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2화. 이 전쟁은 내가 이겼다. (2)
내뻗은 손과 악다문 입술.
모두의 시선이 허도진인에게 꽂혀 있었다.
오검은 물론이고, 뒤쪽의 구파일방, 심지어는 사파들까지도 충격에 두 눈을 부릅뜨고 허도진인을 보았다.
그중 표정에 변화가 없는 이는 오직 하나, 장일소뿐이었다.
“후욱……. 후욱, 후욱…….”
허도진인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는 뻗었던 손을 움켜쥐며 거두고는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훔쳤다.
“이…… 이 미친 새끼가!”
백천이 이를 갈며 허도진인을 향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살기를 뿜었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무슨 짓을! 이……!”
무당의 장문인에게 욕지거리를 뱉으며 악을 쓸 만큼 백천의 머릿속은 분노로 꽉 차 있었다.
하지만 허도진인은 그의 고함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시선이나 흘끗 준 뒤 장일소에게로 천천히 걸어갈 뿐.
청명에게 딱히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은 그걸 풀 때가 아니었다. 허도진인이 청명을 공격한 이유는 그저 하나.
누구든 장일소를 공격해 이 절벽 위를 다시 전쟁터로 만드는 걸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허도진인은 장일소의 일 장 앞에 섰다. 그리고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엉망이 되어 버린 몰골과, 황망하게 흔들리는 눈들.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질끈 깨문 허도진인은 마침내 장일소를 직시했다. 그의 두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장일소는 그 증오 어린 눈빛을 그저 웃는 낯으로 받았다.
두 사람에게로 시선이 잔뜩 몰렸다.
“패군……. 아니, 사패련주.”
그리고 그 가운데 허도진인이 입을 뗐다.
“대무당파의…….”
목소리가 마치 무언가를 안간힘을 다해 참는 것처럼 꾹 눌려 있었다.
“대무당파의 장문인으로서 무당을……. 아니, 무당과 천하의 정파를 대표하여…….”
장일소의 입꼬리가 점점 더 말려 올라갔다.
그의 만면에 사특한 웃음이 번진 순간 허도진인이 토하듯 말을 내뱉었다.
“……사패련에 화의를 요청하오.”
지옥과도 같은 정적이 절벽 위에 내려앉았다.
모두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허도진인을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화의?
지금 화의라고 한 건가? 무당이 사패련과 화의를 한다고?
모두가 듣고도 이해하지 못했다. 무당과 사패련, 그리고 화의라는 단어가 도무지 얽혀 들질 않았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을 눈앞에서 맞닥뜨린 이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그 죽음과도 같은 정적을 깬 것은 장일소였다.
“흐음…….”
그가 흘린 나직한 비음은 재미있고 즐거운 듯 꽤 달떠 있었다.
“화의라…….”
가만히 허도진인을 바라보던 그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그 고고하신 무당의 장문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이거 원, 황송스럽네.”
“…….”
장일소의 이죽거림에도 허도진인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치욕이라도 감내하겠다는 듯이.
“그래서…… 조건은?”
“일 년!”
허도진인이 씹어뱉었다.
“앞으로 일 년 간, 구파일방을 비롯한 오대세가는 장강을 넘지 않겠소. 아니, 장강으로 접근하는 일도 없을 것이오. 이곳에서 화의를 하고 우리를 이대로 보내 주기만 한다면!”
“허도오오오오오오오!”
그제야 절벽 위로 올라온 남궁황의 입에서 처절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미쳤느냐!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그의 두 눈에 차오른 분노가 금방이라도 넘칠 듯 끓었다.
정신이 나가 버리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말을 내뱉는단 말인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사패련과 화의를 한다니. 이건 구파와 오대세가의 근본을 뒤엎는 일이다.
“공포에 질려 돌아 버리기라도 한 건가? 어디 저 더러운 사파 놈들에게 굴복한단 말이냐! 그러고도 그대가 무당의 장문인인가! 부끄럽지도 않느냐!”
남궁황의 목소리는 실로 처절했지만 허도진인은 조금도 변함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시오.”
“뭐라?”
“닥치라고.”
허도진인이 남궁황을 가만 노려보았다. 눈에서 살기가 뚝뚝 떨어졌다.
그 가공할 기세에는 남궁황도 질린 듯 입을 닫고 말았다. 불구대천의 원수를 맞닥뜨렸다 해도 저런 눈으로 노려보지는 않을 것이다.
“……천치 같은 인간이.”
허도진인이 이를 갈아붙였다.
