연이어 들려온 소식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 이 조약을 주도한 이가 무당의 허도진인이다.
- 소림의 장로 법계와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황, 그리고 청성의 장문인인 벽현자가 허도진인에 동조했다.
- 장강에 가지 않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역시 이 조약에 뜻을 같이할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충격이었지만, 두 번은 분노가 쌓였고, 세 번에는 결국 증오가 되었다. 연이어 들려온 소식에 폭발한 이들은 직접 무당산에 올랐다.
해검지를 넘어 무당의 정문에 도달한 이들은 굳게 닫힌 산문을 보며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일을 이렇게 벌여 놓고 봉문을 한다고?”
“후안무치한 것도 정도가 있지!”
“나와! 당장 나와라!”
사실 무당이 봉문 하지 않고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했다면 상황이 조금 달랐을 것이다. 아무리 잘못했다고 한들, 그 무당 앞에서 대놓고 욕을 할 이는 그리 많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굳게 닫힌 문은 나름 예의를 갖추려던 이들의 가슴에도 불을 질러 버렸다.
“이 빌어먹을 놈들! 이러고도 너희가 정파냐!”
“도문이니 뭐니 지껄여 대더니, 이제 와서 죄 없는 양민들을 버린다고?”
“그동안 너희를 믿었던 세월이 아깝다!”
산문에 몰려든 이들은 들고 있던 물건들을 문을 향해, 그리고 담장 너머로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원래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앞선 이들이 욕을 내뱉고, 물건을 던지기 시작하니 뒤따르던 이들도 하나같이 목소리를 높여 무당을 힐난했다.
욕설이 점점 도를 넘었고, 몇몇은 아예 닫힌 산문을 힘껏 걷어차며 침을 뱉어 대기까지 했다.
“…….”
그 건너편, 산문의 안쪽에서 욕설을 가만 듣고 있던 진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진현아.”
무진이 그런 그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들어가자꾸나. 여기 있어 봐야 속만 상한다.”
“……아닙니다, 사숙.”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내저으며 버텼다.
“똑똑히 봐야지요. 외면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렇기는 하겠지만…….”
진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산문에 시선을 던졌다. 쿵쿵 울리는 문과 담을 넘어 날아드는 오물들이 가슴 아팠다.
‘이토록이나…….’
그는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 이렇게까지 냉정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그동안 무당의 이름으로 한 것이 적지 않을 텐데.”
“한 것이 없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한 것이 많기에 화를 내는 것이지.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 아니더냐?”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 말이 진현을 위로해 주지는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저들의 실망이 이만큼이나 극심하게 크다는 거니까.
“사숙.”
“말하거라.”
“장문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선택이 저희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도요.”
“…….”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있으니, 차라리 거기서 죽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수치스럽다는 게 아니라…… 무당의 이름이 이렇게까지 땅에 떨어질 줄 알았더라면…….”
무진은 답답한 마음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라고 왜 진현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무당의 제자라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더없이 명예로운 일이었다.
무당의 무복을 입고 대로변을 활보할 때 쏟아지던 선망 어린 시선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그런 시선을 받지 못할 것이다.
저들에게 무당은 그저 살기 위해 사파와 손을 잡은 협잡꾼이 되어 버렸으니까.
한숨을 쉰 무진은 진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목숨은 누구에게나 아까운 것이다.”
“…….”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지. 하지만 잘못된 게 있다면 우리가 만회하면 된다. 우리가 다시 무당의 협의를 세우는 날이 온다면, 화가 난 이들도 그때는 우리를 다시 봐 줄 것이다.”
“……예, 사숙.”
“가자꾸나.”
“예.”
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리자 진현도 그를 따라 몸을 돌렸다. 하지만 쉽사리 발을 떼지는 못했다.
앞서 가는 무진의 뒷모습을, 진현은 씁쓸한 얼굴로 보았다.
‘하지만 사숙. 그곳에는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라고 두렵지 않았을까?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들과 무당의 차이는 단 하나뿐이었다.
두려움 속에서도 제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가?
두려워하면서도 기어이 한 발을 내디딜 수 있는가?
