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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31화 (828/1,567)

831화. 그건 너희 대가리한테 가서 따지시고. (1)

법정은 얼굴을 굳힌 채 한참 침묵을 지켰다.

법계는 차마 그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한 말이 모두 사실이더냐?”

“방장…….”

법계는 신음처럼 앓는 소리만 낼 뿐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입이 열 개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허어…….”

법정은 너무 믿기지 않는 사실에 웃어 버렸다.

“사파와 협약을 맺었다? 그것도 이쪽만 장강을 포함한 강남으로 진출할 수 없다는 일방적인 협약을?”

“…….”

“대체…….”

그나마도 말을 다 잇지 못한 그는 침음성을 흘렸다.

‘내 실수로구나.’

법계를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소림 대부분의 전력을 보낼 것이라면 그가 직접 소림을 이끌었어야 했다. 기껏해야 수적들을 상대하는 일이랍시고 법계를 보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허도 이 어리석은 사람아. 대체 이 일을 어찌 수습하려고……. 아미타불. 아미타불.”

법정이 중얼거리며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법계는 돌덩어리라도 삼킨 기분이었다.

“방장……. 일이 크게 잘못된다면 차라리 저를 내치십시오.”

“너를 말이더냐?”

“예. 제가 방장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저지른 일이며, 소림의 뜻은 이와 다르다고 해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저야 얼굴을 들기 어렵겠지만 소림은…….”

“어리석은 소리!”

법정의 입에서 호통이 터졌다.

“그건 소림의 이름을 가볍게 만드는 짓밖에 되지 않는다. 일단 살겠다고 그런 짓을 해 버린다면 세상이 소림을 어찌 보겠느냐? 앞으로는 내 입에서 직접 나오지 않은 말은 언제든 뒤집을 수 있는 가벼운 말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건 소림의 위상을 스스로 깎아 먹는 일이다.”

“…….”

“외통수로구나. 외통수야. 이해는 간다만…….”

이만큼 파격적인 제안이 아니었다면 그 장일소가 제 배 속에 들어온 이들을 순순히 보내 줬을 리 없다.

하지만…….

‘이 일을 대체 어찌 수습해야 하는가?’

불과 일 년 전이었다면 그리 큰일이 아닐 수도 있다. 아무리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미운 짓을 하더라도, 비빌 언덕이 없다면 결국은 다시금 의지하게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천우맹의 설립을 좌시한 결과가 설마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다른 구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천우맹을 밀어주었던 이가 바로 법정이다. 당시에는 여러 이해관계 때문에 벌인 일이었건만, 설마 그가 벌인 일이 소림의 입지를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이렇게까지 일이 공교롭게 흘러갈 수가 있는가?’

그가 천우맹의 개파를 묵인하지 않았더라면.

저 장일소가 사패련을 조직하고 장강에 함정을 파지 않았더라면.

허도진인이 제자들을 살리겠답시고 체면을 바닥에 집어던져 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 극단적인 선택을 사패련이 덥석 물어 버리지 않았더라면!

그중 한 가지만 벌어지지 않았어도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의미 없는 가정이다. 이 모든 일은 결국 벌어졌고, 남은 것은 지금 이 순간도 땅에 처박히고 있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위상을 수습하는 일뿐이었다.

“반응은 어떠하더냐?”

“장강에 가지 않았던 문파들은 해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숭산까지는 그 소문이 퍼지지 않아 민심이 들끓고 있지는 않지만, 이곳도 아마 곧…….”

“그렇겠지……. 그럴 수밖에 없겠지. 아미타불. 아미타불…….”

법정이 답답하다는 듯 연신 불호를 외었다.

민심이란 무섭다.

민초들이란 평소에는 웬만큼 핍박을 받아도 참고 버티지만, 어느 선을 넘어 버리는 순간 농기구를 들고 황궁으로 돌진해 버릴 만큼의 저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실망을 넘어 분노를 가지게 되는 순간 몰락은 빠르게 시작될 것이다.

“천우맹은?”

“……예?”

