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9화. 우리 애들은 조금 거칠거든. (4)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 몸은 섬뜩할 정도로 빠르게 낙하하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그딴 것에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쇄애애애액!
청명의 검이 수십 자루로 분열했다. 진득한 살의가 담긴 검영이 장일소를 향해 일제히 쏘아졌다.
“하!”
순간 외마디 비웃음을 흘린 장일소의 우수에 가공할 내력이 모였다.
촤아아아아악!
단숨에 휘둘러진 장일소의 손이 날아드는 검영을 일거에 찢어발겼다. 그리고 동시에 청명을 노리고 빠르게 쇄도했다.
물러설 수 없다.
이곳은 발이 땅에 닿는 지상이 아니다. 제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가진 이라 해도 이 허공에서 낙하하는 동안엔 운신이 자유롭지 않을 터.
청명이 가진 과감함도, 그 모든 과감함의 기본이 되는 정확한 신법도 이곳에서는 그 위력이 반감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청명의 두 눈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숨통을 끊을 듯 날아드는 장일소의 장력을 향해 검을 내뻗었다.
콰드득!
검이 금속을 뚫고 들어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장력 사이로 박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저 넓은 범위를 점해 오는 장력을 온전히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한데 그 순간!
파르르르르!
청명의 검이 손잡이부터 경련하듯 떨리기 시작했다. 작은 진동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검 전체가 좌우로 요동쳤다.
파아아아앗!
단번에 휘둘러진 검은 이내 장일소의 장력을 벌리며 끝내 찢어 버렸다.
장일소가 두 눈을 부릅떴다.
천하의 장일소조차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일 수다. 장력을 꿰뚫고 흔들어 결국 날려 버린다는 게 현실에서 가능하단 말인가.
하지만 놀라고 있을 틈 따위는 없었다.
장력을 튕겨 낸 청명의 검 끝이 이 순간에도 작은 매화를 그려 내고 있다. 시간을 빨리 돌리기라도 한 듯, 눈부신 속도로 피어난 매화가 장일소의 면전으로 달려들었다.
작고 소담스러운 꽃.
하지만 그 내면은 더없이 치명적이다. 장일소 역시 이를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손을 휘둘러 매화를 막아 냈다.
파사삭!
장일소의 손이 매화를 움켜잡고 짓이겼다. 그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꽃 따위는 너무도 여리고 하찮을 뿐이다.
한데 그 순간 장일소의 눈에 세 송이의 꽃이 또다시 날아드는 것이 보엿다.
어떤 것은 빠르고 쾌속하고, 또 어떤 것은 부드럽고 유려하며, 또 하나는 강맹한 힘을 싣고 있었다.
다 같되 결코 같은 꽃이 아니다.
“수작질을!”
이 역시 장일소가 단번에 손을 휘두르니 세 송이의 꽃이 모조리 찢어발겨졌다. 푸른 불꽃 같은 그의 경기가 으스러뜨린 꽃을 새파랗게 태워 버렸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직후 장일소가 본 것은 그에게 날아드는 열두 송이의 꽃.
그리고 그 뒤로 또다시 피어나는 꽃, 꽃, 그리고 꽃들.
수십 송이가, 수백 송이가. 그리하여 마침내는 수천 송이가.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는 이 지독한 골짜기의 허공에서 홍매화 같은 검기가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매화검결(梅花劍結). 매화란구주(梅花亂九州).
청명이 만들어 낸 매화가 세상에 어지러이 퍼져 나갔다.
“큭!”
천하의 장일소조차 이 가공할 검술 앞에서는 당황 어린 목소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매화뿐이다.
두 눈에서 흉흉한 살기를 뿜어낸 장일소가 양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곧 두 주먹에서 검은 벼락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쏟아지는 권의 연환(連環).
수백 번, 수천 번 내질러진 주먹이 하늘을 검은 벼락으로 뒤덮었다.
수라살권(修羅殺拳) 묵뢰겁천(墨雷劫天).
“하아아아아압!”
“으아아아압!”
거리는 불과 다섯 자.
검을 뻗으면 닿을 거리. 주먹을 날리면 부술 수 있는 거리.
그 거리를 두고 하늘을 뒤덮는 꽃의 구름과 벼락의 뇌운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필사적으로 절벽을 오르던 이들도 일제히 손과 발을 멈추고 입을 벌렸다.
