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8화. 우리 애들은 조금 거칠거든. (3)
절벽 위에 붉은 매화가 피어올랐다.
백천의 검 끝에서 뿜어져 나간 경기가 절벽 위로 흐르는 바람을 타고 붉디붉은 꽃을 피워 냈다.
흐읍, 기합을 넣는 백천의 두 눈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토록 전력을 다해 매화를 그려 낸 적이 이전에 또 있었던가. 한없이 정교하고, 섬뜩할 정도로 선명한 이 매화에는 지금껏 백천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하나.
백천이 전력을 다해 피워낸 매화 위로 시퍼런 경기가 치솟았다. 너무도 짙어 심혼이 얼어붙어 버릴 듯한 푸른 경기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매화를 덮쳤다.
추운 겨울을 이겨 내고, 내리쬐는 뙤약볕을 버텨 내고, 불어오는 강풍을 참아 내어 마침내 피어난 매화도 덮쳐 오는 파도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참히 스러질 뿐이었다.
백천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콰아아아!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매화를 모조리 짓이겨 버린 푸른 경기가 마치 독사의 혀처럼 넘실대더니, 이내 백천을 향해 뻗쳐 왔다.
“큭!”
경기에 의지가 어려 있는 것만 같다. 그 기운에 도사린 진득한 악의(惡意)에 몸서리가 쳐졌다.
카가가각!
기운을 있는 대로 밀어 넣은 매화검이 날아드는 경기와 격돌했다.
“끄윽!”
백천의 입에서 채 누르지 못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손아귀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저 넘실대는 경기에 실린 힘의 크기는 백천의 예상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
‘버, 버티…….’
하지만 그때, 매화검을 뒤덮은 푸른 경기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요동치며 꿈틀대더니, 검을 통째로 감싸며 백천을 향해 쇄도했다.
‘뭣?’
단련된 육체는 머리보다 더 빨리 움직인다. 백천이 처박히듯 바닥을 굴렀다. 그의 바로 위로 푸른 경기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얼굴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기운이 살아 있는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운용이다. 내력이 실린 검과 맞부딪치면서 남는 여력을 공격으로 전환한다.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장일소는 백천만 상대하고 있는 게 아니잖은가?
그그극!
바닥에 검을 박아 넣은 백천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생각할 틈도 없이 바닥을 박차며 장일소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했다.
그의 검이 멈추면 저 기운들이 사형제들을 노릴 터.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알고 있다. 그는 방금 죽음을 넘었다.
몸을 굴리는 게 한순간만 늦었어도 그는 지금 피 범벅이 되어 식어 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두렵냐고?
‘웃기지 마.’
죽는 건 두려운 게 아니다. 진짜 두려운 건 살아남아 죽은 이들을 두 눈으로 보는 것이다.
‘내가 가장 먼저 죽는다!’
그게 화산의 백천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때 청명이 쏘아진 활처럼 장일소를 향해 날아드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청명아!”
파아아아앗!
솟구친 경기가 청명의 뒤덮는다. 하지만 그 순간 청명의 검이 수도 없는 매화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듯 선명했다.
하지만 그 선명함보다도 압도적으로 와 닿는 건 그 규모였다. 순식간에 구름처럼 피어난 매화의 숲에서 한 송이의 꽃을 좇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니까.
카가가가각!
불꽃처럼 치솟은 푸른 장력과 청명의 매화가 허공에서 얽혔다.
탓!
그 순간 청명이 살짝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리더니 제가 뿌린 매화검기와 장일소의 장력을 한꺼번에, 단숨에 내리그었다.
파아아아앗!
기운을 일도양단해 버린 그는 물 흐르는 듯 자연스레, 하지만 쾌속하게 앞으로 쇄도했다.
하나 장일소는 이미 청명이 그러리라 예상했다는 것처럼 그를 향해 마주 달려들고 있었다.
“하핫!”
장일소가 양팔을 쫙 펼치니 너른 소매가 흡사 붉은 날개처럼 펄럭였다.
파아아아앗!
빛살 같은 참격이 이어졌다.
붉은 기운을 품은 청명의 검이 날아드는 순간, 하늘하늘하던 장일소의 소매가 마치 칼처럼 날을 세웠다.
챙! 채앵! 챙!
허공에서 장일소의 소매와 청명의 검이 충돌했다. 소매와 검이 닿았건만 어이없게도 검끼리 부딪힌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법……!”
