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1화. 이 전쟁은 내가 이겼다. (1)
윤종은 턱 근육이 곤두서도록 이를 악물었다. 검을 잡은 손에선 핏기가 빠져나갔다.
광기에 잡아먹힐 것만 같다.
장일소의 광기는 손에 잡힐 듯 사람을 짓누르고 덮친다. 너무도 생생한 날것의 광포함.
세상에 이런 인간이 존재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마주 선 것만으로도 심장이 갉아먹히는 듯했다.
‘어떻게 맞설 수 있지?’
장일소와 마주 서서 대치하는 청명의 모습을 보았다.
윤종은 알 수 있다.
청명은 이미 한계다. 아니, 어쩌면 한계를 넘었을지도 모른다. 미세하게 떨리는 청명의 다리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명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어떻게…….’
그때, 장일소가 흘러내린 머리를 천천히 쓸어 올렸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말끔하게 넘기고 얼굴에 흐른 피를 훔쳐 낸 그는 묘한 눈빛으로 청명을 응시했다.
“애송이라…….”
이를 드러낸 장일소의 얼굴은 피에 굶주린 늑대를 연상케 했다.
잔혹함이 고스란히 묻어나 섬뜩하기 이를 데 없다. 당장이라도 그 이가 목을 물어뜯고 숨통을 끊을 것만 같다.
“이 천하에 나를 그리 부를 수 있는 이가 또 있을까?”
확실히 애송이라는 말은 장일소와는 거리가 멀다.
특히 패군 장일소와는 말이다.
“재미있는 일이구나.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으니 말이야.”
“…….”
장일소의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 미소를 본 순간, 오검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불길함이 엄습하는 걸 느꼈다.
뭐라 해야 할까, 이 기분을? 불안함에 심장이 아리기까지 한 이 느낌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장일소가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그냥 넘겨서야 체면이 살지 않겠지? 그렇지 않니?”
장일소가 일순 전신에서 가공할 기운을 내뿜었다.
그 기세를 정면으로 받은 청명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했다.
“쿨럭!”
청명의 입에서 폭포 같은 피가 흘러나왔다.
장일소를 상대하느라 몸 안의 내력을 지나치게 끌어다 썼다. 과도하게 내력을 끌어내 잠깐 한계를 초월했었지만, 그 부작용이 전신을 덮쳐 오고 있었다.
“으…….”
청명이 나오지 않는 힘을 억지로 짜내 검을 움켜잡은 그 순간이었다.
턱!
유이설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장일소가 뿜어내는 기운을 받아 내느라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뎌 마침내 청명의 앞을 감싸고 섰다.
그리고 떨리는 검을 들어 올려 장일소의 목을 향해 겨누었다.
장일소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처음 패기 있게 달려들었을 때와는 다르다. 지금은 그들 모두가 막아선다고 해도 장일소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막아서는 이가 있다.
쿵!
그때 백천 역시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며 걸어 나왔다.
잔뜩 굳은 낯으로 유이설의 곁에 서서 장일소에게로 검을 겨누었다.
“하…….”
윤종도 조걸 역시 마찬가지. 모두가 앞으로 나서서 청명을 감싸고 장일소를 막아섰다.
조걸이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까진 것 같은데.”
“청명이는 살려야지.”
“……사숙. 애새끼 데리고 튀십쇼. 여긴…… 일단 어떻게든 제가 막습니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나는 가장 먼저 죽는 역할이다.”
“하여튼 사숙 고집은…….”
다들 떨리는 목소리로 어떻게든 허세를 부린다.
덜덜 떨리는 다리와 핏기 가신 입술로 지껄여 대는 농담은 그저 나약함을 필사적으로 감추기 위한 처연한 수작일 뿐이다.
하지만…….
천하의 모든 것을 비웃고 조롱하는 장일소조차 이번만은 저들을 비웃지 않았다.
앞으로 나서는 건 어렵지 않다.
하룻강아지는 범이 무서운 줄을 모른다. 그리고 이 세상에 하룻강아지들은 많다 못해 넘쳐난다.
하지만 저건 그런 겁 없는 자의 만용이 아니다.
용기란 두려움을 모르는 게 아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것은 그저 멍청함에 지나지 않는다.
두려움을 알면서도 나서는 것.
