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8화. 다른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3)
의식이 점점 깊은 곳으로 침전한다.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가라앉다 육체와 의식이 서로 나뉘어 점점 멀어져 간다.
흐릿하지만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은, 꿈을 꾸는 듯 몽롱한 의식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 대었다.
‘장문…….’
따아아악!
“아아아아악!”
불현듯 찾아온 고통에 청명이 눈을 번쩍 뜨며 머리를 움켜잡았다.
“아야! 어떤 새끼야!”
“나다.”
“…….”
눈을 까뒤집으며 발작하려던 그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이를 확인하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청명아.”
“네?”
“사람은 살다 보면 졸 수도 있단다. 내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네, 그렇죠. 뭐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니까요.”
“그렇지. 그런데…….”
앞쪽에 앉아 있는 이.
화산의 장문제자 대현검 청문의 얼굴에 뭐라 말할 수 없는 허무함이 내려앉았다.
“내 그리 적게 산 게 아니다만, 훈계를 듣는 와중에 조는 놈이 있다는 소리는 진짜 살다 살다 처음 듣는다, 이놈 시키야!”
“……그게 뭐 제 잘못입니까! 장문사형이 뻔한 소리만 늘어놓으시니까…….”
“뭐, 인마?”
청문이 게거품을 물려 하자 상황을 지켜보던 청진을 비롯한 사제들이 화들짝 놀라 크게 소리쳤다.
“진정하십시오, 장문사형!”
“패시면 안 됩니다!”
그 훈훈한 광경에 청명이 흐뭇하게 웃었다.
평소에 말은 막 하지만 그래도 저 새끼들이 역시나 나를 꽤 존경하고 있…….
“그럼 나중에 저희가 맞는단 말입니다!”
“그거까지 막아 주실 거 아니면 때리지 마십시오! 저희가 두 배로 맞습니다!”
“차라리 화산에서 쫓아내시든가! 그러지도 않으실 거면서!”
“…….”
마지막에 말한 새끼 누군지 내가 봐 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진짜 뒈졌다.
청문이 뒷목을 잡은 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네가 도사냐? 응? 네가 도사야?”
“우리 사형 시력이 많이 나빠지셨나. 이렇게 버젓이 도복을 딱 입고 있는데.”
“도포만 걸친다고 다 도사냐, 이놈아?!”
청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양민들 괴롭히는 마적을 토벌하라고 보냈더니!”
“토벌했잖아요. 시키신 대로 모조리 다 박살 냈는데. 그럼 이러실 게 아니라 칭찬을 해 줘야죠!”
“그래. 참 잘했지, 우리 사제.”
청문이 흐뭇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 하는 양민들에게 뭘 받았다고?”
“네?”
“뭘 받았다는 거 같던데?”
“아아. 그거요?”
청명이 쑥스러운 듯 헤헤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냥 가려는데 그 사람들이 자꾸만 감사하다고……. 제가 아니었으면 그 마적 놈들한테 여럿 피를 봤을 거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그래서 고맙다고, 고맙다고 꼭 보답을 하고 싶다는데 사람의 성의를 너무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뭐…….”
청명이 어색하게 웃으며 슬쩍 눈치를 살폈다.
“쪼오끔 수고비랍시고 챙겨 주는 거나 받아 왔……. 아아아아악!”
청명은 벼락같이 날아드는 벼루를 피해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 벼루가 벽에 그대로 콱 박혔다.
“아니, 지금 절 죽이려고 그러세요?”
“네가 그 정도로 죽으면 내가 이 고생도 안 하지, 이 망할 놈아!”
청문은 이제 아예 앞에 놓인 다탁을 들어 집어 던졌다.
청명이 잽싸게 몸을 옆으로 굴려 피하자 청문의 두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피해? 피해? 오냐, 오늘 어디 너 죽고 나 죽자! 청진아! 가서 회초리 가져와라!”
“옙!”
“너. 어디 한번 가져와 봐.”
“……네.”
“회초리 가져오라지 않느냐!”
“예!”
“잘 생각해라. 진짜 자알 생각해라.”
두 거인……. 아니, 한 거인과 한 악귀 사이에 낀 청진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갈팡질팡 고뇌했다. 그러다 이내 청문을 보며 말했다.
“저…… 장문사형.”
“왜?”
“아무래도…… 제가 오래 꿇어앉아 있었더니 다리에 쥐가 난 것 같은데, 다른 녀석을 보내시는 게…….”
청문이 도끼눈을 뜨고 획 노려보았지만, 청진은 고개를 숙여 시선을 외면할 뿐이었다.
‘권위는 멀고 주먹은 가깝다.’