파아아앗!
장일소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획 뒤틀었다. 그의 얼굴 바로 옆으로 청명의 검이 가공할 기세로 스쳐 지나갔다.
쾌속하고(快) 강하게(剛) 뻗어진 검이 거짓말처럼 허공에서 멈춰서더니(靜), 부드럽게 빙글 방향을 틀어(柔) 장일소의 목을 노리고 들었다.
장일소의 허리가 뒤로 획 젖혀졌다. 그 코 바로 앞으로 청명의 검이 스쳐 지나간다. 아니, 스쳐 지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나 그 순간.
파아아아아앗!
또다시 멈춰선 청명의 검이 장일소를 내리그을 기세로 허공에서 방향을 틀었다.
장일소는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그의 몸이 바닥을 향해 가속했다.
콰앙!
그대로 땅을 손으로 내리친 장일소는 옆으로 몸을 틀어 청명의 검을 피하며 빠르게 허공에서 회전했다. 동시에 그의 발이 청명을 향해 수십 번의 발길질을 퍼부었다.
쾅! 쾅! 쾅! 쾅! 쾅!
청명이 빠르게 검을 들어 날아드는 연환퇴(連環腿)를 모조리 막아 냈다. 하지만 맞닿을 때마다 그의 몸은 한 치 씩 뒤로 밀려났다.
조걸과 윤종은 그가 만들어 준 틈을 놓치지 않았다.
“으랴아아아아아!”
섬전처럼 날아든 조걸이 아직 허공에 떠 있는 장일소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동시에 반대편에서 쇄도한 윤종이 깔끔한 매화를 그려 내어 장일소를 뒤덮었다.
“죽어어어엇!”
카가아아아앙!
장일소의 팔찌와 조걸의 검이 충돌했다. 조걸은 달려들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뒤로 튕겨 나갔다. 동시에 반대쪽에서 장일소를 뒤덮어 온 매화가 장일소가 뿜어 낸 푸른 불꽃과 뒤엉켰다.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윤종은 거세게 뒤로 한참을 밀려났다. 입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탁!
장일소가 바닥에 내려서는 바로 그 순간.
화악!
유령처럼 장일소의 등 뒤에서 나타난 유이설이 빛살처럼 검을 그었다.
“큭!”
장일소의 몸이 순간 격하게 옆으로 꺾였다.
파아앗!
유이설의 검이 젖혀진 장일소의 허리 위를 가르고 지나갔다. 하지만 유이설 역시 이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재빨리 회수한 검을 연이서 수십 번 내질렀다.
카가가가강! 카강!
찔러 들어오는 유이설의 검을 장일소의 손이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막아 냈다. 금속음이 마치 음악처럼 연이어 울렸다.
콰앙!
마지막 찌르기와 장일소의 뻗어 낸 손이 정면으로 충돌한 순간, 충격을 이기지 못한 유이설이 뒤로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
장일소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붉은 피가 맺혀 있었다.
물론 대단한 상처는 아니나, 그의 손이 베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유이설이 튕겨 나가는 그 찰나의 순간에 검을 비틀어 장일소의 손을 그어 버린 것이다.
실로 지독하기까지 한 집념이다.
제 살덩어리와 장일소의 피 한 방울을 교환하겠다는 각오가 없다면 절대 시도할 수 없는 일 검.
“……체면이 말이 아니로군.”
손뿐만이 아니다.
그의 옷 곳곳이 베여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카락 역시 헝클어졌다.
사람에게는 본디 그만의 미학이 있다.
그가 사패련주로서 저들을 농락해야 할 이곳에서 이런 몰골로 서게 되는 것은 그가 그렸던 아름다운 광경이 아니었다.
그그그극.
그때 날카로운 소리가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청명이 늘어뜨린 검으로 바닥을 긁어 대며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때?”
“…….”
“개에게 물어뜯기는 기분은?”
장일소가 입가를 뒤틀며 답했다.
“정파 놈이면서 합공을 하며 참 당당하기도 하지. 안 그런가?”
“기름 붓고 화약 쓰는 놈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아주 부끄러워 뒈지고 싶은 심정이네.”
“하핫.”
장일소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확실히 이들은 꽤 위험한 들개 떼다. 범도 때로는 늑대에게 물려 죽고, 재수 없으면 들개 떼에 물어뜯기기도 하는 법.
하지만…….