적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사시나무처럼 떨면서도 또다시 한 걸음을 내디딜 줄 아는 것.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떻게든 검을 들어 올릴 줄 아는 것.
용기란 그런 것이다.
그 순간 장일소는 똑똑히 느꼈다.
이들이 앞을 막아서는 순간, 청명의 호흡이 달라졌다. 천하의 장일소를 앞에다 두고도 감히 느긋하게 숨을 가다듬고 다시 힘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이놈들이 나를 한순간이라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저 총명한 이가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할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 청명은 분명 제 앞을 막은 이들을 믿고 있었다.
저런 애송이들을 말이다.
“하, 하하핫!”
장일소가 이죽이죽 웃으며 그들 뒤에 선 청명을 보았다.
“인정하지. 용기는 가상해. 하지만…… 그게 꼭 좋은 건 아니지. 겁쟁이는 가장 오래 살아남고, 용기 있는 자는 가장 먼저 죽는 법이란다.”
“…….”
“그래서…… 너희 중 가장 용기 있는 자는 누구지?”
까드득.
장일소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귀기 어린 얼굴의 그가 앞으로 한 발 내디디며 모두를 위압했다.
“그래, 어디 한번 그 목숨으로 너희의 용기를 증명해 봐라.”
장일소의 존재감이 오검 전체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마치 태풍이 불어닥치는 듯한 강력한 위압감에 숨통이 조여 들었다. 모두가 그 압력 앞에 신음했다.
그때 오검의 뒤에서 비틀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여튼 주둥아리는…….”
“…….”
장일소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청명은 뻐근한 목을 좌우로 꺾었다.
“사파 새끼치고는 말이 많은 편이네. 그렇게 생각한다면 덤비면 될 일인데, 왜 겁먹은 개새끼처럼 자꾸 짖어 대지?”
청명이 이를 드러냈다.
한계? 이길 수 없는 적?
그게 뭐가 어쨌단 말인가?
‘그딴 걸 계산하는 인간이 십만대산에 오를 수 있었을 리 없지.’
장일소는 모른다.
장일소가 아무리 숱한 격전을 치르며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상처를 입었다 해도, 그 목숨을 수십 차례 던지며 생사의 기로를 밥 먹듯이 넘나들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결코 청명과 같아질 수 없다.
그는 모른다.
절망과 싸운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전력을 다해 달려들어도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되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악물고 싸워야 했던 이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걸 극복해 낸다는 게 어떤 건지도!
“미안한데.”
잠깐 스치는 숱한 얼굴들을 뒤로하고 청명이 피식 웃었다.
“이딴 걸 위기라고 부르기에는 내가 겪은 게 너무 많다.”
“…….”
“그러니까 작작 짖고 덤벼. 네가 왜 애송이인지 제대로 알려 줄 테니까.”
장일소는 말없이 그런 그를 뚫어져라 보았다.
아무리 봐도 청명은 이미 한계에 달했다. 검을 들고 있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그런데도…….
‘저 눈.’
왜 저 눈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의 승리를 믿고 있는가?
그 순간 장일소는 직감했다.
그의 인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해석할 수 없는 이를 만났다는 것을 말이다.
그 순간이었다.
“끄으으…….”
침묵에 젖어 있던 절벽, 그 아래에서 솟아오른 손이 낭떠러지 끝을 콱 움켜잡았다.
모두의 시선이 일순 그쪽으로 쏠렸다.
“으으…….”
엉망진창이 된 손이 하나둘 솟아올랐다. 무당의 검수들과 소림의 무승들이 마침내 지옥 같은 절벽을 오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올라라!”
“방심 말고 끝까지 올라가! 오른 이들은 뒤쪽을 보호해라!”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절벽 위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절벽을 오른 이들은 자연스레 청명의 뒤쪽으로 집결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하오문의 무력대와 흑귀보의 귀검대가 재빠르게 장일소의 등 뒤로 달려와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절벽 위에 팽팽한 긴장감이 들어찼다.
청명은 장일소를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이거…….”
이죽이는 낯에 명백하게 비웃음이 실려 있었다.
“잘나신 듯 떠들어 댄 것치고는 계획이 잘 안 풀리신 모양인데? 어쩌지? 다들 올라와 버렸는데 말이야.”
“…….”
