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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29화 (826/1,567)

829화. 다른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4)

청명이 천천히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옅은 등불 빛이 어른거리는 낯선 천장이었다.

멍하니 누워 천장을 보다 이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또 옛 꿈을 다 꾸네.’

피식 웃어 버린 그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욱신. 욱신. 욱신.

“아야야…….”

그 순간 익숙하지만 낯선 통증이 전신에서 휘몰아쳐 왔다. 상체는 물론이고 거의 전신이 붕대로 칭칭 싸여 있었다.

“아니. 뭔…….”

얼굴을 더듬어 보니 얼굴에까지 붕대가 감겨 있다. 사람을 강시로 만들 작정이 아니었다면, 그가 입은 상처가 그만큼 위중했다는 뜻이리라.

헛웃음을 흘린 청명이 붕대를 풀어내려 할 때였다.

“음냐…….”

“엥?”

어디선가 들려오는 잠꼬대에 청명이 고개를 돌렸다.

작은 등잔으로 밝혀진 실내에 몇몇 놈들이 웅크리고 곯아떨어져 있었다.

바닥에 드러누운 조걸과 구석의 벽에 기대 있는 백천, 윤종. 그리고 그의 침상 앞에 앉은 채로 나란히 엎드려 잠든 당소소와 유이설.

‘어째 전에 한 번 본 광경 같은데…….’

청명이 뒷머리를 긁어 댔다.

아무래도 그를 간호한다고 들러붙어 있다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당연할 것이다. 당소소는 청명과 부상자들을 치료하느라 진력을 뺐을 테고, 다른 이들은 청명과 함께 장일소에 맞서 싸웠으니까. 오검의 몸에도 여기저기 붕대가 감겨 있었다.

‘미련하기는.’

장일소의 기운을 정면에서 받았으니 아마 전신에 성한 곳이 없을 것이다. 고수와 맞선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

그런데도 미련스럽게 저 찬 바닥에서 잠을 자고 있다니.

청명이 새근대며 잠든 이들을 빤히 바라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혹여나 이들이 깰세라 최대한 조심하면서 말이다.

“키이.”

“쉿.”

청명의 기척에 고개를 번쩍 든 백아가 입을 벌리자 청명이 재빠르게 검지를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알아듣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백아가 쪼르르 달려와 그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백아를 머리에 얹은 채 소리 죽여 밖으로 나온 청명은 조용히 문을 닫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강은 아닌 것 같고,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은 모양이네.’

전각 주변을 돌아보던 그는 앞에 보이는 수풀 쪽으로 향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숲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다 보니 적당한 장소가 있었다. 청명은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달이 밝았다.

“하…….”

길게 숨을 내쉬며 멍하니 있다 보니 꿈에서 본 청문의 얼굴이 떠올랐다. 달과 겹쳐진 청문은 청명을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보지 마쇼.”

청명이 괜히 툴툴대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 보지 마시라고요.”

하지만 여전히 빙그레 웃는 청문의 얼굴에, 청명은 아예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아야! 아오……. 더럽게 아프네.”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청명이 얼굴에 감긴 붕대를 잡아 뜯었다.

“내가 쪽팔려서 진짜…….”

거의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

물론 변명하자면 여러 요인이 있다. 하지만 청명은 알고 있다.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된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단 하나뿐이다.

그가 약했다는 것.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건 형편 좋은 생각에 불과하다. 강호에서 중요한 것은 상황에 맞춰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장일소.’

으드드득.

청명이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마지막에 한 방 먹여 주기는 했지만, 그런다고 분이 풀릴 리 없다. 냉정하게 말해 그 협곡 안에서 벌어진 모든 일은 결국 장일소의 계산하에 흘러갔다.

“청진이 놈이 봤으면 끝도 없이 비웃었겠네.”

그놈 할 말이 귀에 선하다.

- 사형. 그러니까 제가 전쟁은 검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고 누누이 말씀드렸잖습니까? 예?

‘네 말이 맞다.’

청명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부족해.’

모든 것이 부족하다.

과거의 화산이었다면, 만인방 따위는 단숨에 쓸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화산에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 아니, 화산이 아니라 청명이 부족하다. 모든 면에서 말이다.

청문처럼 사람을 이끌어 인화를 이끌어 낼 능력이 없다.

청진처럼 날카로운 두뇌를 갖추지도 못했다.

심지어 무위마저도 과거의 매화검존에 비한다면 하찮은 수준에 불과하다.

그가 과거의 무위를 절반만이라도 되찾았다면 전쟁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과거의 무위를 완전히 되찾았더라면 애초에 전쟁이 성립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문파를 이끄는 통솔력.

승기를 잡아내는 지력.

그리고 그 승기를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무력.

전쟁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모두 부족하다. 계책에 빠졌다느니 누가 배신을 했다느니 따위의 말들은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허도가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해도 과거의 화산이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극복해 냈을 것이다. 아니, 이곳에 있었던 게 과거의 화산이었다면 감히 허도가 눈앞에서 그런 짓을 저지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

결국은 그의 부족함이 패배를 불러온 것이다.

하늘의 달을 바라보는 청명의 눈이 어두웠다.

패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오히려 수없이 많은 패배를 겪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니까. 마교와의 전쟁은 그가 쌓아올린 패배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 겪은 패배는 그때와 사뭇 달랐다.

지금은…….

“웃지 마시라고요.”

생각에 잠겨 있던 청명은 자꾸 웃으며 내려다보는 청문을 슬쩍 흘기며 입을 삐쭉거렸다.

남의 속도 모르고 빙그레 웃고만 있는 청문을 보고 있으니 괜히 열이 받아서였다.

