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2화. 모가지 딱 대라, 이 새끼야! (2)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사람보다 더 큰 수십 개의 솥에서 끓는 기름이 한꺼번에 쏟아지니 순간적으로 폭포가 쏟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는 것은 차가운 폭포수가 아니라 닿으면 살을 녹이고, 눈을 멀게 하는 고열의 기름이다.
허도진인의 입에서 거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막아라! 제자들을 보호해!”
너나 할 것 없었다.
허도진인을 필두로 절벽을 오르는 제자들과 발을 맞추던 무당의 장로들이 단숨에 절벽 위로 차고 올라간다. 그보다 한 발 더 먼저 소림의 장로들도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저 기름이 그대로 제자들에게 떨어진다면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한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오오오오오오!”
먼저 날아든 건 소림의 권력이었다.
황금빛이 절벽 위를 질주했다. 단번에 쏟아져 나온 수십 줄기의 권력이 날아드는 기름을 밀어 내었다.
파아아아앗!
뭉쳐 떨어지던 기름 덩어리들이 권강에 맞아 폭발하듯 사방으로 튀었다.
“큭!”
파훼할 수 있다.
가를 수도 있다.
하지만 완전히 막아 내는 게 불가능한 것이 물이고 기름이다.
사방으로 튄 기름은 이제 잘게 방울져서 다시 아래로 비처럼 쏟아졌다.
“멈추지 마라! 부숴! 바깥쪽으로 튕겨 내라!”
법계가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쳤다.
목을 넘어 머리까지 바짝 선 핏대가 그의 다급함을 똑똑히 보여 주고 있었다. 황금빛 권력이 다시 연이어 발출되었다.
분명히 굉장한 광경이었지만, 아무리 대단한 권력이라 해도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모두 막을 수는 없다.
법계와 소림의 장로들을 스쳐 아래로 떨어지는 기름방울을 막아선 이들은 다름 아닌 무당의 장로들이었다.
“펼쳐라!”
허도진인의 외침과 함께 장로들의 검이 수십, 수백 번 허공을 찔러 댔다. 삽시간에 십여 개의 검영이 생겨나고, 그 위로 또다시 백여 개의 검영이 생겨났다.
검과 검의 그림자가 촘촘히 맞닿아 점점 더 불어났다.
검막(劍膜).
무당의 장로들이 펼쳐 낸 검막이 커다란 지붕처럼 소림과 무당의 제자들을 뒤덮었다.
타다다다다다닥!
굵은 장대비가 천막을 때리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기름방울이 검막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내리는 비를 사람이 막아 내는 것과 같은 광경. 소림과 무당, 두 문파가 얼마나 지고한 경지에 올라 있는지를 증명하는 광경이기도 했다.
“호오.”
장일소가 재미있다는 듯 두 눈을 빛냈다.
“명불허전. 그래도 소림, 그래도 무당이라는 건가?”
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까?”
장일소가 손가락을 다시 튀겼다. 그러자 비어 버린 솥들이 뒤쪽으로 빠지고 새로운 솥이 날라져 왔다.
“부어라.”
사람보다 더 커 보이는 솥들이 다시 단번에 기울어지며 새로운 기름이 콸콸 쏟아지기 시작한다.
허도진인의 두 눈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몇 번이나……?’
차라리 한꺼번에 부으면 단숨에 해결해 버릴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연이어 기름이 쏟아지게 된다면 내력의 소모를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아무리 소림의 장로라 해도 저만한 권력을 계속해서 발출할 수는 없고, 아무리 무당의 장로라고 해도 이 정도 검막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다.
내력이 순식간에 깎여 나가는 느낌에 허도진인이 이를 악물었다.
‘이게 대체 뭐란 말이냐?’
만인방이나 절벽 위를 점거한 이들과 손 한 번 섞어 보지 못했다.
무인이 아닌가!
무공을 익힌 강호인이 아닌가!
그런데 강호인 간의 전쟁에서 폭약을 사용해 절벽을 터뜨리고, 절벽을 오르는 이들에게 끓는 기름을 부어 댄다고?
이건 그들이 생각한 전쟁과 너무도 달랐다.
“다시 부어라!”
장일소의 지시에 따라 솥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촤아아아아아악!
