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7화. 다른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2)
당군악의 얼음장 같은 눈빛이 남궁황을 꿰뚫는 듯했다.
‘왜 여기에…….’
저 먼 사천에 있어야 할 당군악이 어째서 이 장강에 모습을 드러냈단 말인가? 그것도 왜 하필이면 지금.
남궁황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물론 현재 이곳에 있는 모두는 그 누구도 마주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러 버렸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하필 이런 상황에 다른 이도 아니고 당군악을 마주한다는 건, 남궁황에게 있어선 그 어떤 것과도 비할 바 없이 끔찍한 일이었다.
안위의 남궁세가와 사천의 사천당가.
두 문파는 오랜 세월 동안 오대세가를 이끌어 온 두 축이었다. 자연히 남궁황과 당군악은 각 세가의 가주로서 오래도록 서로 경쟁했고 협력했으며, 또 반목했다.
남궁황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저 구파일방이나 사파 놈들보다 더욱 지고 싶지 않은 이가 바로 당군악인 것이다.
“대답해라, 남궁황.”
당군악이 싸늘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일갈했다.
“네가 그리 소리 높이던 협의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
“그러고도 네가 창천 남궁세가의 가주인가? 살아남기 위해서 사파에게 목숨을 구걸하고도 그 입으로 ‘창천(蒼天)’을 논할 수 있는가?”
남궁황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깨물었다.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당군악의 질책이 아니었다. 그 질책을 듣고도 한마디의 변명조차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대답해라.”
“…….”
“그 목숨이 그렇게도 중요했나? 협의라는 가치를 땅바닥에 내던질 만큼?”
“……당군악.”
당군악이 이를 갈아붙였다. 그는 지금 남궁황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당가가 천우맹의 소속이 되며 관계가 복잡해지긴 했지만, 사천당가는 아직까지 오대세가의 일원으로 불리는 곳. 그 오대세가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남궁세가가 보여 준 추태가 그의 피를 거꾸로 흐르게 만들었다.
아니, 오대세가뿐만이 아니다.
“대답해 보시오, 선사.”
“……아미타불.”
당군악의 눈빛을 받은 법계가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며 작게 불호를 외었다.
그 힘없는 반응을 보고도 당군악의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우습구려.”
싸늘한 냉소가 모두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협의는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누누이 강조하던 그대들이 막상 그 말을 지킬 기회를 얻자마자 협의와 의기를 헌신짝처럼 내다 버릴 줄이야. 그러고도 당신들이 정(正)과 의(義)를 논할 자격이 있소? 그러고도?”
법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입이 열 개 있다 한들 할 말이 있겠는가?
사천에 위치해 그나마 당군악과 왕래가 있었던 청성의 벽현자가 씁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만하시지요, 당가주님. 이 모든 일은 허도진인이 저지른 일입니다. 남궁가주와 법계 선사께서는 이 일의 피해자나 다름없습니다.”
“피해자?”
하지만 당군악의 입가엔 명백한 조소가 어렸다.
“나서서 외치지 않았으니 결백하다?”
“그건…….”
“내 하나 묻겠소.”
당군악이 살기까지 흐르는 눈으로 모두를 노려보았다.
“그럼 당신들은 왜 지금 살아 있소?”
“…….”
그 말이 결국 벽현자까지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제자들을 살린다? 좋소. 그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하지만 그렇다면 당신들은 왜 지금 살아서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있소? 그것도 이렇다 할 상처 하나 없이!”
분기탱천한 당군악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터져 나왔다.
“화산의 어린 후배가 피를 흘리며 싸울 동안 그대들은 대체 뭘 했는가! 이곳에서 가장 먼저 피를 흘리며 싸웠어야 했을 이가 대체 누구냔 말이오!”
남궁황은 눈을 감은 채 코로 깊은 숨을 내쉬었다.