그리 크지 않은 그 작은 차이가 이토록 극심한 결과의 차이를 가져왔다.
‘어렵구나.’
협의라는 게 무엇인지. 정의라는 게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 여겼던 것들이 모호해져 간다.
여전히 중인들의 거친 욕설이 문을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
저들이 내뱉는 욕설 하나하나에 틀린 점이 없단 사실이 더욱 그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미안합니다.’
속으로나마 진심을 다해 말했다. 누군가에게 하는지도 모를 사과였다.
* * *
소문이 본디 빠르다고는 하나, 이번에는 하오문이 적극적으로 조장한 덕에 본래의 속도보다도 배는 빠르게 천하 곳곳에 퍼져 나갔다.
들은 이들은 하나같이 분노했지만, 그중에서는 분노할 겨를조차 없는 이들이 존재했다.
바로 장강을 젖줄 삼아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콰아아앙!
장강을 건너던 배를 쾌속선이 사정없이 들이받았다. 배가 기우뚱하는 순간 쾌속선에서 날아든 사슬들이 배와 배를 연결했다. 사슬을 밟으며 수적들이 재빠르게 배 위로 올라탔다.
“사, 살려 주십시오!”
수적을 본 이들이 사색이 되어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배 위로 올라탄 수적들은 흉흉한 눈빛을 빛냈다.
“한 푼이라도 숨기는 놈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뼈와 살을 발라 주겠다! 있는 것 다 내놓아라! 너희는 가서 선창을 열어 쓸 만한 것은 모조리 챙겨라!”
“예!”
“다, 다 내놓으라니, 너무 심하시지 않습니까. 통행료는 섭섭잖게 준비해 드릴 테니 제발…….”
한 노인이 다가와 애걸복걸하자 우두머리 수적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너는 누구냐?”
“제가 이 배의 선장입니다, 나으리. 이걸 다 가져가시면 저희는 망합니다. 저희가 망하면 나으리들께서도…….”
서걱!
그 순간 수정의 칼이 선장의 가슴을 단번에 베어 버렸다.
“아아아아악!”
가슴이 갈라진 늙은 선장이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히이이익!”
순식간에 사람 하나가 칼에 베여 쓰러지는 꼴을 본 이들이 공포에 질려 덜덜 떨기 시작했다.
“건방진 놈이, 어디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들어?”
칼에 묻은 피를 혀로 핥은 수적이 입꼬리를 뒤틀며 비릿하게 웃었다.
“너희가 없어도 돈을 낼 놈들이야 얼마든지 있다. 한 번만 더 구시렁대면 모조리 죽여 물고기 밥으로 던지겠다.”
“숨기다 걸리는 놈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사람들이 하나둘 전낭을 열기 시작했다. 창백한 낯에 체념한 기색이 가득했다. 가진 돈을 모두 빼앗기면 굶주림을 피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수적들은 전에 없이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전에는 적당히 통행료만 받아 가며 나름 장강을 관리했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그들이 다녀가는 곳마다 흉흉한 소리와 곡소리만 울렸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수채들을 궤멸시킨 덕에, 피해를 입은 수적들이 앞뒤 따지지 않고 사람을 죽여 대고, 물건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이러면 장강을 오가는 상인들은 모두 망할 텐데.’
‘대체 어찌 되려고…….’
‘차라리 그들이 장강에 오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저마다 속으로 이를 갈았다. 어찌 보면 재미있는 일이었다. 눈앞에서 강도짓을 하고 사람을 죽여 대는 수적들에 대한 분노보다, 상황을 이 지경으로 몰고 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대한 분노가 더욱 크지 않은가.
“다 걷었습니다. 이놈들은 어찌할깝쇼?”
“보내 줘라.”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관은 사람이 떼로 죽지 않는 이상은 나서지 않는다. 재물이야 아무래도 좋은 것이지. 어차피 우리가 털어 댔다고 세금을 걷지 않을 놈들도 아니고.”