“화산은? 화산은 어찌 하던가?”

법계가 도통 뜻을 모르겠단 얼굴로 바라보다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저희가 먼저 장강을 빠져나와서 잘…….”

법정의 눈이 믿을 수 없단 듯 휘둥그레졌다.

“화산이 어찌하는지 확인하지 않았다는 말이더냐?”

“상황이…….”

“…….”

법정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리고 속으로 탄식했다.

‘아아……. 이를 어이해야 할꼬…….’

법계에게 한 발 떨어져 상황을 지켜볼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면, 천우맹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구파일방이 몰락할 때 가장 큰 이득을 볼 이들이 화산과 천우맹이라는 사실을 이해 못 할 법계가 아니니까.

하지만…….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는 것과 폭풍 속에서 상황을 인식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거늘.’

법계도 그렇고 허도도 마찬가지다.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냉정한 판단을 내린다는 게 어려운 일인 건 사실이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당황하여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전쟁도 없고 다툼도 없었던 시대.

그 속에서 힘을 키워 온 이들은 힘이야 강해졌을지 모르지만, 성숙하지 못했다. 힘만 센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법정조차 몰랐던것이다.

“장강을 떠나려는 기미가 있더냐?”

“……그러고 보면 저희는 빨리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들은 딱히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지……. 그래, 그렇겠지. 그 화산신룡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법정이 허탈함에 웃어 버렸다.

“시기를 놓쳤구나. 이미 우리가 사파와 결탁했다는 소문이 천하에 퍼졌을 텐데, 이제와 천우맹과 사파가 밀약을 맺었다는 말을 해 봐야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겠지. 잃었구나. 모두 잃었어. 아미타불. 아미타불…….”

법정은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수록 법계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죄송합니다. 방장…….”

“네 탓이 아니다.”

법정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법계를 탓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무엇이겠는가? 이제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벌어진 일을 어떻게든 수습할 방도이다.

“문의해 오는 문파들에게, 조약은 사실이라 답하거라.”

“하, 하오나…….”

“일을 벌이고 발을 빼 버리는 것보다는 낫다. 소림이 책임져야 할 것은 책임질 것이라 그리 말하거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순 법정의 두 눈에서 새파란 빛이 흘러나왔다.

“그곳에 없었던 문파들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이름으로 맺어진 조약이니 만큼 반드시 지켜져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고 전하거라.”

“바, 방장!”

법계가 눈을 부릅떴다.

“저, 저희의 잘못으로 생긴 일입니다. 한데 그걸 강요한다는 것은…….”

“시키는 대로 하거라!”

법정의 일갈에 법계가 입을 다물었다.

방장의 얼굴이 너무 진중하여 설득의 말을 꺼낼 엄두도 나질 않았다.

“반발이 클 것입니다.”

“어쩔 수 없다.”

법정의 눈빛이 싸늘했다.

“민심이 떨어져 나가고 원성을 듣는 건 물론 좋지 않은 일이지. 하지만 최악은 아니다. 최악은 이 일로 인해 소림이 구파와 오대세가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

“욕을 먹더라도 무림의 북두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결정에 반발하고 단독으로 움직이게 된다면 천하가 소림이 더는 구파의 수장이 아니라고 떠들게 될 것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법계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자신이 얼마나 커다란 짓을 저질러 버렸는지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 방장.”

“이 모든 일을 결정한 이가 무당의 허도라는 것을 강조하고, 소림은 지금부터 한 달간 방문객을 받지 않는다.”

“보, 봉문을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봉문은 아니다. 방문객만 받지 않는 것뿐이다.”

법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리는 비는 피해야지. 폭풍이 잠잠해질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우선은 민심이 어떻게 흐르는지 지켜보자꾸나.”

말을 마친 법정은 조금 지친 낯으로 불호를 외었다.

화가 난 이들은 반드시 그 책임을 물을 이를 찾을 것이다. 구파와 오대세가의 원성이 소림으로 향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민심이 소림을 질타하는 건 막아야 한다.

