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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15화 (812/1,567)

815화. 모가지 딱 대라, 이 새끼야! (5)

까각! 가가가각!

내력이 잔뜩 실린 검과 장일소의 반지가 마찰하며 소름 돋는 울려 퍼졌다.

청명이 잔뜩 일그러진 눈으로 죽일 듯 노려보자 장일소는 비웃음으로 화답했다.

“안타까워라.”

“…….”

콰득.

장일소가 청명의 암매검을 움켜잡고는 그대로 휘둘러 던졌다. 허공에서 빙글 돌아 자세를 잡은 청명이 절벽 위로 내려섰다.

“흐으으음.”

장일소는 암매검을 잡았던 손을 가벼이 털며 느른하게 청명을 내려다보았다.

“알고 있니?”

“……뭘?”

“제 역할이 끝났는데도 무대에서 내려가지 않는 배우처럼 추한 것은 없다는 걸.”

장일소가 붉은 입꼬리를 뒤틀었다.

“네 역할은 이미 끝났을 텐데. 왜 아직도 추하게 이곳에 남아 있을까?”

“역할?”

청명이 장일소를 보며 마주 웃었다. 둘의 웃음은 다른 듯 묘하게 닮아 있었다. 무엇보다 상대를 경시하고 내려다보는 그 눈빛이.

“아아, 잘 알고 있어. 내 역할이 뭔지. 네 목을 잘라 개먹이로 던져 주는 게 내 역할이지.”

“이런, 이런.”

장일소가 못 말리겠단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나쁜 배우로군. 아주 나쁜 배우야. 자기 역할이 무엇인지도 모르다니. 그런 배우는 스스로를 망칠 뿐 아니라 무대마저 망쳐 버린단다.”

장일소가 천천히 한 발을 내디뎠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런 배우는 강제로라도 무대에서 끌어내려야 하는 법이지.”

“아아. 그러셔?”

청명이 검을 한차례 돌려 다시 잡고는 이를 드러냈다. 웃는 듯, 으르렁 대는 듯한 표정이 섬뜩했다. 그는 천천히 씹어뱉었다.

“나도 참 성격이 많이 좋아졌네.”

“…….”

“너 같은 조무래기 새끼가 주둥이 터는 걸 이렇게 지켜봐 주고 있으니 말이야. 옛날 같았으면 아가리를 벌리기도 전에 목구멍에 검을 쑤셔 박아 버렸을 텐데.”

“하하하하하하하핫!”

장일소가 커다랗게 광소를 터뜨렸다.

사실 이는 괴이한 광경이었다.

그들이 선 절벽 아래에서는 경천동지할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는 정파를 대표하는 문파의 문도들이 떨어지는 기름과 낙석을 피해 절벽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강호의 운명이 뒤틀리고 있는 광경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그런 모든 것들이 자신들과 상관없다는 듯 느긋하게 환담을 나누고 있다. 이 세상에 오로지 서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말이다.

“좋지. 정말 좋아. 알고 있니, 화산신룡? 아니, 화산의 청명. 나는 네가 정말이지 마음에 들어.”

“…….”

“그래서 너무 아쉽단다. 정말이지, 너무도. 내가 좋아하는 이들은 나를 딱히 좋아하지 않더군. 너도 당연히 그렇겠지?”

“두말하면 입 아프지.”

“그래, 그렇겠지. 안타깝게도 말이야. 그러니…… 그러니 별수 없잖니.”

장일소가 제 희고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청명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광기에 찬 눈빛은 굳이 보지 않고도 지금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를 짐작하게 했다.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손바닥 아래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어쩔 수 없이 그 목을 쥐어뜯어 죽여 버릴 수밖에.”

그 말에 청명이 피식 웃었다.

“마지막만은 동감이네. 그것 빼고는 모두 반대지만. 나는 네가 끔찍하게 싫거든.”

청명이 검을 곧게 뻗어 장일소를 겨누었다.

“그러니 이참에 죽여 없애 주지, 이 망할 새끼야.”

“흐음.”

장일소가 손을 내렸다. 어느새 말끔하게 빙그레 웃는 얼굴로 돌아간 그는 다소 과장되게 고개를 갸웃했다.

“참 이상해. 너는 굉장히 똑똑한 아이지. 과도하게, 때로는 소름 돋을 정도로 똑똑해. 그런 녀석이 혼자 나를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까가가각!

장일소의 손에 빽빽하게 끼워진 반지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마찰했다.

“그런데도 굳이 죽음을 자초하려는 이유는 뭐지?”

“병신 같은 소리 지껄이고 있네.”

