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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25화 (822/1,567)

825화. 이 전쟁은 내가 이겼다. (5)

“입은 살았군.”

“호오?”

장일소가 흥미가 당긴 듯 웃었다.

“그럴 생각도 없는 주제에.”

청명의 말에 장일소의 눈이 묘한 빛을 품었다.

확실히 이놈은 재미있다. 장일소를 가장 잘 아는 호가명조차도 그의 속내를 완전히 읽어 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놈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진의를 알아낸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상대가 또 있을까?

“없었지?”

“뭘 말하는 거지?”

“폭약.”

“하하하핫.”

장일소가 낄낄대며 웃어젖혔다.

“벌써 확인하고 온 것은 아닐 테고……. 아쉽네. 구멍이 뚫린 곳을 직접 확인하고 위장이 비틀렸어야 하는 건데. 물론 나는 그 광경을 못 보니 그건 또 그거대로 아쉬웠겠지만.”

청명의 입가가 일그러지는 듯 뒤틀렸다.

‘잘도 놀아났군.’

물론 폭약은 있었다.

처음 절벽을 터뜨린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다. 분명 폭약은 존재했다.

하지만 그 외의 폭약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 절벽을 모조리 무너뜨릴 만큼의 폭약은 관이라 해도 구하기 어렵다. 그걸 구하고, 또 모두의 시선을 피해 단기간에 장강으로 옮겨 와 적절한 곳에 심어 두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 순간에는 아무도 그곳에 폭약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다. 심지어 청명조차도.

이유는 두 가지.

발화한 폭약에 절벽이 눈앞에서 터져 나가는 모습이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 어마어마한 광경을 눈앞에서 본 이들이 이성적으로 침착하게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그때는 절벽에 폭약이 설치되었을 확률이 십분지 일밖에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더라도 절벽을 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십분지 일의 확률에 목숨을 걸 이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또 하나는…….

“득달같이 백뢰포를 끌어모아 와 넘긴 것도 애초에 밑밥이었군.”

“아무렴.”

장일소가 신이 난 듯 웃었다.

이건 마치 장기 같다. 그가 두었던 수에 담긴 의미를 청명이 천천히 복기하는 느낌이 아닌가?

아무리 대단한 수를 두더라도 그 수의 의미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기사는 외로워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뛰어난 사람에게는 호적수가 필요하다.

“장강에 온 이들은 너희 화산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감시하고 있었지. 너희가 백뢰포를 손에 넣었다는 것 정도는 당연히 알았겠지.”

“…….”

“멍청한 놈들이 아니라면 그 백뢰포가 내 손에서 나왔다는 걸 나와 마주한 순간에는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니…….”

장일소가 기괴한 미소를 짓는다.

“당연히 내가 폭약을 다수 확보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너희 덕분에 말이다.”

“뱀 같은 새끼가…….”

이건 욕이라기보다는 칭찬에 가까운 말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구파일방은 존재하지도 않는 폭약에 겁을 먹고 필사적으로 절벽을 올랐다. 그 덕분에 입지 않아도 되는 피해를 입고, 절벽을 오르며 힘을 모조리 소진해 버린 것이다.

“퇴로에도 아무것도 없었겠지?”

“물론이지.”

장일소가 기특하다는 듯 웃으며 덧붙였다.

“거기까지 병력을 뺄 여력은 없었으니까.”

“……그놈들이 퇴로로 돌아나가면 어쩔 생각이었나?”

“별수 없지. 닭 쫓던 개가 되어 터덜터덜 돌아가는 수밖에.”

장일소가 어깨를 으쓱한다.

“하지만 그럼 그놈들이 생각 이상으로 멍청하다는 걸 확인하게 되는 것이니, 그 나름대로 성과가 있는 것 아니겠나? 그런 멍청한 놈들이라면 언제든 집어삼킬 수 있을 테니까.”

청명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아예 배를 쥐며 웃었다.

이건 정말 숫제 미친놈이다.

무언가 잘못 삼킨 것처럼 뱃속이 뒤집어졌다. 하나하나 짚어 볼수록 더욱 확연해진다.

이곳에 있던 모두가 장일소에게 놀아났다.

청명을 더욱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화산조차 장일소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는 점이다.

그들을 장강으로 유인한 것에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되었으니까. 장일소는 애초부터 화산을 장강으로 끌어들여 다른 구파들까지 유인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사파가 감히 자신들을 상대로 함정을 팔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그 수작질에 그대로 걸려들었고.