상황을 보느라 승부에 전념하지 못했다는 말은 입으로 내기에도 조악한 변명에 불과하다.
그저 사는 내내 몰랐던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말이다.
물론 억지로라도 변명을 할 수야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화산신룡의 전신을 뒤덮은 상처가 그의 혀를 굳게 만들고 입술을 무겁게 짓눌렀다.
“세상이 그대들의 폭력을 용인하는 이유는 그 검 끝에 협의가 담겨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오. 제 이득을 위해서 협의를 잊는 순간…….”
당군악이 씹어뱉듯 뇌까렸다.
“도적과 다를 바가 없는 법이다. 이 멍청한 작자들아.”
“…….”
정적이 흘렀다. 당군악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욕을 해 봐야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걸 알기에 더 답답했다.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힌 그는 이를 악물며 선언했다.
“사천당가의 가주로서 선언하오. 오늘 이후로 사천당가가 오대세가로 불릴 일은 없을 것이오.”
“당군악!”
“주둥아리 닥치지 못해, 이 빌어먹을 놈아.”
남궁황이 당황하여 크게 소리치자 당군악이 범처럼 으르렁대며 그 입을 막았다.
“시기와 질투를 위해 달려온 일을 두려움과 비겁함으로 끝맺었구나.”
당군악이 싸늘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모두를 노려보다가 몸을 획 돌렸다.
“이곳에서 꺼져라. 이제 장강은 너희가 밟을 수 없는 땅이다.”
남궁황의 몸은 이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끔찍한 모멸감과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크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승선해라.”
“……예.”
결국 남궁황이 힘없이 말하자 남궁세가의 가솔들이 나직이 대답하고는 물가에 정박된 배로 향했다.
“아미타불.”
법계 역시 고개를 가로젓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자꾸나.”
소림승들도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배로 향했다. 하지만 몸을 돌리는 이들 사이에서 한 사람만은 그저 발을 땅에 붙이고 서 있을 뿐이었다.
“……뭘 하는 게냐?”
“장로님.”
혜연이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
법계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노기가 치솟았다.
그는 지금 방장의 권한을 대행하고 있다. 그의 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방장에 대한 거역이자, 소림 전체에 대한 거역이었다. 혜연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법계를 응시했다. 치솟은 화도 잠시였고, 법계는 그 담담한 얼굴에 순간적으로 힘이 풀렸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아득바득 절벽을 기어올랐다.
그때 아래에 남아 오르는 이들의 뒤를 지킨 것은 오직 혜연뿐이었다.
이 끔찍했던 지옥에서 자비(慈悲)와 이타(利他)라는 소림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했던 이는 오직 혜연뿐이었다. 그런데 법계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마음대로 하거라.”
“아미타불.”
혜연이 가만히 반장 했다. 법계는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배로 향했다.
홀로 남은 벽현자가 그늘진 얼굴로 당군악을 향해 쭈뼛쭈뼛 입을 뗐다.
“당가주님…….”
“지금은.”
하지만 당군악은 시선조차 주지 않고 싸늘히 일갈했다.
“말을 섞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그만 돌아가십시오, 장문인.”
“…….”
벽현자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프구나.’
당군악은 수많은 제자들의 목숨을 책임져야 한다는 그 무거운 중압감을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런 당군악조차 저리 경멸 어린 반응을 보이는데 세상 사람들의 반응은 얼마나 차갑고 싸늘하겠는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시렸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보중하시길.”
참담한 심정으로 그 말만을 남긴 벽현자가 제자들을 이끌고 배로 향했다.
배로 향하는 이들의 발걸음에 힘이라고는 없었다. 돌아올 때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너무도 많은 것을 잃었다.
가장 먼저 소림의 배가 좁은 골짜기로 접어들었고, 그 뒤를 이어 남궁세가의 배가 협곡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청성의 배마저 느릿하게 뱃머리를 돌렸지만, 가장 먼저 승선을 마친 무당의 배만은 아직 정박한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 무당의 배 앞에 승선하지 않은 한 사람이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자가…….”
