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826화 (823/1,567)

826화. 다른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1)

백색의 마차와 그 뒤를 따르는 만인방이 멀어져 갔다.

당가를 이끌고 도착한 당군악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탄식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늦게 온 모양이군.”

“아니요.”

청명은 고개를 저었다.

“제때 와 주셨어요.”

“자네 몸이…….”

“뭐, 이 정도야.”

걸레짝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청명은 태연하게 웃었다.

실제로 그에게 이런 상처 정도야 과거에는 별것도 아니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도 아니고.

“……의술에 뛰어난 이들을 여럿 데리고 왔으니 우선 치료부터 받게나.”

“아뇨. 괜찮아요. 그보다…….”

몸을 돌리려는 청명의 어깨를, 순간 당군악이 움켜잡았다.

“…….”

청명이 의아하게 돌아보니 그가 단호한 얼굴로 거듭 말했다.

“치료부터 받게.”

“…….”

“뭐 하는가?”

“예, 가주님!”

어깨에 백색 천을 두른 당가의 장로가 뛰어왔다. 청명은 조금 난처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치료받을게요. 진짜 치료받을게요. 그런데 지금은 안 돼요. 일단 정리부터 끝내고요.”

“급한 일인가?”

“급하다기보다는…… 해야 하는 일이라서요.”

청명의 눈빛을 본 당군악은 영 못마땅한 듯 주저하다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다만 하나는 기억하게. 자네의 몸은 자네의 것만은 아닐세. 이끈다는 건 그런 것이지.”

“…….”

“왜 그런 눈으로 보는가?”

“아뇨, 뭐…….”

청명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예전에 꽤 자주 듣던 말이다.

- 이놈아! 네 몸뚱이가 어디 너 혼자만의 것인 줄 아느냐!

‘잔소리…….’

그 뻔한 잔소리를 여기서 다시 듣게 될 줄이야. 급박한 일을 겪은 직후라 그런지 괜스레 코끝이 아려 왔다.

“그래. 어땠는가, 장일소는?”

“……뱀이더군요.”

“너무도 커다란 뱀이지. 세상은 거대한 뱀을 용이라 부른다네.”

“용은 얼어 죽을. 그래 봐야 뱀이지.”

청명은 이제 희미한 점처럼 멀어진 장일소의 마차를 노려보았다.

‘지금은 얼마든지 기뻐해라.’

하지만 다시 보게 될 때는 그 미소도 모조리 걷힐 것이다.

“쯧.”

짧게 혀를 찬 청명은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올라가시죠. 장문인이 위에 계세요.”

“알겠네. 그런데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자네 상태를 보아 큰 싸움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장일소가 순순히 물러나지? 그는 딱히 피해를 입은 것 같지도 않던데.”

“그게…….”

청명은 무어라 말을 골라 보다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한숨을 쉬었다.

“설명하자면 좀 복잡해요.”

당군악의 두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 * *

“청명아!”

내내 불안해하며 기다리던 오검은 절벽을 다시 오르는 청명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같이 가겠다고 했지만, 여럿이 가면 다시 싸움이 난다는 청명의 말에 이곳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말린다고 가지 않을 놈도 아니니까.

“괜찮으냐? 장일소 그 개자식이 또 수를 써 대지는 않았고?”

“제까짓 게? 뒈지고 싶지 않으면 입 처닫고 있어야지!”

“……난 진짜 너란 놈을 모르겠다.”

청명의 몸 상태를 살핀 그들은 새로 입은 상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뭘 하고 온 건데?”

“별것 아냐. 그냥 그대로 보내 주기는 배알이 뒤틀려서 속이라도 좀 뒤집어 주고 왔지.”

“……미친놈아, 제발 좀…….”

백천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때 뒤쪽에서 현종이 오검 사이로 걸어 나왔다.

청명은 바로 앞까지 다가온 현종을 보며 어색하게 말했다.

“장문인…….”

현종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청명의 몰골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나다 못해 생살을 저미는 느낌이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청명의 양 어깨를 짚었다.

“……고생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말았다. 청명의 얼굴을 마주 보기 힘든 것처럼.

“정말…… 정말 고생했구나……. 내가 면목이 없다…….”

만인방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제자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믿었지만, 청명의 모습을 눈앞에 두고 보니 그 말조차 덧없게만 느껴졌다.

다른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이 아이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옳은가?

“나는…….”

그 순간 청명의 자신의 어깨를 잡은 현종의 손을 가만히 움켜잡았다.

“훌륭하셨어요.”

“…….”

“장문인께서 흥분하셨다면 모두 무사하지 못했을 거예요. 장문인이 거기 계셔 주신 덕분에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었어요.”

현종은 차마 어떤 말도 더 꺼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망할 녀석 같으니.’

왜 이런 상황에서도 남을 생각하는가? 이곳에서 가장 고통받은 이는 다름 아니라 청명 본인인데.

‘이 아이는 매번 이런 지옥을 넘어왔구나.’

새삼 생각하게 된다.

지금의 화산은 어쩌면 청명이 흘린 피로 만들어졌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을 눈앞에 둔 현종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내가…….”

“장문인. 당가주님께서 오셨어요.”

무어라 말하려다 멈춘 현종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고개를 드니 조금 뒤쪽에 서 있는 당군악의 모습이 보였다. 청명이 옆으로 비켜 길을 터 주자 현종이 당가주를 향해 가만히 포권 했다.

“오랜만에 뵙니다, 당가주님.”

“맹주님을 뵙습니다.”

당군악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늦게 도착하여…….”

“아닙니다. 이리 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한데 어찌 아시고…….”

“화산신룡에게서 연통을 받았습니다.”