하지만 그의 행동을 이해 못 한 건, 뒤늦게 절벽 위로 오른 법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문인! 지금 대체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소림은 이 사태를 좌시할 수 없습니다.”
그의 얼굴은 황망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허도진인이 한기가 흘러나오는 목소리로 그런 법계를 추궁했다.
“좌시?”
“…….”
“좌시하지 않으면?”
“……아미타불.”
허도진인의 기세에 법계 역시 저도 모르게 불호를 외며 입을 닫고 말았다.
“책임질 수 있소?”
“……무엇을…….”
“이곳에서 모든 제자를 잃고 소림으로 돌아가 방장께 보고할 자신이 있느냐 물었소. 아니, 그대마저 죽어 보고할 이조차 남지 않는 상황을 감당할 수 있소? 그 책임을 당신이 질 수 있냐 이 말이오.”
“…….”
법계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세상 누가 그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는 소림의 방장이 아닌 일개 장로에 불과하다. 그 사태를 결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법계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허도진인이 차게 일갈했다.
“그럼 물러나시오.”
“하지만…… 장문인.”
“내 말을 이해 못 하겠소?”
“…….”
“물러나라 했소.”
허도진인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책임을 질 각오도 없고, 이 상황을 해결할 능력도 없다면, 입을 닥치는 법이라도 알아야지. 개처럼 짖어 댄다고 뭐가 해결된단 말인가.”
그가 꽉 물어 찢어진 입술에서 흐른 피가 턱을 타고 점점이 아래로 떨어졌다.
굴욕?
자존심?
그 따위가 뭐가 문제라는 말인가?
지금 이곳에서 그의 생때같은 제자들이 죽어 가고 있다. 절벽을 올라오느라 있는 힘을 다 써 버린 그들에겐 이 절벽 위에 진을 치고 있는 저 승냥이 같은 사패련도들을 당해 낼 방법이 없다.
설사 이겨 낸다 한들 그들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이겨 내어 봐야 남는 이는 고작 한 줌. 그건 곧 무당의 멸문을 의미한다.
사파를 몰아내는 대가로 멸문을 각오하란 말인가?
‘개 같은 소리.’
그들이 사파를 몰아내고 멸문한다면 그 성과는 남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나눠 가질 것이다. 무당과 소림, 남궁과 청성은 다시는 정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세를 잃어 몰락하겠지.
마치, 과거의 화산처럼.
화산은 기적적으로 그 세를 회복했지만, 무당에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니, 무당의 장문인으로서 그는 결코 무당이 기적을 바라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화의요, 사패련주!”
허도진인이 핏발이 선 눈으로 입을 열었다.
“화의의 대가로 일 년간의 불가침조약을 맺겠소. 정(正)을 표방하는 이들은 앞으로 일 년 동안 강남의 땅을 밟지 않을 것이오.”
“흐으으으음.”
장일소가 딱히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강남이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군. 이미 강남은 우리의 땅이거늘.”
“그게 아니라는 것은 당신이 가장 잘 알 텐데?”
“……호오?”
장일소가 빙글빙글 웃어 댔다.
하지만 허도진인은 그런 여유를 보이지 못했다.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사패련은 급조된 단체. 이곳에서 조금만 더 피해를 입는다면 순식간에 붕괴하겠지. 당신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닐 터.”
“…….”
“일 년의 시간이면 사패련을 정비하고 강남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데 충분할 시간이겠지. 그렇지 않소?”
묘한 표정을 짓는 장일소를 향해 허도진인이 쐐기를 박았다.
“그게 아니라면 여기서 서로 공멸할 때까지 싸워야겠지. 사패련과 이곳의 다섯 문파가 모두 멸문하는 것이 진정 그대가 원하는 결말이오?”
그 말에 장일소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흰 이가 섬뜩하게 드러났다.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은데.”
“적어도 그대는 남은 이들에게 어부지리의 기회를 주고 싶지 않을 테니까.”
“하하하하하하하핫!”
장일소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부지리.
맞는 말이다. 이곳에서 그들이 전력을 소모한다면 남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하할 것이다.
이 다섯 문파를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이어지는 공세를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 본디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 세를 빼앗긴 그들은 끝까지 처절하게 물고 늘어질 것이다.
“똑똑하군, 허도진인.”
“…….”
“하지만…… 구차하고, 비열해. 아, 그리고 또 간악하군. 그래, 마치…….”
비웃음 어린 말이 느릿하게 허도진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사파처럼.”
더없는 굴욕감이 허도진인의 온몸을 짓눌렀다. 몸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감히 그 말에 항거할 수 없다.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그가 아닌, 장일소니까.