청명이 피식 웃으며 날카로운 눈으로 장일소를 훑었다.

“그 답은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청명의 차가운 눈빛과 장일소의 부드러운 눈빛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그래, 그렇지. 알지. 알다마다.”

장일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멍청한 질문을 했구나. 내가 어리석었어. 본디 위로 오른다는 건 그렇지. 이길 수 있는 상대를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끌어내려야 의미가 있지. 발목을 물어뜯고, 독을 바른 비수를 박아 넣고, 기름을 끼얹어서라도.”

그의 입에서 섬뜩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게 위로 오르는 법이지. 다른 방법 따위는 없어.”

“잘 아는군.”

청명은 웃으면서 생각했다.

이래서 장일소가 끔찍하게 싫다고.

너무 말이 잘 통해서, 그리고 동시에 너무도 말이 안 통해서. 그 두 가지가 공존하는 이를 좋아할 수 있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일 것이다.

“내가 너의 산이 되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서 오렴. 즐겨 보자꾸나.”

“먼저.”

“응?”

청명이 손가락 두 개를 내밀었다.

“두 가지를 정정하지.”

“…….”

“첫째. 산이니 어쩌니 건방진 소리 지껄이지 마라. 너 따위 조무래기가 내 앞을 막을 산이 될 수 있을 리 없지.”

“하하하, 하핫. 그래. 그래!”

“그리고 둘째.”

청명이 입가를 비틀었다.

“누가 혼자라고?”

“…….”

그 순간 절벽 아래에서 네 사람이 동시에 솟구쳤다.

탁!

청명의 옆으로 내려선 백천과 유이설, 윤종과 조걸이 지체 없이 자세를 잡고 장일소를 향해 살기를 뿜었다.

우득. 우득.

청명이 목을 좌우로 꺾어 댔다.

“너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싸움은 내 싸움이었어. 이들과는 관련 없지.”

“…….”

“하지만 상대가 너라면 이야기가 달라. 내가 혼자 너를 처먹으려 들면 이 새끼들이 내 등을 물어뜯으려고 할걸?”

“절대 안 되지.”

“죽인다.”

“……그 팔 받아 가마.”

“갈아 마셔 버리겠어!”

저를 향해 이를 드러내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장일소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범 새끼쯤은 되는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개새끼에 불과했군. 개끼리 무리를 지으니 용기라도 샘솟는 모양이지?”

신랄한 비웃음이 청명의 두 눈에 틀어박혔다.

“개 따위는 아무리 모여 봐야 개란다. 발악을 해 봐야 늑대쯤도 못 될 텐데.”

노골적인 조롱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청명은 화를 내기는커녕 되레 웃어 버렸다.

“그것도 나쁘지 않아.”

“음?”

의외의 반응에 장일소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청명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네게 어울리는 죽음이 개에게 물려 죽는 것 말고 또 있을까.”

“…….”

옆에서 듣고 있던 조걸이 낄낄대며 거들었다.

“말 그대로 개죽음이네.”

“그것조차 사치지.”

“목은 내가 자른다.”

패군을 앞에다 두고 잘도 지껄여 대는 오검의 모습에, 장일소의 얼굴엔 묘한 표정이 스쳤다.

‘괴이한 놈들이로군.’

장일소가 가지는 존재감은 비단 그의 강함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제아무리 대단하게 명성을 날리고 있는 이들이라 해도 그를 앞에서 대면하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장일소를 앞에 두고 그의 적의를 온몸으로 받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허세?

아니, 허세라 해도 대단한 건 마찬가지다.

범의 아가리 안에 머리를 밀어 넣는 허세는 아무나 부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확실히 독특한 문파야. 화산…….”

장일소가 슬쩍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시간은 끌 만큼 끌었다.

“그럼 어디 내 목을 베어 보렴. 입으로만 지껄이지 말고.”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어!”

청명이 진각을 내밟았다.

“사숙! 사고!”

“오냐!”

“조심해. 단숨에 죽는다!”

“그래!”

“사형들!”

“어!”

“틈이 보인다고 함부로 뛰어들지 마! 저건 머리가 열 개 달린 뱀이다. 틈이 보인다고 섣불리 뛰어들면 독니에 물려!”

“알았다!”

청명은 주교를 상대할 때도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건 다시 말하자면, 청명이 지금 장일소를 그 주교 이상으로 평가한다는 의미.

당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강해진 그들을 이끌어도 장담할 수 없는 승부라는 뜻이다.

오검의 전신이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패군 장일소. 그 드높은 이름이 지금 그들의 앞에 있다. 까마득한 위가 아니라 검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간다! 물어 죽여!”

쾅!