현종이 확인하듯 돌아보자 청명이 겸연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뭔가 돌아가는 상황이 미묘해서요. 헛걸음을 하면 힘만 빼는 일이지만, 위험한 것보다는 낫잖아요. 말씀 미리 안 드린 건 죄송해요.”

“아니다. 아니야.”

현종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이곳에 오기까지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에게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발목이나 잡아 대고 있구나.’

그나, 지금의 화산이나 아직은 청명에게 너무도 부족하다.

“사정은 오면서 대충 들었습니다, 맹주님.”

그 말에 현종은 작게 탄식했다. 당군악의 목소리가 평소에 비해 차게 굳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디에 있습니까?”

당군악이 입술을 짓깨물고는 재차 물었다.

“다른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 * *

“으으…….”

“괜찮나, 사제?”

절벽 아래로 다시 내려온 이들은 부상당한 이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곳곳에 널린 시신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얼굴엔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이 어렸다.

“사, 사형…….”

부상을 입고 꿈틀거리던 무당의 제자 하나가 저를 돕는 이의 팔을 움켜잡고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사…… 사파 놈들은…….”

“…….”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눈을 질끈 감은 이는 고개를 돌린 채 짧게 대답했다.

“일단은 몸부터 수습하게.”

“……사, 사형…….”

“배로 옮겨라.”

“예.”

부상자를 둘러업은 이들은 정박되어 있는 배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현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협의란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것. 정(正)의 이름을 내거는 이들은 옳음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들어 왔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숨을 다한 이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죽었는가?

그들은 협의를 지키지 못했고, 옳음도 지키지 못했다.

그렇다면 남은 이들이 지킨 것은 또 무엇인가? 결국 지금 살아 있는 이들이 지킨 것이라고는 구차하게 남은 목숨뿐이다.

“서둘러라!”

남궁황의 차디찬 목소리가 울렸다.

“해가 지기 전에 수습을 끝내야 한다!”

“예.”

남궁세가의 일원들이 대답했다. 하지만 이곳에 올 때와는 달리 그 목소리들에 힘이라고는 없었다.

당연히 남궁황도 그런 그들을 탓하지 못했다.

우득.

다만 주먹을 움켜쥔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쪽을 감시하듯 노려보고 있는 흑룡채의 생존자들이 보였다.

이가 갈렸다.

저 증오스러운 놈들이 그들을 비웃고 있지만, 남궁황은 저들에게 손을 쓸 수가 없다. 이미 잃을 것은 충분히 잃었다. 그런 상황에서 저들에게 분풀이를 해 봐야 꼴만 더 우스워질 뿐이다.

‘장강이라.’

조약 같은 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는 제 발로 장강을 밟지 않을 테니까. 흐르는 장강을 두 눈으로 본다면 오늘의 이 굴욕이 되살아날 것이 뻔하니 말이다.

“가주님, 수습이 끝났습니다.”

“시신은?”

“……정중히…….”

남궁황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따져 보면 피해가 그리 큰 것은 아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진 이들이 큰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막상 죽은 이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남궁황의 시선이 어느 한곳에 고정되었다.

추락한 바윗덩어리들을 밀어 내며 부상자들을 수습하기에 바쁜 젊은 중의 등이 보였다.

타인에게 감사를 표하는 일이 흔치 않은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정으로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가 아래에서 흑룡채를 견제해 주지 않았다면, 부상을 입고 추락한 이들은 모두 흑룡채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혜연이라고 했었나?”

“예. 화산과 함께 다니던 그…….”

“또 화산인가.”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분명 이곳에 들어올 때만 해도 그들 모두가 패기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꼬리를 말아 넣은 개 꼴이 되어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다.

남궁황은 문득 원독 실린 눈으로 이 모든 일의 원흉을 노려보았다.

허도진인.

그가 무당의 제자들을 단속해 배에 태우고 있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으드득.

이를 갈아붙인 남궁황은 씹어뱉듯 뇌까렸다.

“이제 천하가 모두 우리를 손가락질하겠지.”

“가주님…….”

“대체 이 굴욕을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만회할 때가 올 것입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고 했습니다. 언젠가는 저 간악한 사패련주의 목을 베어 오늘의 빚을 갚게 될 것입니다.”

“……빌어먹을.”

그때였다.

“음?”

순간 느껴지는 낯선 기척에 남궁황이 고개를 돌렸다. 절벽 위에서 몇몇 사람이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화산인가?’

남궁황의 얼굴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지금 화산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도 사람인지라 감사하는 마음이야 당연 있었지만, 그것과 이 마음은 별개였다. 오히려 염치가 있는 사람인지라 지금 화산 앞에서 얼굴을 들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남궁황이 맞닥뜨린 현실은 그보다 조금 더 잔혹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이제는 익숙해진 화산신룡 청명의 얼굴.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건…….

그를 알아본 남궁황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어쩌면 그가 지금 이 순간 천하에서 가장 보고 싶지 않을 이가 그곳에 있었다.

탁.

절벽 아래에 내려선 그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철갑이라도 씌운 듯 차고 냉정한 얼굴.

녹색 무복의 넓은 소매 아래로 드러난 사슴가죽 장갑.

“당…군악…….”

남궁황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천당가의 가주 당군악이 그를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왔다.

저벅. 저벅. 저벅.

일 장 앞쯤에 선 당군악은 주변을 천천히 한번 둘러보고는 남궁황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게…….”

“…….”

“그 잘난 오대세가의 선택인가?”

당군악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이…… 수치가 뭔지도 모르는 머저리 같은 것들이!”

여과도 없이 쏟아지는 당군악의 노기에 남궁황은 결국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