웃음이 돌연 씻은 듯 사라지고 차가운 표정만이 남았다.

“장강불침이라…….”

청명이 이를 갈았다.

“잘도 천우맹을 그 조약에서 제외했군.”

“네가 승낙할 리 없으니까.”

장일소가 낄낄대며 웃었다.

“저런 얼간이들과는 다르지. 너는 물러서지 않아. 그리고 그 자리에서 천우맹을 대신해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이는 너뿐이었지.”

“그게 전부가 아닐 텐데?”

“하……. 하하.”

환히 웃던 장일소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청명의 말이 이번에는 그의 예상조차 벗어난 듯 보였다.

“어쨌든 좋아. 넘겨준 땅은 잘 써먹도록 하지. 수적 새끼들에게 똑똑히 전해. 근처에 얼씬만 해도 목을 잘라 버리겠다고 말이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장강에 접근할 수 없다는 건 이해했을 텐데? 그런데 왜 내가 너희의 영역을 보장해야 할까? 응?”

“그게 네가 원하는 거니까.”

“…….”

장일소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살심.

그의 가늘어진 눈 사이로 일순 진득한 살심이 새어 나왔다.

“화산신룡. 화산신룡…….”

가만 읊조리던 장일소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 이름은 이제 네게 너무도 부족하군. 심장이 서늘해질 정도야.”

“가마 태울 것 없어. 뻔한 수작질일 뿐이지.”

지금 장일소가 원하는 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철저한 몰락이다. 우선 당장은 천우맹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세력으로 따지자면 아직은 천우맹과 사파를 모두 합쳐도 저 구파일방, 오대세가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열세일 테니까.

천우맹과 사패련이 손을 잡을 가능성이 전무한 이상, 이 한 번의 승리로도 사패련은 안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불침조약으로 시간을 번다. 그리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철저하게 무너뜨린다.’

구파와 오대세가가 장강에서 패하고 물러섰다는 소문은 아마 곧 천하로 퍼져 나갈 것이다. 그리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다는 소문 역시 그럴 것이다.

바로 장일소가 직접 퍼트릴 테니까.

비난은 하늘에 닿을 것이고, 그들이 쌓아올린 명성과 매끄럽게 닦아 온 명예는 흙바닥에 처박힐 터.

그런데 그 와중에…… 천우맹이 당당하게 장강의 한 축에서 버텨 낸다면?

천우맹이 그곳의 양민들을 지켜 내게 된다면?

‘구파에겐 그야말로 지옥이겠지.’

천우맹마저 굴복했다면 어쩔 수 없었다는 여론이라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천우맹은 끝까지 항전했다는 소문이 퍼져 버리면 이제는 누구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이름 앞에 ‘협의’라는 두 글자를 가져다 대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

다시 말해, 지금 가장 필사적으로 천우맹을 상찬해야 할 이는 다름 아닌 장일소라는 뜻이다.

“쯧. 재미가 없군. 겁을 먹고 달아나려는 놈에게 던져 주듯 주는 선물이어야 하는데.”

장일소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혀를 찼다.

“너희가 점령한 곳은 물론, 구강으로는 수로채가 접근하지 않을 거다. 구파 놈들이 너 죽고 나 죽자고 물류를 막아 버리거나, 저 멍청한 흑룡왕 놈이 과하게 배를 쑤셔 대 강남으로 통하는 상권이 막혀 버리면 내가 곤란해지니까.”

“멍청하게 지껄이는군. 그 말을 듣고도 내가 적당히 몇 푼 받고 통과시켜 줄 거라 생각하나?”

“어차피 뜯어낼 대로 뜯어낼 생각이잖니? 아닌가?”

청명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물론 속이야 뒤집어졌다. 이가 절로 갈릴 정도로.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 천우맹과 화산은 이번 일로 잃은 것이 없다. 오히려 과할 정도로 많은 것을 얻었다.

천우맹은 이제 과거 강호의 협의를 대변하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자리를 빼앗게 될 것이고, 강남으로 상하는 뱃길을 독점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사패련은 그 대가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내부를 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적대적 공생관계.

그들 사이에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가, 화산신룡?”

“……뭐가?”

“내 선물은 마음에 드나?”

“…….”

“너는 이 선물을 거절할 수 없어. 아니, 거절할 방법이 없지. 하지만 고마워하지는 않아도 된다. 나도 네게 충분히 많은 선물을 받았으니 말이야. 하하하하핫!”