“그러니까 지껄일 시간에 싸웠어야지.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장일소가 이 말에 반박할 수 있을 리 없다. 절벽 아래에서 저들을 처리하겠다는 장일소의 계획은 완전히 부서진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모두가 장일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계획이 어긋난 지금 이 순간, 장일소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후 장일소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에 모두가 일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의 만면에는 지금까지 중 가장 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인정하지.”
“…….”
느릿한 어투는 묘하게 들떠 있었다.
“이 전투는…….”
잠깐 말을 멈춘 그가 청명을 보며 입술을 핥았다. 그러더니 아주 천천히 말했다.
“……네가 이겼다.”
“…….”
완전히 예상에서 벗어난 장일소의 말에 청명은 되레 얼굴을 굳히고 장일소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쥐어짜듯 말했다.
“……뭔 개수작이냐?”
“말 그대로지.”
장일소가 어깨를 으쓱한다. 처음의 여유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너희에게 이토록 발목이 잡히는 건 내 계산에는 없었단다. 확실히 너희는 내가 만든 그림을 완전히 뒤틀어 놨지. 그러니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니.”
“…….”
“내 패배다. 이 전투는 너희의 승리야. 확실히 전투는 강한 자가 무조건 이기는 건 아니지. 이건 꽤 아프구나. 가명이가 비웃겠어.”
청명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장일소를 노려보았다. 장일소가 하고자 하는 말이 여기서 끝일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장일소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그건 그저 전투에서일 뿐이야.”
“…….”
“이 전쟁은 내가 이겼다, 화산신룡.”
평소의 청명이었다면 저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확신으로 꽉 찬 장일소의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구나.”
장일소의 입가가 뒤틀렸다.
“너는 이곳에서 그 사실을 가장 잘 알아야 할 이건만, 전혀 알지 못하는구나. 그것도 참 기이한 일이지. 확실히 너는 특이해.”
“뭔 개소리를…….”
“알려 주지.”
장일소는 청명의 말허리를 끊고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마치 스승이 아끼는 제자를 가르치는 것처럼 부드러운 어투로 일렀다.
“말해 주지, 화산신룡. 전투와 마찬가지로, 전쟁 역시 강한 자가 이기는 게 아니야. 전쟁은…… 지킬 것이 있는 자가 패하는 거란다.”
장일소가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톡톡 쳤다.
“그렇기에 너희는 나를 이길 수 없는 것이지. 이해하겠니?”
청명이 검을 움켜잡았다.
“이 새끼가…….”
우드드득.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몸에 힘이 들어가며 그의 발이 땅을 파고들었다.
장일소의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무슨 수작질을 부리는 건지는 단번에 알 수 없었다. 다만 ‘지킬 것’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청명의 머릿속에는 오검부터 화산, 혜연까지 수많은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확실한 것은 하나다.
장일소가 무언가 수작질을 부리기 전에 저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
청명이 굶주린 이리처럼 자세를 낮추자 장일소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 말을 전혀 이해 못 했구나, 화산신룡. 이 전쟁은…….”
장일소가 선언하듯 두 팔을 펼치며 말했다.
“이미 끝났다.”
“주둥아리 닥쳐, 이 새끼야!”
결국 청명이 땅을 세게 박차며 장일소에게로 곧게 날아들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검에 맺힌 검기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장일소는 그런 청명을 보면서도 그저 기괴하게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검이 결코 자신에게 닿을 수 없다는 걸 안다는 듯.
‘대체?’
지독한 위화감이 청명을 휩쓰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앗!
장일소에게 달려들던 청명의 두 눈이 커다랗게 부릅뜨였다. 그의 고개가 격하게 옆으로 돌아갔다.
콰아아아앙!
하지만 손을 써 볼 틈도 없었다. 날아든 장력이 청명의 옆구리에 틀어박힌 것이다.
“청명아아아아아아아!”
상상도 못 한 사태에 청명의 뒤를 따라 돌진하려던 유이설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처, 청명! 청명아아아아아!”
청명이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오검이 악을 쓰며 청명을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백천만은 악귀 같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청명에게 장력을 날린 이.
전혀 예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결코 막을 수 없었던 암수를 날린 이의 얼굴을.
“이…….”
으드드드드득.
백천의 이가 갈리고, 두 눈에선 핏줄이 툭툭 터져 나갔다. 목울음같이 나직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허…도.”
그의 입에서 결국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처절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도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무당의 장문인, 허도진인.
그가 귀기 어린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