청명의 종아리가 불이 나면 나중에 청진의 턱주가리에도 불이 날 게 뻔하다. 맞아도 차라리 청문에게 맞는 게 낫지, 저 인간은 진짜 사정없이 패니까 오히려 사정이 더 심각할 것이다.
“끄으으응.”
하나같이 시선을 피하는 사제들을 보며 청문의 입에선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안 그래도 마적에 시달리느라 피폐해진 양민들이거늘! 돈을 뿌려 주고 오지는 못할망정 돈을 받아 와?”
“그럼 준다는 걸 안 받아요? 에이.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요. 하하하.”
“끄윽.”
청문이 찌릿하게 당겨 오는 뒤통수를 움켜잡았다.
“자, 장문사형!”
“진정하십시오! 그러다 넘어가십니다!”
“이런 일 하루 이틀도 아닌데 왜 그리 화를 내십니까?”
저 새끼 아까부터 계속 막타 치네?
넌 진짜 이따가 두고 보자, 너는.
청명이 사제들을 향해 눈을 흘겼다. 화를 못 이긴 청문은 손을 뻗다가 다탁을 조금 전에 던져 버렸던 걸 깨닫고는 청명을 향해 버럭 고함을 쳤다.
“물! 시원한 냉수!”
“예입!”
얼른 대답한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뭐 해? 뛰어, 이 새끼들아!”
“네가 가라고, 네가! 이 새끼야! 너……. 끄으윽…….”
“아이고, 그러니까 진정 좀 하시라니까.”
“자자. 심호흡하십시오. 천천히, 천천히. 옳지.”
청문이 끄륵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가기 시작하자 청명이 재빠르게 밖으로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물을 떠 온 그가 잔을 내밀자 청문이 받아 단숨에 들이켜려다 움찔했다.
“…….”
멍한 얼굴로 내려다보니 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청명아.”
“네?”
“……이거 왜 뜨거운 물이냐?”
“어……. 급하게 찬 거 먹으면 체하실까 봐요. 잘했죠?”
“…….”
“…….”
청문의 두 눈에 짙은 허무가 어렸다.
이걸 정말 죽일 수도 없고.
원시천존이시여. 저한테 대체 왜 이러십니까……?
뭔가 말을 할 듯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이내 그만두고 힘없이 고개를 내저어 버렸다.
“청명아.”
“네, 사형.”
“돈은 왜 받았느냐?”
“아니, 뭐…… 준다니까…….”
“솔직하게!”
“끙.”
청명이 못마땅하게 입을 쭉 내밀더니 볼멘소리를 했다.
“솔직히 이해가 잘 안 갑니다.”
“뭐가?”
“막말로 그건 원래 관에서 해야 할 일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귀한 시간을 내서 거기까지 가서 도와주는 거고요.”
“그렇지.”
“그럼 대가가 있는 게 맞는 것 아니에요?”
“…….”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남이 어떻게든 해 준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잖아요. 세상이란 게 원래 주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는 거죠. 그렇다고 제가 뭐 대단한 걸 받아 온 것도 아니잖아요. 그거 해 봐야 몇 푼 된다고.”
청문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마적 놈들 몇몇 때려잡는 게 네게 그리 대단한 일이더냐?”
“……그건 아니죠.”
“그래. 한 식경이면 끝날 일 아니더냐?”
“한 식경이든 한 시진이든 일을 한 건 맞잖아요.”
영 이해 못 하는 눈치인 청명을 빤히 보던 청문이 물었다.
“내가 마적들에게 당할 상황이어도 구해 주고 수고비를 달라고 할 셈이냐?”
“에이. 사형이랑 그 사람들이랑 같을 수 있나요. 걱정하지 마세요. 사형이 마적들에게 습격당하면 제가 그 마적 새끼들 아주 토막 내 버릴 테니까요. 어디 마적들 따위가 뒈지려고!”
청명이 진지하게 결의를 다졌다. 청문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가만 보았다.
‘어찌해야 할꼬…….’
청명의 행동을 강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구시렁대기야 하겠지만, 청명은 어쨌든 그의 말을 곧잘 따르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이곳은 도문. 제 마음이 가는 대로 행해야 하는 곳이다. 그러니 청문이 해야 할 일은 청명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힘없는 이들의 마음을 느껴 보라고 굳이 보냈건만.’
저 뛰어난 재능에 협의가 함께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하지만 본디 하늘은 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주지 않는 법이다.
“청명아.”
“예?”
“화산이 왜 협의를 강조하는지 아느냐?”
“정파니까요.”
“그럼 정파는 왜 협의를 강조하는지 아느냐?”
“……글쎄요. 있어 보여서?”