아래에서 이제는 닿지도 않을 화살을 필사적으로 쏘던 이들도, 서로를 치열하게 밀어 내던 화산과 만인방도들까지도.
심지어 그 광경은 제 모든 것을 걸고 격돌하던 각 문파 수장들의 시선마저 빼앗았다.
‘저건 대체……?’
남궁황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인세의 광경이 아니다.
세상 어디에서 벼락과 꽃이 서로 격돌하는 모습을 보겠는가?
“……화산신룡?”
벌어져 있던 남궁황의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장일소의 무위가 대단한 건 딱히 놀랄 일도 아니다. 사파의 생리상, 강하지 않은 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
만인방이, 그리고 장일소가 조금만 약했더라면 이미 흑귀보든 하오문이든 다른 사파가 진즉에 만인방을 먹어 치웠을 것이다.
그 아귀들의 틈바구니에서 만인방을 만들어 내고, 신주오패로 키워 낸 이가 바로 장일소다.
그렇기에 패군이라 불리는 것이다.
만인방의 세력이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강했다면 누구도 장일소가 사파제일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화산신룡은 다르다.
‘저 아이가 어떻게 패군과?’
대등이라는 건 말도 안 된다.
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것을 부정할 도리는 없었다. 지금 청명은 분명 장일소와 대등하게 치고받고 있었다.
저 무수한 꽃들이 남궁황의 영혼을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저 검은 대체…….’
그가 어찌 알겠는가?
이 검이 백 년 만에 강호에 재현된 화산의 매화검결임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뇌전과 꽃이 서로 얽히며 거대한 폭음이 터졌다. 찢겨진 벼락과 짓이겨진 꽃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청명과 장일소가 동시에 뒤로 튕겨 나갔다.
“피, 피해라!”
“위험하다!”
무섭게 덮쳐 오는 기운의 파편에, 구파의 제자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직 둘의 격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몇몇은 똑똑히 보았다.
청명과 장일소. 뒤쪽으로 튕겨나간 그 둘이 허공을 땅처럼 걷어차며, 튕겨 나온 속도보다 더 빠르게 서로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말이다.
내리쳐진 청명의 검과 역타(逆打)로 휘두른 장일소의 손등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콰아아아앙!
가각! 가가가가각! 가각!
검과 손이 서로를 밀어 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 그리고 금방이라 부러질 듯 꺼걱대는 검.
그 가열한 충돌을 사이에 두고 장일소와 청명의 눈은 무기의 충돌보다도 더 격하게 맞부딪쳤다.
쾌감과 혐오. 본능과 이성.
무엇 하나로 정의할 수 없을 들끓는 시선이 상대를 향해 공격적으로 쏘아졌다.
두 사람의 몸이 서로 맞닿은 채 격하게 회전하며 아래로 추락했다.
“이놈이…….”
장일소가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흰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더 강해진다고?’
절벽 위에서 보여 준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단 건가?
가가가가각!
청명의 검이 장일소의 손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자하신공을 극성으로 전개한 청명의 내력이 몸 안에서 폭발적으로 휘돌고 있었다. 이 몸으로 다시 태어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감각.
으드드득.
청명의 이가 거칠게 맞물렸다. 피가 거꾸로 솟고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댔다.
“큭큭.”
그런 청명의 표정을 본 장일소의 입에서 억눌린 웃음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즐거워 보이는구나!”
콰아아아앙!
장일소가 청명을 일거에 밀어 냈다.
“하아아아압!”
그리고 허공을 박차며 밀려난 청명보다 더 빠르게 날아들어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탁!
그때 절벽에 발을 붙인 청명이 매화보를 시전하며 날아드는 장일소를 피해 거리를 벌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바로 그 자리에 장일소의 일 권이 틀어박히며 절벽이 안으로 움푹 파였다.
우르르르르르릉!
장일소의 권을 받아 낸 절벽은 지진이라도 맞닥뜨린 양 흔들렸다. 부서진 암석이 후드득 떨어져 나와 추락했다.
하지만 그 암석이 땅에 내리꽂히는 속도보다 청명과 장일소가 절벽을 타고 달리며 서로에게 권과 검을 날려 대는 것이 빨랐다.
수십 개의 검영이 비처럼 쏟아지고, 수백 개의 권영이 구름처럼 피어났다.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거대한 갈퀴로 마구 긁은 것 같은 상흔이 새겨졌다.