부어진 기름이 끊임없이 검막에 맞아 튀었다. 그리고 부는 바람을 타고 날려 절벽을 기어오르는 무당 제자들의 등에 파고들었다.
“아아아아악!”
“무보! 괜찮으냐?”
“끄으윽……. 드, 등이…….”
기름에 맞은 등에서 새하얀 증기가 피어올랐다. 살이 익는 고약한 냄새가 코를 파고들었다. 보는 이들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하지만 절벽에 매달린 채로는 간단한 응급조치조차 불가능했다.
“이익!”
악에 받친 무당의 제자들이 기를 쓰고 절벽을 올랐다. 시간을 끌어 봐야 손해만 누적될 뿐이다.
하지만 그때였다.
“쯧쯧쯧. 이리도 성급해서야.”
장일소가 과장되게 딱하단 표정으로 혀를 차더니 이내 웃었다. 흰 손이 흔들리며 또 무언가를 지시했다.
“사람은 겁에 질리면 뻔히 보던 것도 못 보는 법이지. 경험이란 이래서 중요하다니까.”
그 순간이었다.
기이이잉.
귓가를 파고드는 섬뜩한 소리에 허도진인이 화들짝 놀라 아래를 바라보았다.
‘무슨?’
그 순간 허도진인은 보았다.
“아, 안 돼!”
흑룡채는 떨어지는 낙석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많은 수적들이 모두 죽은 것은 아니다.
살아남은 흑룡채의 잔당들이 아래에서 절벽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다.
패애애앵!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놓음과 동시에 거무튀튀한 화살들이 일제히 솟아올라 절벽으로 날아든다.
“화살이 온다!”
“막아!”
무당의 제자들이 다급하게 검을 휘둘러 쳐 내고, 소림의 무승들이 경력을 발출해 밀어 냈다.
하지만 절벽에 달라붙은 채로 그 화살들을 모두 막아 낼 순 없었다.
푸욱! 푸욱! 푸욱!
“끄으윽!”
등에 화살을 맞은 소림의 무승 하나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각소!”
곁에 있던 이들이 황급히 손을 뻗어 떨어지는 이를 낚아챘다. 하지만 그 바람에 팔에 화살이 꽂히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콰득!
“큭!”
화살이 뼈까지 틀어박힌 팔로 동료를 부여잡은 무승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청성은……!”
허도진인이 이를 악물었다.
그들이 먼저 절벽을 올라왔다면 뒷 문파는 아래에서 남은 잔당을 정리했어야 한다. 그게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어찌 그걸 강요할 수 있겠는가? 저 절벽 아래가 사지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 아래에서 흑룡채를 처단하다가 절벽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파묻히게 된다.
그러니 청성 역시 절벽을 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죽을 위험을 감수한다는 건 결코 말처럼 쉽지 않다.
협의가 추앙받는 이유는 시행하는 이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행하는 이를 훌륭하다 칭찬할 일이지, 지키지 않았다고 욕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장일소!’
그리고 사실 저 많은 활과 화살이 어디서 왔겠는가?
애초부터 장일소의 머릿속에는 이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설상가상으로 검막이 다 막아 내지 못한 기름이 절벽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절벽을 타고 흐르는 동안 식어 버려 손이 타는 일은 없었지만, 안 그래도 가파르기 짝이 없는 절벽이 빙판처럼 미끄러워지는 것이 문제였다.
그 와중에도 등 뒤에서는 매서운 경기를 실은 화살이 끊임없이 묵직하게 날아들었다.
그걸 막아 내면서 절벽을 무너뜨리지 못하게 화약까지 제거해야 하는 상황.
지옥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바로 이곳이 지옥이었다.
절벽을 무너뜨리는 화약.
머리 위에서 끼얹어지는 끓는 기름.
아래에서 날아드는 화살.
그 하나하나는 대단치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가장 적절한 상황에서 가장 적절하게 사용되니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지옥 같은 덫이 되었다.
“장일소오오오오오오!”
허도진인의 입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이런이런.”
장일소가 깔깔 눈물까지 훔치며 웃더니 허도진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세상에, 무당의 장문이라는 분이 저리 경박해서야! 무릇 문파의 수장이란 무게가 있어야 하는 법이거늘.”
“그것도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나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욕이 쉬지 않고 튀어나올 테니까.”