“개가 다섯 마리가 아니라 천 마리가 몰려들어도 나를 상대할 수는 없단다. 이유가 뭔지 아니?”
“…….”
“아주 쉬운 상대법이 있기 때문이지.”
그 순간 장일소의 두 눈에서 흉흉한 빛이 쏟아졌다.
파아아앗!
장일소가 가공할 속도로 청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장일소의 몸을 그저 하나의 붉은 선으로 보이게 만들 만큼 대단한 빠르기였다.
득달같이 달려든 장일소가 만면에 기괴한 웃음을 머금고는 단숨에 청명을 내리쳤다.
화아아아악!
장일소의 우수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불꽃이 넘실대며 청명을 덮쳤다. 청명이 지체 없이 몸을 뒤로 날렸지만, 장일소는 바닥을 내리치며 그 반동으로 더 빠르게 따라붙었다.
콰아아아앙!
뒤에선 뒤늦게 장일소가 내리쳤던 땅이 터져 나갔다. 그러나 이미 둘의 몸은 그곳을 한참이나 벗어난 뒤였다.
뒤로 몸을 날린 청명이 자신을 뒤쫓는 장일소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단숨에 발출된 수십 줄기의 검기가 장일소의 전신 요혈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검기들은 채 완전히 뻗어지기도 전에 장일소가 만들어 낸 수영들과 격돌했다.
카가가가강! 카가강!
뻗치는 검기들을 짓눌러 막아 버린 창일소는 이를 드러내며 손목을 비틀었다. 장일소의 목을 노리던 청명의 검이 팔찌를 긁고 옆으로 비껴 나갔다.
카강!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검을 튕겨 버린 장일소가 활짝 열린 청명의 가슴을 향해 단숨에 삼권을 날렸다.
전력을 다해 좌수로 매화산수(梅花散手)를 전개한 청명이 날아드는 장일소의 권을 빠르게 막아 냈다.
쾅!
일 권에 손목이 뒤틀린다.
콰앙!
이 권에 맞부딪히는 순간 좌수가 그 여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밀려 제 가슴을 스스로 가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삼 권!
콰아아앙!
가슴을 막아선 손에 장일소의 권이 작렬했다. 청명의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큭!”
한없이 뒤로 물러나던 청명이 순간 바닥을 박차며 방향을 전환해 되레 앞으로 달려들었다.
하나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앙!
청명의 몸이 땅을 굴러 옆으로 튕겨 나갔다. 장일소가 청명의 생각을 미리 알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뛰어드는 방향으로 이미 장력을 날려 놓은 것이다.
“알기 쉬워. 정말!”
장일소가 아직 자세를 잡지 못한 청명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어느새 뒤쫓아 온 유이설과 백천이 단숨에 뛰어올라 장일소의 등을 향해 매화를 흩뿌렸다.
하나 장일소는 돌아보기는커녕 등 뒤로 장력을 날리며 청명을 향해 돌진했다. 정교하지 못한 초식은 틈을 만들었고, 장력 사이를 파고든 매화검기가 그의 등에 틀어박혔다.
막으려 했다면 못 막을 이유가 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장일소는 뒤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지금 그의 눈에는 오직 청명밖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이.
콰아앙!
땅을 세게 박찬 장일소가 이제 겨우 몸을 일으키는 청명을 덮치며 우수를 휘둘렀다. 매의 발톱처럼 날카로운 조강(爪剛)을 뿜으며 청명의 검과 정면으로 격돌했다.
카가가가가가가!
암향매화검이 부러질 듯 휘어지고, 청명의 몸이 뒤쪽으로 쭈욱 밀려났다. 얼굴 바로 앞까지 뻗어진 강기의 손톱이 청명의 얼굴을 종횡으로 그어 댔다.
일그러진 청명의 얼굴에 순식간에 여러 갈래로 핏줄기가 생겨났다.
“하하하핫!”
장일소가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며 그대로 청명을 밀어붙였다.
“처, 청명아아아아아!”
힘에 밀린 청명의 몸이 절벽 밖으로 빠르게 밀려 나갔다. 그리고 장일소 역시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지 청명을 쫓아 절벽 밖으로 몸을 날렸다.
검과 손을 맞댄 두 사람이 절벽 밖으로 단숨에 추락하기 시작했다.
가가각! 가가가가가각!
“흐하하하하핫!”
서로 엉킨 채 아래로 추락하는 두 사람의 눈에선 광기와 적의가 용암처럼 들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