오검이 동시에 바닥을 박찼다. 화산의 광견들이 눈앞에 있는 범을 향해 달려들었다.

상식을 뛰어넘는, 집채만 한 범보다도 괴물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더욱 적절해 보이는 맹수를 향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두로 치고 나간 청명의 검이 장일소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들었다.

섬전(閃電). 그 어떤 기교도 없는 검. 그렇기에 그 어떤 검보다도 빠르고 쾌속한 일 검.

가공할 속도로 날아든 검이 장일소의 목을 물어뜯으려 들었다.

카캉!

단숨에 우수를 휘둘러 날아드는 검을 쳐 낸 장일소가 환하게 웃으며 청명의 머리를 후려쳤다. 하지만 청명은 막거나 물러서기는커녕 장일소의 품을 향해 더 과감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청명의 머리와 장일소의 손 사이로 두 개의 검이 비집고 들어왔다.

콰아앙!

백천과 유이설의 검이 청명의 머리를 노리는 장일소의 손을 막아 낸 것이다.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다는 듯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장일소의 품 안으로 뛰어든 청명이, 이번엔 그의 가슴께를 향해 단번에 십이검을 발출했다.

파아아아아앗!

검기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흠?”

장일소가 짧게 탄성을 흘리며 뒤로 살짝 몸을 띄워 냈다.

카가가가가각!

눈 깜짝할 새, 장일소의 손과 청명의 검이 허공에서 수십 번 맞부딪쳤다. 백천과 유이설조차 그 모든 공방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할 정도였다. 뭔가 희끗한 것이 오간다는 것만 이해할 수 있었을 뿐이다.

파앗!

파아아앗!

장일소의 어깨 옷자락이 잘려 나감과 동시에 청명의 옆구리에서 한 움큼 살이 뜯겼다.

하나 그 순간, 단숨에 청명의 뒤로 따라붙은 윤종과 조걸이 청명의 양팔 아래로 검을 내질렀다.

쾌속한 조걸의 검이 수십 개의 검기를 발출했고, 절도 있는 윤종의 검이 청명을 향해 날아드는 장일소의 수영과 맞닥뜨렸다.

파아앗!

백천과 유이설도 보고만 있지 않았다.

서로 눈빛조차 교환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동시에 한 몸처럼 움직였다.

백천이 자세를 있는 대로 낮춰 바닥을 기듯 아래로 쇄도함과 동시에 유이설이 청명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단숨에 장일소를 향해 날쌔게 날아들었다.

아래와 위.

붉게 피어오른 매화가 마치 핏방울처럼 번지며 장일소의 전신을 휩쓸어 갔다.

장일소의 눈빛이 일변했다.

“하찮은!”

그의 양손에 짙은 진청색의 경기가 어리더니, 이내 불꽃처럼 솟구쳐 올랐다.

파아아아앗!

날아든 매화검기가 장일소의 장력에 부딪히며 단숨에 부서져 나갔다. 장일소의 눈이 허공으로 뛰어오른 유이설을 매처럼 쫓았다.

장일소의 손이 막 휘둘러지려는 순간, 바닥을 박찬 청명이 뛰어들며 무릎으로 장일소의 머리 쪽을 차올렸다.

콰앙!

빠르게 가로막은 장일소의 팔목과 청명의 무릎이 충돌했다. 장일소는 빠르게 손목을 뒤틀며 청명을 향해 열 개의 장력을 쑤셔박았다.

쾅! 콰앙! 콰아아아앙! 콰앙!

장일소의 장력과 청명의 검이 연신 충돌했다.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청명의 몸이 뒤로 또 뒤로, 속절없이 밀려났다.

그 순간 조걸과 윤종이 청명의 등을 잡고 바닥에 발을 박았다.

콰아아앙!

그그그극!

바닥에 박힌 청명의 검이 뒤로 질질 끌리며 지렁이 같은 상흔을 지면에 남겼다. 하지만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버텨 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 순간 유이설이 청명의 앞으로 착지하며 독 오른 살쾡이처럼 장일소에게 매서운 살기를 드러냈고, 동시에 백천이 그 바로 뒤로 몸을 날려 청명을 보호하며 장일소에게 검을 겨누었다.

“……하.”

장일소는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주륵.

그의 흰 뺨에서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검지를 들어 제 얼굴에 흐른 피를 닦아 낸 장일소가 그 피를 제 입술 위에 천천히 덧그리듯 발랐다.

“아주…….”

피처럼 붉은, 아니. 말 그대로 피로 물든 장일소의 입술이 벌어지며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아주 제법이야, 화산.”

그 순간 태산 같은 중압감이 오검의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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