마치 거대한 토룡이 절벽을 타고 기어 다니는 듯한 광경.
서걱!
그때 청명의 검이 장일소의 어깨에 상처를 새겼다.
우드드득!
동시에 장일소의 권이 청명의 옆구리에 박혔다.
검도 권도 더욱 격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온 얼굴이 피에 젖은 청명이, 마찬가지로 붉게 젖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두 눈에서 살기를 뿜는 그의 얼굴에서 도인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장일소 역시 마찬가지.
그의 입꼬리도 한껏 올라가 있었다. 귀기 어린 얼굴이 흥분과 광적인 미소로 뒤범벅되었다.
콰앙!
단번에 내리꽂은 장일소의 권에 직격당한 청명이 절벽을 뚫고 안으로 박혀 들어갔다.
“청명아아아아아아악!”
그 광경을 본 백천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의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절벽을 터뜨리듯 부수며 뚫고 나온 청명이 일도양단의 기세로 장일소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콰아아앙!
장일소가 양손을 교차해 그 일격을 막아 냈지만, 그 순간 빛살처럼 움직인 청명의 발이 장일소의 턱을 그대로 후려갈겼다.
퍼억!
장일소의 몸이 포탄처럼 튕겨 나갔다. 절벽에 처박혔다가 다시 허공으로 튀어 오른 장일소의 두 눈에 중천에 떠오른 태양이 고스란히 담겼다.
“하……. 하핫!”
대체 얼마 만이던가.
타인의 힘으로 몸이 젖혀져 저 태양을 보는 것이.
장일소가 몸을 뒤집고 허공을 박찼다. 아니, 허공을 박차려 했다. 하지만 청명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배는 더 빠른 속도로 날아들어 단번에 들이받아 왔다.
콰앙.
분지 중앙으로 그를 날려 발판을 없애 버린 청명은 순간 커다랗게 포효했다.
“혜여어어어어어언!”
기다렸던 것처럼, 아래에서 황금빛의 권력이 솟구쳐 올랐다.
청명이 몸을 웅크리고 날아오른 권력을 밟으며 장일소에게 쇄도했다. 암향매화검의 검 끝이 하늘을 꿰뚫을 듯 솟구쳤다.
검 끝이 미세하게 떨리며 숱한 매화를 그려 냈다. 청명이 그려 낸 매화는 피어나기 무섭게 흐드러지더니 이내 수천 개의 꽃잎으로 화해 하늘을 휘돌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앗!”
그 모든 꽃잎이 일제히 장일소를 향해 쏟아졌다.
매화검결(梅花劍結). 매화하폭우(梅花下暴雨).
하늘에서 꽃의 비가 내린다. 모든 것을 휩쓸어 세상을 정화하는 폭우였다.
날아드는 꽃의 비를 본 장일소의 두 눈에서 광기가 치솟았다. 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여유가 완전히 사라졌다.
“건방진 새끼가!”
그의 장포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두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뇌전처럼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전신에서 시퍼런 불꽃이 솟구쳤다.
창염투살(蒼炎鬪殺). 단혼염강(斷魂炎剛).
뱀의 혀처럼 날름대는 푸른 불꽃이 장일소의 전신을 뒤덮으며 날아드는 매화검기를 막아 냈다.
매화검기 역시 장일소가 만들어 낸 푸른 강기를 쉴 새 없이 때렸다.
열 번으로 안 되면 백 번.
백 번으로 안 되면 천 번.
천 번으로도 부족하다면 만 번이라도 후려쳐 부순다.
모든 강은 한 방울에서 시작하는 법. 모이고 모인 물방울은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며, 끝끝내 대해를 이룬다.
쏟아진 비는 강이 되고 또 폭포가 되어 장일소를 짓눌렀다.
쿠우우우웅!
매화검기에 밀려 다시 절벽에 틀어박힌 장일소의 몸이 점점 더 암석을 파고들었다.
“끄……. 끄으으!”
장일소의 두 눈에 핏발이 서며 흰자위가 붉게 물들었다.
“이…… 이 애송이 새끼가……!”
“장일소오오오오오!”
마지막 한 점 남은 내력까지 모조리 때려 박은 청명이 한 줄기 유성이 되어 장일소를 향해 날아들었다.
“죽어라아아아아아앗!”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청명과 장일소가 절벽을 뚫고 안으로, 또 안으로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