청명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나도 말해 두지.”

“음?”

장일소는 웃음을 머금은 채 채 청명을 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못 견디게 궁금하다는 듯이.

“네 말이 맞다. 이 전쟁은 네가 이겼어.”

“흐음?”

“하지만 그건 겨우 전쟁일 뿐이야.”

“…….”

장일소의 눈이 슬며시 가라앉았다.

“지켜보면 알게 될 거다. 네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멍청한 짓?”

“전투 따위야 전쟁에 비하면 작은 것이지.”

“그렇지.”

“하지만 전쟁도 명운에 비한다면 별것 아니야.”

“…….”

“네가 정말 강호를 손에 넣고자 했었다면, 이곳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와 화산을 무너뜨렸어야 해. 눈앞에 있는 작은 먹이에 정신이 팔려서 큰 것을 놓친 건 오히려 너야.”

“…….”

“알게 될 거다.”

청명의 몸에서 섬뜩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화산에게 시간을 주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말이야. 그리 길지 않을 거야. 네 목이 잘리는 순간, 너는 반드시 오늘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게 된다. 반드시.”

“…….”

장일소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단순한 협박……. 아니, 그저 오기에 찬 발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일소의 귀에는 저 말이 그리 단순히 들리질 않았다.

살려 보내야 한다. 청명은 그의 계획에 반드시 필요한 이니까. 그가 존재하기에 천우맹과 사패련, 그리고 구파와 오대세가가 서로 균형을 맞출 수 있다.

청명이 존재하지 않게 되면 천우맹은 급속도로 붕괴할 것이고, 견제자가 사라진 구파와 오대세가는 두 눈에 핏발을 세우고 남하할 테니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의 본능이 말하고 있다.

어쩌면 이 애송이를 살려 보내는 게 구파와 오대세가를 상대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일이 될지 모른다고.

이자가 말한 그대로 말이다.

우드득.

장일소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이라도…….’

들끓는 살심에 장일소가 입술을 깨문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문득 저 멀리서 빠르게 접근하는 한 무리의 무인들이 보였다.

‘저건?’

장일소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직은 너무도 멀어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놀라운 속도로 접근하고 있다.

‘녹색?’

그들이 걸친 녹색 피풍의를 보는 순간, 장일소는 접근하는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쯧…….”

입맛을 다신 장일소는 쥐었던 주먹을 마지못해 풀었다. 제아무리 그라고 해도 저들이 도착하기 전에 청명을 죽이는 건 무리다. 그리고 여기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이제는 장일소 쪽이 불리하다.

이렇게 되면 결국…….

“……목숨을 구한 건 내 쪽이었다는 건가.”

“허도 그 병신이 멍청한 짓거리만 하지 않았어도 말이지.”

사천당가. 그들이 청명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만일 저들이 전장에 합류했다면 결과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언제 불러 둔 거지?”

“세상일은 어찌 될지 모르니까.”

장일소가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위험했군.’

하마터면 되레 궁지에 몰릴 뻔했다. 이놈은 정말 위험하다.

“아무래도 좋아.”

장일소는 제 손에 든 술을 마저 비우고 청명을 내려다보았다.

“어찌되었건 이 전쟁에서 승리한 건 나다.”

“그래. 그러니 즐겨 둬라.”

청명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길지 않을 기쁨의 순간을 말이야.”

서로를 응시하는 두 사람의 눈엔 진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흥.”

가볍게 코웃음 친 장일소가 먼저 몸을 돌려 마차에 올랐다.

“출발하자꾸나.”

“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 안에서, 장일소는 묘한 얼굴로 머리를 벽에 기대었다.

‘찝찝해졌군.’

완전한 승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꽤 운이 좋았던 승리가 아닌가? 사천당가가 도착할 때까지 저들이 버텨 내기만 했다면 전장의 주도권을 사패련이 쥐고 협의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술맛 떨어져.”

붉은 입술에서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장일소의 눈이 뱀처럼 가늘어졌다.

‘화산……. 그리고 화산신룡 청명.’

장일소가 그 이름을 심장에 새겨 넣는 순간이었다.

“적당한 이름을 준비해야겠어. 이 장일소의 적이 그렇게 애송이처럼 불려서는 곤란하니까.”

잠시 후, 그가 흘린 나직한 웃음이 마차를 넘어 고요해진 대지로 천천히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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