그 말을 들은 양민들의 얼굴이 검게 죽었다. 저들의 말에 틀린 구석이 없어서였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게다가 살려 보내 줘야 또 돈을 들고 배를 탈 게 아니냐. 다음에 또 보자꾸나. 다음에도 목숨 부지하고 싶거든 돈을 좀 넉넉하게 들고 타거라. 하하하하하핫!”
배를 아주 통째로 털어 버린 수적들은 낄낄 웃어젖히며 제 배로 옮겨 탔다. 그리고 금세 멀어졌다.
망연히 배 꽁무니를 보던 이들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나는 망했네. 이번 상행에 전 재산을 들였건만……. 이러면 돌아가도 굶어 죽는 수밖에 없단 말일세!”
“굶어 죽어? 나는 빚까지 냈네! 이제 꼼짝없이 팔려 가게 생겼다 이 말이야!”
“빌어먹을! 당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그 개 같은 구파 놈들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인가, 이게!”
이들은 장강이 위험한데도 안일하게 배를 탄 것이 아니다. 위험하다는 것은 알지만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배에 오른 이들이다.
장강을 젖줄 삼아 살아가는 이들은 장강에서 벌어먹고 살 수밖에 없다. 위험한 걸 알면서도 이제 와 다른 살길을 찾기란 너무도 어려운 것이다.
“……우린 대체 어떻게 살라고.”
“크흐흑.”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은 이 배뿐만이 아니었다. 장강 전역에서 비슷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수채들은 흑룡왕의 허가 아래 게걸스럽게 배들을 털고 제 배를 채우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이들의 만행이 심해진다 싶을 때 정파에 속하는 문파에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던 양민들도 지금은 그저 이들의 횡포를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선장님, 괜찮으십니까!”
“여기 깨끗한 천을 가져와! 당장!”
선원들은 바닥에 쓰러진 선장의 상태를 살피기 바빴다. 피를 많이 쏟아 창백해진 선장의 얼굴을 본 중인들이 절망에 휩싸여 욕지거리를 했다.
“그 찢어 죽일 허도진인 놈!”
“무당만 문제인가? 거기엔 남궁과 소림도 있었어! 구파일방이고 오대세가고 다 똑같은 놈들이야!”
“제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 언제 우리한테 신경을 써 준 적이 있었나? 입으로만 협의니 어쩌니. 똥물에 튀겨 죽일 놈들 같으니! 그 놈들도 수적이랑 한 패나 다름없어!”
“퉤엣! 내 더러워서!”
배가 힘없이 방향을 돌렸다.
모든 물건을 빼앗긴 이상, 목적지로 향해 봐야 돌아오는 뱃삯만 더 들 뿐이다.
“……돌아가는 길에 수적들을 만나지 않기나 빌어야겠군.”
“이미 다 털렸는데 무슨 상관이야?”
“모르는 소리 하지 말게……. 털 물건이 없다고 그놈들이 화가 나 해코지라도 하면 어떻게 하는가?”
“…….”
상인 중 하나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사는 게 너무 힘들구먼. 진짜 너무 힘들어…….”
그 넋두리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다들 저마다의 슬픔에 잠겨 있는 그때, 누군가가 배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보게……. 저 배도 걸릴 모양이군.”
“아이고…….”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다가오는 배가 보였다. 이를 발견한 쾌속선이 뱃머리를 틀어 다가오는 배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예정된 불행을 측은하게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저기 보게, 저기.”
“뭘?”
“수적선이 또 하나 오는구먼. 잉어 새끼들도 아니고, 아주 떼로 몰려드네.”
“대체 장강이 어찌되려고.”
처참한 광경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누군가가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저거 왜 저리로 가나?”
“응?”
“원래 수적 놈들은 먼저 들이댄 놈이 임자인 것 아니었나? 이미 저 쾌속선이 들러붙었는데 왜 저기로 가지?”
“……응?”
중인들이 눈을 끔뻑이며 다시 그곳을 바라보았다.
“빠르게 가는……. 어? 어어? 어어어어?”
뒤늦게 나타난 배는 속도도 줄이지 않고 돌진했다. 그러더니 상선에 들러붙은 쾌속선을 그대로 들이받아 버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앙!
“……헐?”
중인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