당군악이 나서려 하자 청명이 그의 팔을 잡으며 만류했다.
“잠깐만요.”
그리고 무당의 배 앞에 서 있는 이를 향해 다가갔다. 홀로 뭍에 서 있던 허도진인은 다가오는 청명을 빤히 보더니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그리 기분 나쁜 얼굴로 보지 말게, 화산신룡.”
“…….”
“천우맹은 나쁠 것이 없겠지. 특히나 자네라면 구파와 오대세가가 비난받는 때를 놓치지 않을 테니까. 차라리 솔직하게 기뻐하는 건 어떤가?”
청명은 이렇다 할 대답 없이 허도를 빤히 보았다.
“……왜? 아직 할 욕이 남았는가?”
허도가 묻자 청명은 한참을 어둑한 눈으로 그를 보다 입을 뗐다.
“멍청아.”
싸늘한 일갈이었다.
“선택을 했으면 이 악물고 버텨. 스스로 한 선택을 스스로 의심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어. 그리고 그렇게 악을 써 봐야 더 욕해 주지도 않을 거고, 내게 욕을 퍼먹는다고 속이 편해지지도 않을걸.”
“…….”
“그래,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짓을 하긴 했지. 너는 네가 한 선택을 남은 평생 후회하며 살게 될 거다. 그리고 그 책임은 너뿐만이 아니라, 무당과 구파 전체가 지게 될 거야.”
허도진인이 표정 하나 변치 않고 청명의 말을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를 얼굴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되레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입술을 깨문 건 청명이었다. 그는 잠깐 말꼬리를 흐리다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멍청하다고 욕하기는 하겠지만, 비겁하다고 비웃지는 않아.”
“…….”
허도진인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청명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복잡하기 짝이 없는 심정이다. 틀렸다는 것을 알지만,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 잘못을 저질러야만 했던 심정은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도 수없이 후회해 온 일이니까.
그가 조금만 더 이기적이었다면, 청문이 조금만 더 간사했다면…….
“속 편해졌으면 그만 꺼져.”
“하…….”
허도진인이 나지막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표정 없는 그 얼굴이 어쩐지 조금 전과는 달라 보였다.
“다시 보지.”
“됐거든요?”
“다시 보게 될 걸세. 언젠가는…….”
허도진인이 몸을 돌려 배 위로 뛰어올랐다. 그가 승선하자 배가 천천히 뱃머리를 돌려 협곡을 빠져나갔다. 강 위에 긴 파문을 남기며 멀어지는 무당의 배를 바라보던 청명이 입맛이 쓰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마 비난하지 못했다.
만일 청문이었다면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허도를 꾸짖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선 건 청문이 아니고, 청명은 그럴 수 없었다.
‘나도 아직 멀었네.’
어깨를 으쓱한 청명이 피식 웃으며 하늘을 향해 뭔가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휘청.
“……어라?”
‘뭐지?’
왜 세상이 빙글빙글…….
아니, 왜 바닥이 솟아오르지?
“청명아!”
“야, 이놈아!”
여기저기서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모든 소란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갑갑하고 멍멍해졌다. 그리고 이내 세상에서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몸이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고만 있었다.
‘장문사형…….’
의식을 잃고 쓰러진 청명을 붙든 화산의 제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름을 불렀지만 청명은 조금도 듣지 못했다.
수많은 이들의 욕망과, 수많은 이들의 속내.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이루려 하는 이들과, 모든 것을 잃더라도 놓으려 하지 않는 이들.
그 많은 것들이 뒤섞여 타오른 거대한 전쟁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다만, 누구도 이 끝을 진정한 끝이라 생각지 않았다.
이것은 그저 시발점이다.
언젠가는 세상을 집어삼키고 태우는 겁화로 자라날, 작은 불씨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