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817화 (814/1,567)

817화. 우리 애들은 조금 거칠거든. (2)

“흥분하지 마라!”

현종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흔치 않은 현종이지만, 지금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달리 가공할 힘이 실려 있었다.

“서두르지 마라! 적의에 이성을 빼앗기지 마라! 너희는 화산의 제자다! 사형제를 믿고 자리를 지켜라!”

“예!”

현종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의 눈이 절벽 반대편에 있는 청명들을 좇았다.

‘이놈들아……!’

패군 장일소.

그 어마어마한 이를 상대로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그동안 제자들이 대단한 적들을 상대해 왔다는 것이야 익히 알고 있지만, 지금처럼 모두가 함께 눈앞에서 격전을 벌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처음이다.

날카로운 칼로 뱃속을 긁어 대는 것 같다.

피가 마른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현종의 모든 정신도 지금 이곳이 아닌 저 절벽 건너편에 박혀 있다.

하지만…….

“운거어어엄!”

눈에 걸려든 움직임에 현종이 벼락같은 호통을 내질렀다.

그러자 앞으로 치고 나가려던 운검이 움찔하더니 멈춰 섰다.

“물러서라!”

“…….”

“도우려다 죽었다는 말이라도 할 셈이냐! 이놈!”

운검이 입술을 질끈 깨문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리를 지켰다. 장문인의 명을 거역한다는 건 그에게 애초에 없는 선택지였다.

어떤 심정인지 현종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운검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 역시 지금 당장에라도 앞을 가로막는 만인방도들을 모조리 베고 뚫어서 오검을 도우러 가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화산의 힘은 아직 만인방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이 이곳을 강제로 뚫으려 한다면 전멸을 각오해야 한다. 이들을 부여잡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화산의 제자들은 제가 가진 힘 이상을 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행스러우면서도 의아한 것은 만인방 역시 그리 적극적으로 공격해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긴 이게 당연할 수도 있겠지.’

이들은 급할 이유가 없다. 아래에서 올라오던 이들은 절대고수들의 격전에 가로막혔고, 장일소의 패배 따위는 상상도 하지 않을 테니까.

으득.

결국 이가 파고든 입술에서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렀다.

그도 외치고 싶다. 목숨을 걸고 이곳을 뚫어내고 저 아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하지만 이 역시 그래서는 안 된다.

그는 화산의 장문인. 저들을 위해서 다른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가 지켜야 할 이는 화산에서 가장 재능 있는 이가 아니라, 화산에서 가장 약한 이니까.

‘그러니!’

현종은 검을 꽉 움켜잡았다.

저들을 믿고 이 만인방도들이라도 붙들어 두는 것이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내가 이 결정을 평생 후회하게 만들지 말아다오. 제발.’

더없이 간절한, 하지만 전해질 수 없는 바람이었다.

* * *

콰르르릉!

절벽이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경기의 파편과 바윗덩어리들을 쳐 내며 무진이 쩌렁쩌렁 소리쳤다.

“우회해라! 머리 위를 조심해! 움직여, 당장!”

그의 얼굴이 점차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지금 위에서는 말 그대로 경천동지할 대결이 펼쳐지고 있다.

일 격, 일 격이 절벽을 무너뜨리고 하늘을 울린다. 아무리 무당의 제자들이라도 저 사이로 비집고 올라간다는 건 기름을 끼얹고 불로 뛰어드는 꼴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절벽에 매달려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소림과 무당, 남궁, 그리고 아래의 청성까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전을 피해 크게 우회하기 시작했다.

“달라붙어!”

“아아아아아아악!”

그 순간 위쪽에서 집채만 한 검기가 날아들었다.

무진이 두 눈을 획 부릅뜨고 제 쪽으로 오는 검기를 본 순간, 한 녹빛의 형체가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콰앙!

“장문인!”

벽현자였다.

그는 검기를 튕겨 내자마자 소리쳤다.

“장로들은 제자들을 보호하라! 절벽 위로 올라야 한다!”

“예!”

너나 할 것 없었다.

절벽 위에서 운신할 수 있는 자, 그중에서도 무위가 높은 이들은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기운의 파편들을 막아 내고, 굴러떨어지는 바위들을 쳐 낸다.