“그래. 나는 당신 같은 이를 좋아하지. 하하하하하하하하핫! 그 대단하신 무당의 장문인이 살려 달라고 빌어 대는 꼴이라니! 으하하하하하하하핫!”
장일소의 광소가 절벽 위로 퍼졌다.
으드드득.
절벽 위에 선 구파의 제자들은 분노를 참으며 입술을 짓깨물었다.
너무도 극심한 굴욕감 때문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사파에 목숨을 구걸할 일이 생길 거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싸우다 죽어야 한다.
그게 협의고, 그게 그들이 배운 바다. 하지만 누구도 나서서 내가 죽겠노라 말할 수 없었다.
하나가 죽는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이곳에서 싸운다는 것은 모두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 지독한 무게를 감히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먼저 알아야겠군.”
웃음을 뚝 그친 장일소가 허도진인을 빤히 보았다.
“그대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을까? 정파를 대표해 협의를 하고, 그걸 지키게 만들 만한 힘이?”
“무당이 하지 못한다면 누구도 하지 못하오.”
“…….”
“우리는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는 이들이니까. 무당과 소림의 이름으로 맺어진 맹약을 무시할 수는 없소. 그리고…… 소림과 무당, 남궁이 나서지 않는다면…….”
허도진인이 잠시 주저하다 이를 악물고는 말을 이었다.
“그 어떤 문파도 감히 강남을 밟을 엄두를 낼 수 없을 것이오. 사패련이 지배하는 땅을…….”
장일소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데?”
“……내 목이라도 걸겠소이다.”
“흐음.”
장일소가 콧소리를 내며 웃어 댔다.
“측은하구나.”
그 말에 허도진인의 주먹이 새하얗게 질리도록 꽉 쥐어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붉은 피가 주먹 틈으로 투둑 떨어져 내렸다.
“그 목숨 따위에 가치가 있을 리 없지만 천하에 이름 높은 무당의 장문인이 이리 비굴하게 빌어 대는데, 안쓰러워서 들어주지 않을 도리가 있어야지.”
“…….”
“하지만 똑똑히 알아 둬라. 이건 불가침 협의가 아니라, 불침의 화의다. 장강을 넘을 수 없는 것은 오직 너희뿐, 사패련은 장강을 넘어 북진하는 데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기간은 일 년이 아니라 삼 년이다.”
홉뜬 허도진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절치부심하며 선 그의 심정을 누가 완전히 헤아릴 수 있으랴. 하지만 장일소는 그런 그를 모두 빤히 들여다보는 듯 웃었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비릿한 웃음과 함께 속삭이듯 말했다.
“그 구차한 목숨이야 살려 돌아갈 수 있도록 내 배려해 드리지.”
“…….”
허도진인은 말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를 악물고 있는 무당의 제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눈마다 찬 의기는, 설령 이곳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그 굴욕을 감내하지 마시라 외치고 있었다.
하나 오히려 그렇기에 그가 해야 하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허도진인의 손이 천천히 들렸다.
잘게 떨리는 손끝이 그의 심정을 모두에게 알리고 있었다. 떨리는 손은 허공에서 맞닿아 공수를 취했다.
장일소를 향해 천천히 허리를 숙인 허도진인은 차마 하늘을 볼 수 없다는 듯 그 고개마저 푹 숙인 채, 작게 말했다. 속삭임에 가까운 소리였다.
“……받아들이겠소.”
“흐으으음.”
장일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절벽 위에 모인 모두를 아주 천천히 훑었다. 그의 입에서 웅혼하며, 또한 한없이 요악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 장일소는 이 자리에서 사패련주의 이름으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리고 사패련이 강남 불침의 조약을 맺었음을 선언한다. 향후 삼 년 간! 구파일방도, 오대세가도 강남땅에 발을 들일 수 없다! 그 대신…….”
장일소가 제 입술을 검지로 천천히 훑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살아 돌아가거라. 그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고.”
“…….”
그 말은 비수가 되어 절벽에 오른 모든 이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하하하핫.”
장일소가 모두를 빤히 바라보더니 몸을 돌렸다.
“돌아가자. 패배자들의 모습을 보는 건 영 괴로운 일이니까. 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
남은 이들에게는 눈길을 줄 가치조차 없다는 듯, 그는 광소를 터뜨리며 멀어져 갔다.
구파의 제자들 모두가 웃음소리를 들으며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원망하고 싶고, 욕지거리를 토하며 화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처절하게 알고 있었다.
누구 하나 나서지 못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 화를 내고 언성을 높여 허도진인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허도진인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패배.
뼛골에 비수를 박아 넣는 것만 같은, 완벽한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