천면수사가 감탄하며 혀를 내둘렀다.
병법이란 본디 자리가 반이다.
얼마나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그 위치에서 얼마나 적절한 전략을 쓸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상식을 바꾸고 역사에 남을 책략 따위는 작은 전쟁에서나 쓰인다. 진짜 전쟁이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완벽하게 이행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교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천하의 누가 화살과 기름, 화약으로 소림과 무당을 농락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는가?
그리고 그 가공할 계략 속에서는 천면수사도 만금대부도 흑룡왕마저도 하나의 장기 말에 불과했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장일소, 패군이 제 손안에 천하를 움켜쥐고 제멋대로 뒤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게 신기할 노릇이군.’
사파란 타인에게 휘둘리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족속들이다. 만금대부도 흑룡왕도 자신들이 장일소가 짜 놓은 계책에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분명 알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어떠한 적의나 불쾌감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사패련은 정말 말뿐인 곳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겠군.’
지금 이 순간 장일소는 사패련의 련주 자격을 모두에게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일소의 손바닥 위를 벗어난 이는 오직 한 명.
“아니! 이 땡중 새끼야!”
카가가가각!
단숨에 세 줄기의 도화선을 잘라 버린 청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밑에 빨리 처리 안 해! 너도 소림에 원한 있냐?”
“아미타불!”
그 말에 호응하듯 터져 나온 권력이 활을 쏘아 대던 흑룡채의 수적들을 단숨에 덮쳤다. 수적들이 가랑잎처럼 날렸다.
“혜연!”
법계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제 삶을 도모하기 위해서 절벽을 타고 오르는 중에 꿋꿋하게 아래에 서 있는 이가 있다.
법계의 일그러진 두 눈이 혜연을 똑똑히 담았다. 제자의 온화한 표정이 눈에 박혔다.
“아미타불. 오르십시오, 장로님. 아래는 제가 맡…….”
“아, 지껄일 시간 있으면 싸우라고, 이 새끼야!”
“아오! 저 씨……. 아, 아미타불! 아미타불!”
순간 확 인상을 찌푸렸던 혜연이 화들짝 놀라 연신 불호를 외었다. 그리고 절대 과격한 말 따윈 한 적 없는 것처럼 수적들에게 달려들었다.
활을 들고 있어 제대로 싸울 수 없는 수적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갔다.
‘됐어!’
허도진인의 두 눈에 빛이 돌아왔다.
물론 아래의 수적들은 너무도 많으니 한 사람이 단숨에 정리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선을 끌어 주는 것만으로도 효과는 있다. 절벽으로 날아드는 화살의 기세가 확연히 줄어들지 않았는가!
‘조금만…….’
“아오! 답답해 뒈지겠네! 뭘 구경하냐고!”
그 순간 절벽에 달라붙은 청명이 매섭게 고함쳤다.
“제자들 두고 일단 뛰어 오르라고! 소림이고, 무당이고, 남궁이고! 하여튼 이 밥버러지 같은 새끼들아!”
“이 빌어먹을 놈 같으니!”
그 말에 가장 먼저 호응한 이는 다름 아닌 남궁황이었다.
“오냐! 간다!”
그가 단숨에 절벽을 딛고 솟구쳐 올랐다. 무당의 제자들을 타고 넘은 남궁황은 단숨에 허도진인의 곁을 박차고 절벽 위로 승천하는 용처럼 솟아올랐다.
“큭!”
허도진인이 이를 악물었다.
청명의 말이 맞다. 이곳에서 막고만 있으면 힘을 빼다가 죽을 뿐이다.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저 절벽 위를 점거해야 한다.
“따를 수 있는 이들은 나를 따라라! 간다!”
“예!”
장로들 중 몇몇이 검막을 회수하고 허도진인의 뒤로 붙었다.
“오오오오오!”
허도진인이 그답지 않은 기합을 넣고 절벽을 박찼다. 위로 또 위로 솟구쳐 올랐다.
“진즉에 그랬어야지, 머저리 새끼들!”
파앗!
청명이 절벽을 내달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사패련, 그리고 장일소가 있는 곳.
“모가지 딱 대라, 이 새끼야!”
청명의 우렁찬 목소리가 절벽을 넘어 하늘까지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