‘위로, 어떻게든 위로 오르기만 하면…….’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늘이 뒤집히는 굉음과 함께 절벽면의 한쪽이 충격에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왔다. 커다란 전각만 한 암석덩어리가 쿠르릉 하는 소음과 함께 아래로 천천히 흘러내리듯 낙하하기 시작했다.

“막아아아아아앗!”

어디선가 터져 나온 고함과 함께 한 사람이 위로 솟구쳤다.

“허광 장로님!”

희고 검은 검강이 동시에 한 검에 어렸다. 그가 그려 낸 것은 깔끔하고 유려한 원.

“하아아아아압!”

태극혜검의 절초가 낙하하는 암석을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소림장로들이 발출한 권력이 암석을 잘게 부수고 또 부수었다.

“펼쳐라!”

베어 내고, 또 후려친다. ‘재해’라 불러야 마땅한 수준의 습격이 연달아 이어졌지만, 단련된 인간의 단합은 그 재해마저도 극복해 냈다.

하나.

“사제에에에에!”

모두가 그 극복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힘이 떨어진 이들이 미끄러지고, 사람 머리통만 하게 부서진 바위에 얻어맞은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끄윽!”

무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올라라! 절벽 위로 오르기만 하면 된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올라가!”

“사형! 하지만 사제가……!”

“닥치고 오르라지 않느냐!”

“…….”

무진의 두 눈에선 피눈물이 흘렀다.

‘이 개 같은 사파 놈들.’

도가의 제자가 감히 품을 마음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는 이제껏 없었던 살심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죽여 버리겠다!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고함을 내지른 그는 다시 한번 이를 악물고 절벽을 기어올랐다.

뻗어진 날이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파아아아앗!

검이 목을 스쳐 지나간 뒤에야 소리가 따라왔다.

대단하다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조차 없는 쾌검. 하지만 이 검의 진가는 비단 속도만이 아니었다.

크게 검을 떨친 허도진인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저릿.

분명 피했음에도 목 언저리에 강한 통증이 일었다.

“……무형지기.”

두 눈으로는 쫓을 수 없는 무형의 기운이 검을 발출할 때마다 흘러나와 허도진인의 육신을 옭죄었다.

분명 들어 본 적이 있다.

자신이 어떻게 당하는지도 모르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검법. 마치 사람이 아닌 사신의 손에 당한 것처럼 죽게 된다는 사도(邪道)의 전설적인 검법의 이름을.

“……그게 귀왕십이류(鬼王十二流)인가?”

“흠. 알아보는군.”

만금대부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의 무당장문인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검법이지만, 나름 성명절기(聲名絶技)로 삼고 있지. 그리고 무엇보다…….”

파앗!

만금대부의 검이 허도진인을 꿰뚫을 듯 찔러 왔다. 허도진인이 급히 몸을 뒤틀자 그를 스쳐 지나간 검은 검기가 절벽을 꿰뚫고 한참이나 파고들었다.

“…….”

대체 어디까지 구멍이 뚫린 걸까?

“꽤 효율이 좋은 검법이라 애용 중이지. 나는 내력을 낭비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

허도진인의 두 눈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확실히 저 검은 상대하기 까다롭다.

“왜 그러지?”

“…….”

“나는 시간을 끌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너는 다르지 않나? 시간을 끌수록 귀여운 제자들이 더 상할 텐데. 그래도 괜찮다는 건가?”

허도진인이 입술을 깨문다.

패배?

그런 게 머리에 있을 리 없다. 그는 무당의 장문인이다. 혀를 빼물고 죽을지언정 사파의 악적에게 죽는 일은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의 시선이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이를 악문 구파와 오대세가의 제자들이 안간힘을 쓰며 절벽을 오르고 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바위가 굴러떨어지고, 장력이 날아들 때마다 모두가 온 힘을 다해 그걸 막아 낸다.

저토록 위태롭게 절벽에 매달린 채로.

“…….”