하지만 뭘 어쩌겠는가?

그의 기억 속에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청문의 모습이 바로 저리 웃는 모습인 것을.

청명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외롭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저기 있는 바보들이 사람이 외로워할 틈을 안 주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건 아닌데…….”

어두운 밤 풍경에 청명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스몄다.

“그냥 그런 거 있잖아요. 내가 혼자 돌아온 게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사형이……. 그리고 청진이, 사제들이 같이 돌아와 줬다면 지금 같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청명이 입을 꾹 닫는다.

그렇게 한참 망설이다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뗐다.

“제가 아니라 사형이 왔으면 화산이 지금보다는 나았을 텐데. 처음에는 뭣도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요. 내가 멍청했었네요, 사형.”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도 청문의 얼굴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웃고 있었다.

“……거 진짜.”

청명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사람이 각박하게.”

저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약한 소리를 할 수가 없지 않은가.

물론 청명도 안다.

이건 그저 배부른 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이 만약 선계에서 청명을 지켜보고 있다면 스스로 화산을 이끌지 못함에 한탄하고 있을 테니까.

“그냥 좀…… 앓는 소리 좀 해 봤어요. 사형이 있었으면 우는소리라도 늘어놓고, 청진이 놈이 있었으면 구박이라도 했을 텐데. 저 혼자서는…… 네. 혼자니까. 그냥 아무 데도 말할 데가 없으니까.”

어디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이.”

옆구리에 내내 달라붙어 있던 백아아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까만 눈동자를 보며 청명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검지로 백아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너한테 걱정받을 만큼은 아니야.”

청명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렵다.

지금보다 훨씬 강해지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저 과거에 걸었던 길을 그대로 답습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천마를 막아 낼 수 없으니까.

과거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한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느리더라도 한 발 한 발 확실하게 밟아 나가야 했다.

그래서 초조했다.

그가 완성되기 전에 화산이 무너질까 봐. 그가 완벽해지기 전에 천마가 모습을 드러낼까 봐.

날이 갈수록 어깨가 가벼워지기는커녕 더욱 무거워진다. 아이들이 이제는 그의 등을 받쳐 줄 만큼 성장했지만, 압박감은 날이 갈수록 극심해진다.

“이상하네.”

생각에 잠겨 있던 청명이 머리를 긁어 댔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통 안 그랬는데, 오늘따라 장문사형 생각이 왜 이리 나는지 모르겠어요. 얻어맞고 와서 그런가……. 애도 아니고.”

청명이 피식 웃었다.

“알았으니까 그런 얼굴로 보지 마세요. 저 청명이에요. 대충 오늘만 징징대고 내일부터는 멀쩡해질 테니까요. 그냥…… 사람에게는 그런 시간도 필요하잖아요.”

낮 동안 내내 맑더니 밤하늘도 깨끗하여 달이 더욱 선명해 보였다.

청문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 답답한 사람이기도 했다. 과거의 청명은 고집스러울 만큼 우직하게 정도를 지키는 청문의 모습을 때때로 이해하지 못하고 답답하다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사형도 외로웠네요.’

이끄는 자리에 선다는 건 그런 것이다.

스스로가 옳은 길로 걷고 있는지 아무도 말해 주지 않는다. 앞에 아무도 없으니 스스로 끊임없이 묻고 의심하고, 또 고뇌해야 한다.

그런 청문에게 ‘정도’와 ‘협의’란 자신이, 그리고 화산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잡아 주는 등불과도 같았을 것이다.

정도가 아닌 길을 몇 번이나 걷고 싶었겠으나 스스로의 욕망을 참고 억눌렀으리라.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옳은 길로 이끌기 위해서.

청문과 같은 입장에 서고서야 그 어려움과 고독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말인즉, 과거의 청명조차도 청문을 완전히 이해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형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어렴풋이 그 속을 헤아려 보던 청명은 눈을 감았다.

‘술이 고프네.’

근처에 어디 술 좀…….

그때였다.

“청명아!”

“이 새끼 또 어디 갔어!”

“찾아요, 당장! 술 퍼먹고 있을지도 몰라!”

“죽일 거야.”

“…….”

왁자지껄한 소리가 고요를 깨고 날아들었다. 청명이 한숨을 쉬며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저 귀신 같은 것들.’

그새 그가 없어진 걸 발견하고 우르르 나온 모양이었다. 온갖 욕설에 움찔한 청명은 떨떠름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봐요. 내가 말했죠? 외로울 틈을 안 준다고. 쟤들이 예전 저보다는 훨씬 나은 애들이거든요.”

청명이 몸을 일으켰다.

“읏차.”

엉덩이를 툭툭 털어 낸 뒤 몸을 타고 오르는 백아를 잡아 어깨에 올리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강하니까요. 그러니까 그냥 편하게 지켜보시라고요. 그 새끼들 제가 다 패 버릴 테니까.”

씨익 웃고 걸음을 떼는 그 순간이었다.

- 강함이란…….

청명은 다시 시선을 하늘로 던졌다.

-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란다, 청명아.

언젠가 청문이 들려주었던 말이다.

달과 함께 내도록 청명을 굽어보던 청문의 얼굴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청명의 입가에 이내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하여간 잔소리는.”

허리를 쭉 펴고 앞을 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조금 전보다 확연한 의지를 싣고 있었다.

부족해도 좋다.

아직은 부족해도 괜찮다.

다 차 버린 그릇에는 더 이상 물을 채울 수 없는 법. 부족하다는 건 아직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청명은 목이 터져라 불러 대는 사형제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두 다리에, 더 이상의 망설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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