청문이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는 검을 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수련을 통해 강해지려 하는 사람이다. 물론 그 수련 또한 도를 깨닫기 위한 방편이지만, 어쨌거나 힘을 키우는 이들이라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지.”
“그렇긴 하죠.”
“그리고…… 사람이란 검을 쥐면 휘둘러 보고 싶어 하고, 힘을 가지면 사용해 보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허리에 검을 차기로 결심한 자는 언젠가 반드시 그 검을 뽑게 된다는 의미다.”
청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청문의 말이 옳다. 평생 제 문파 안에서 수련만을 반복하다가 삶을 끝내는 이는 거의 없다. 어떤 식으로든 쌓은 무력은 표출되기 마련이다.
“그 힘을 받아 내는 이들이 누구더냐?”
“…….”
“그 역시 사람이다, 청명아.”
청문의 눈이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방향을 잃은 힘은 압제가 되고 패악이 된다. 협의를 세워야 하는 이유는 측은지심 때문이 아니다. 스스로의 길을 올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올바름을 잊은 힘은 언젠가는 스스로를 파멸시킨단다.”
“에…… 그러니까…….”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쁜 놈들만 패면 된다는 거잖아요.”
“…….”
“알았어요, 알았어요. 거 수고비 안 받으면 그만이지. 그거 뭐 몇 푼 된다고.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청명의 대답에 청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청명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행한다. 하지만 그건 결코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청문이 그걸 원하기 때문이다.
청문이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청명이 화산의 검으로만 살아가길 원했다면 그거로도 충분했을 것이나, 청문이 진정 원하는 것은 청명이 한 사람의 도인으로서 올바르게 서는 것이었다.
그게 비록 말도 못 하게 힘든 일이라 해도.
“청명아.”
“네?”
“그래,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좋다. 하나 이 말만은 기억하거라.”
“예.”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해낼 수는 없다.”
“…….”
“네가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네가 아무리 대단한 경지에 오른다고 해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언젠가 네가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너 역시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하게 바라게 될지 모른다.”
“제가요?”
청명이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의 청명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은.
잃어 보지 못한 이는, 부족함을 절절히 느껴 절망해 보지 않은 이는, 누군가 사심 없이 내밀어 주는 손에 담긴 온기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언젠가 네가 무력함을 느낄 때, 스스로 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절망할 때, 그때가 되면 너도 이해할 것이다. 네가 도와준 양민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
“그때가 되면 네 검에 협의를 담겠다고 나와 약속해 줄 수 있느냐?”
“끙.”
청명이 여전히 잘 모르겠단 얼굴로 머리를 긁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사형.”
“그래. 네게는 쉽지 않은 일이지.”
“하지만 뭐…….”
하지만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느끼게 된다면……. 제가 그걸 실감하게 된다면 사형의 말대로 할게요. 그런데 장담은 못 하겠어요.”
“그래. 그걸로 되었단다.”
청문이 빙그레 웃으며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서 네가 받아 온 돈을 돌려주고 오거라.”
“……어, 그거…….”
“술값으로 다 썼다는 것 알고 있다. 네가 꿍쳐 놓은 돈 가져가서 한 푼도 빼놓지 말고 돌려주거라.”
“…….”
“대답은?”
“눼.”
청명이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청문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래.”
“그럼 다녀올게요.”
청명이 몸을 획 돌렸다. 그러자 청문이 그런 그의 등에 대고 나직하게 덧붙였다.
“아, 그리고…….”
“네?”
“마적들 털면서 빼돌려 놓은 재산도 모두 양민들에게 풀고 오거라.”
“…….”
청명의 몸이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었다.
잠시 후 천천히 돌아보는 그의 얼굴엔 더없는 절망이 어려 있었다.
“그, 그걸 어떻게…….”
“청진아.”
“……예.”
“따라가서 한 푼도 못 빼돌리게 감시해라. 청명이 너는 이번에 또 빼돌리면 정말 거꾸로 매달아 버릴 것이니 처신 똑바로 하고!”
“…….”
“매달리는 거랑 돈 챙기는 것 중에 뭐가 나은지 고민하지 말거라. 돈은 돈대로 털고, 매달기도 할 테니까.”
“……귀신.”
“쯧.”
시무룩해진 청명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먼저 방을 나서자, 청진이 한숨을 쉬며 조심스레 물었다.
“장문사형. 청명 사형께 너무 많은 걸 바라시는 게 아닙니까? 사형은 저희 같은 범인과는 다르잖습니까?”
“알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 하지만…….”
청문은 청명이 닫고 나간 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청명도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는 날이 올 것이다.
저 녀석은 다름 아닌 청명이니까.
청문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슬쩍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