제자들의 얼굴은 차마 눈 뜨고 봐 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기름을 뒤집어쓰고,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고, 소모된 내력에 신음한다. 저 아래 잘 보이지도 않는 절벽 아래에는 추락한 제자들이 고통에 꿈틀거리고 있다.

‘대체 언제부터 이리되어 버렸단 말인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절벽을 올랐다. 그래, 그 순간에 허도진인의 눈에 보였던 길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살아날 길은 오직 이것뿐이라 여겼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살아남는다고?’

상대는 절벽 위에 전력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기껏해야 기름 솥이나 날랐을 뿐이고, 화살이나 쏘아 댔을 뿐이다.

만인방, 하오문, 흑귀보. 그리고 분명 지금쯤 하선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을 수적들까지.

반면에 구파의 제자들은 절벽 위까지 어찌어찌 오른다 해도 이미 악전고투를 치른 탓에 모든 기력을 소진한 채로 사패련의 악적들과 싸워야 한다.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인가?’

이 협곡으로 들어올 때만 해도 이런 그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체 그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생때같은 목숨들을 이리 허망하게 잃어야 한다는 말인가?

대체 무엇을 위해?

“생각이 많군.”

“…….”

허도진인이 검을 부러져라 움켜잡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선 남궁황과 흑룡왕이 치열하게 맞붙고 있다. 쉴 새 없이 막대한 도기를 뿌려 대는 흑룡왕도 대단하지만, 그런 흑룡왕에게 한 치도 밀리지 않는 남궁황 역시 대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나.

콰르르르르릉!

“아아아악!”

그들이 검과 도를 마구 휘둘러 댈 때마다 절벽이 부서지고, 도기와 검기가 난무한다.

“이…….”

그리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는 것은, 선두에 있는 무당과 소림의 제자들이었다.

알고 있다.

저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래에 있는 이들을 위한답시고, 힘을 아꼈다가 패하기라도 한다면 저 흑룡왕이 단숨에 절벽에 매달린 이들을 덮칠 것이다.

그럼 모든 게 끝이다.

하지만 알고 있음에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선두에서 기어오르는 이들이 무당이 아니라 남궁이었어도 같은 일을 벌이고 있을지 하는 의문이 마음 한구석에 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지금 허도진인의 마음이 그만큼 초조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법계 역시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림의 장로라는 이름이 타 문의 장문인에 미치지 못할 이유는 없으나, 저 천면수사 역시 그에 밀릴 이유가 없다. 아니, 사파제일수(邪派第一手)를 상대하기에는 법계의 어깨가 너무 무겁다.

……그러면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으드드득.

허도진인이 이를 갈아붙인다. 그의 두 눈에 가는 핏발이 잔뜩 섰다.

‘장일소.’

그의 머리에 떠오른 이름은 단 하나뿐이었다.

우우우우웅.

순간 허도진인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결심을 굳힌 듯 그의 검에서 희고 검은 검기가 물처럼 흘러나온다.

마치 두꺼운 붓으로 화폭 위에 그어 낸 선과 같은 검기들이 허도진인의 송문고검(松紋古劍)을 휘감고 돌며 와류를 일으켰다.

“음?”

달라진 그의 기세에 만금대부의 눈이 가늘어졌다.

허도진인의 머리 위에 얹혀 있던 도관이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뜯겨 나갔다. 산발이 된 머리가 거꾸로 솟구치는 모양새는 악귀가 다름없었다.

“흐음……. 이거, 잘못하면 손해를 볼 수도 있겠는걸.”

만금대부는 영 못마땅한 얼굴로 검을 들어 올렸다.

고오오오오오!

그 순간 허도진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희고 검은 두 기운이 허공에서 서로 휘감아 돌며 거대한 원의 형태를 이루었다.

‘태극?’

만금대부의 얼굴이 일순 긴장으로 희게 굳어졌다.

태극혜검(太極慧劍).

무당 최고의 검이라 불리는 그 태극혜검이 마침내 허도진인의 손에서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흐음!”

만금대부가 천천히 검을 고쳐 잡았다.

“……이건 확실히 손해로군.”

그의 검에서도 새파란 검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어디, 무당의 혜검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견식해 보실까?”

만금대부의 두 눈에 냉혹한 기운이 어렸다.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