그렇다면 적당한 희생양을 내놓을 수밖에.

“무당……. 이 일로 무당은 그 입지를 잃게 될 것이다. 허도. 허도……. 참으로…….”

법정은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문파를 이끄는 입장이라면 허도진인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를 수가 없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화산이라는 문파가 어떻게 몰락해 갔는지를 알지 않는가?

법정 역시 자신의 대에 소림이 화산처럼 몰락한다면 참아 내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정도가 있는 것을.’

이해는 되지만 납득은 가지 않는다.

법정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은 그때였다.

“바, 방장!”

문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법계가 재빨리 대답을 하자 문이 열리며 법효가 안으로 황급히 들어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허둥지둥하지 말고 말부터 해 보아라. 무슨 일이냐?”

“무, 무당의…….”

무당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법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당의 허도진인께서 장문인의 자리를 내려놓고, 은거에 드신다고 합니다.”

“뭐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법정이 눈을 부릅뜨며 되물었다.

“틀림없는 사실이더냐?”

“예. 무당에서 직접 전해 온 소식입니다.”

“이, 이런…….”

입술 새로 흘러나온 법정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원성을 피하기 위해 잠시 봉문 정도만 할 거라 생각했거늘, 설마 이런 극단적인 수를 써 버릴 줄이야.

‘본인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건가?’

이건 웬만한 각오로는 벌일 수 없는 일이다.

한번 자리에서 물러난 장문인이 다시 그 자리에 앉는 일은 전례가 없다. 그렇다는 건, 허도진인이 이 일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장문인의 자리에서 완전히 물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장문은?”

“한동안은 허도진인의 사제인 허산자가 임시 장문인을 맡는다고 합니다.”

법정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이, 이런 멍청한…….”

죄를 지은 이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멍청한 짓은 바로 죄를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잘 알지 못한다. 당장에야 들려온 소식에 황당해하고 분노하겠지만, 화가 조금 가라앉고 나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으리라 미루어 짐작해 주기도 한다.

지난 세월 동안 구파와 오대세가가 쌓아 올려 온 것이 결코 적지 않으니, 반드시 옹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허도진인이 이 일에 책임을 지고 장문인의 자리에서 물러나 버리는 것은 결국 구파와 오대세가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자인해 버리는 것과 같다.

“내가 직접 허도진인을 만나야겠다.”

“……어렵습니다, 방장. 무당은 지금부터 세 달 동안 봉문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

결국 법정의 얼굴에 퍼런 핏대가 섰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 것이냐! 허도 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작자가!”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법정의 입에서 벼락 같은 노성이 터져 나왔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된단 말인가! 대체 왜!”

분노와 충격으로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무너진다.

그가 지키려 했던, 구파를 중심으로 한 무림 질서가 지금 이 순간 산산조각 나 부서지고 있었다.

‘난세는 이미 도래했었다는 건가?’

구파와 오대세가가 지배력을 잃는 순간, 세상은 더 이상 과거처럼 평온하지만은 못할 것이다.

눈앞에 불타오르는 중원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장강으로 가겠다. 화산을 만나야 한다.”

“……방장. 저희는…… 장강으로 갈 수 없습니다.”

순간 법정의 얼굴에 망연함과 깊은 허탈함이 내려앉았다.

말없이 법계를 바라본 그는 잠시 후 조소하듯 웃고 말았다. 현재의 처지에 대한 조소였다.

“화산의 장문……. 아니, 천우맹주께 서신을 보내라. 내가 한번 뵙자 청한다고.”

“……예.”

“법계는 이 일이 끝나는 대로 참회동에 들어가거라. 네게 반년간의 참선을 명한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허허허허.”

신중하게 쌓아 올린 탑이 일거에 무너져 내렸다. 그가 공들여 쌓은 모든 것이 그저 모래성에 불과했다는 듯이.

‘사패련, 그리고 천우맹,’

두 눈을 감고 불호를 외었다.

‘어렵구나.’

법정은 처음으로, 소림의 이름이 작아지고 있다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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