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화. 모가지 딱 대라, 이 새끼야! (1)
절벽을 평지처럼 달리던 청명이 문득 절벽 위쪽으로 획 시선을 올렸다.
위를 점거하고 있던 만인방도들이 그를 저지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경기를 줄줄이 쏟아 내는 무인들이 확연한 적의를 담고 비처럼 쏟아졌다.
“죽어라아앗!”
십여 명의 만인방도들이 그 몸뚱아리를 청명에게 날리며 병기를 휘둘러 온다. 스스로의 목숨을 돌보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청명을 베어 죽이거나 이 절벽에서 추락사시키겠다는 의지뿐!
“흥!”
짧게 코웃음을 친 청명이 무섭게 이를 드러냈다.
파아아아앗!
그의 검이 빛살처럼 허공을 갈랐다. 순식간에 십여 개의 검기가 뿜어져 나가며 절벽을 내려오는 만인방도들을 갈랐다.
검이란 상황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
제가 이기지 못할 속도로 추락하는 이들에게는 복잡한 변화도, 환상 같은 눈속임도 필요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오직 속도! 피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뿐이다.
서걱! 서걱!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만인방도들의 몸에 붉은 검기가 꽂혔다.
“끄윽!”
하지만 그대로 손 놓고 당할 만인방이 아니었다.
검에 꿰뚫려 피를 쏟으면서도 그들의 두 눈은 오로지 청명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두 눈에 어린 독기.
활짝 편 양팔.
만인방도들이 절벽 면을 박차며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청명아아아아!”
절벽 위에서 싸우다 그 광경을 내려다본 백천이 순간 비명처럼 외쳤다.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청명을 부여잡고 함께 추락하겠다는 의도가 적들의 움직임에서 명백하게 느껴졌다.
이곳이 절벽의 벽면이 아니었다면 깔끔하게 거리를 벌리고 피해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아무리 청명이라 해도 이런 지형에서 저 공격을 피해 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아, 안……!”
청명이 뛰어 내려간 게 어쩌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막 백천이 하는 찰나.
파앗!
청명이 달려드는 만인방도들을 피해 절벽 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뭐?”
백천과 조걸의 입에서 동시에 헛바람이 튀어나왔다.
청명의 몸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솟구쳤다.
“미친!”
“야, 이 새끼야아아아!”
화산의 제자들이 두 눈을 부릅뜬다. 제아무리 청명이라 해도 이런 곳에서 추락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리고 허공을 박차 돌아오기에는 거리가 너무도 멀었다.
“이익! 미친놈이!”
그런데 그때, 허공에서 몸을 뒤집은 청명이 몸을 웅크리며 소리쳤다.
“지금!”
우우우우우웅!
그 순간 절벽 아래에서 황금빛의 권기가 솟구쳐 올랐다.
“하핫!”
청명이 짧게 웃으며 발아래에서 솟아오르는 권기를 밟고 다시 절벽으로 몸을 날렸다.
“혜연!”
“스니이이이이임!”
화산의 제자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환호가 쏟아졌다.
저만한 거리에서 권기를 날리면서도 밟고 뛰는 이가 다치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기를 운용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이가 혜연밖에 더 있겠는가!
“진짜 미친 것들!”
욕설을 뱉는 백천의 얼굴에 환희가 차올랐다.
아래에 혜연이 있다는 것을 믿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허공으로 몸을 날린 청명이나, 청명이 몸을 날릴 것이라 예상하고 권기를 쏘아 올리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혜연이나.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음에도 서로가 무엇을 할지 이미 알고 있다.
“빌어먹을! 질투 날 정도네!”
조걸이 낄낄 웃어 대고는 소리쳤다.
“사숙!”
“안다!”
백천이 뒤쪽을 슬쩍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현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몰아쳐라! 저놈들이 청명이를 노리지 못하게 만들어라! 우리가 지켜야 한다!”
“예!”
주춤했던 화산파가 용기백배하여 절벽 위의 만인방을 향해 쏘아지듯 달려들었다.
“큭!”
“이 애송이들이!”
순간적으로 높아진 화산의 기세에 만인방도들이 당혹했다.
이 절벽 위는 다수가 한 번에 움직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그들의 전력이 압도적이라 해도 결국 화산을 맞상대할 수 있는 인원은 비슷한 수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절벽 아래에 있는 청명을 견제하기 위한 인원까지 충원해야 하니 공백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사기는 명백히 화산 쪽이 높다.
“뭣들 하느냐.”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들을 일깨웠다.
“구, 군사!”
상황을 지켜보던 호가명이 차디찬 눈으로 일갈했다.
“그래 봐야 애송이들이다. 느긋하게 밀어 내라. 저들을 쓰러뜨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 막아 내는 게 목적임을 잊지 마라.”
“예!”
만인방도들이 다시금 병기를 부여잡고 전력을 가다듬었다. 호가명의 시선은 슬쩍 절벽 아래로 향했다.
‘설마?’
이것까지 계산하고 절벽 아래로 내려간 건가?
저 천둥벌거숭이가?
호가명은 몸에 슬쩍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타다다닷!
무섭게 달라붙는 만인방도들을 뜯어내고 절벽을 달린 청명은 타오르고 있는 첫 번째 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타앗!
그리고 단숨에 아랫부분을 검으로 잘랐다.
카캉!
“엇!”
청명의 두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의 검격은 절벽에 깊은 상흔을 낼 만큼 강했지만, 정작 정면으로 검격을 맞은 천은 완전히 잘리지 않았다.
“이 새끼가!”
청명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다시 참격을 날렸다. 단숨에 잘라 내니 아랫부분이 절벽에서 떨어져 나가며 늘어졌다.
청명은 건너편 절벽의 장일소를 노려보았다. 멀리서 검기를 날려 천을 끊으려 할 수도 있다는 걸 미리 생각하고 특수한 천을 도화선으로 쓴 것이 틀림없었다.
이만한 거사를 준비하면서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일일이 신경 쓴다는 건 보통 용의주도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덮쳐라!”
하지만 더 생각을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만인방도들이 절벽을 내달리며 청명에게 돌진해 왔다.
조금 전에 상대했던 이들보다 확연히 경신법의 수준이 높았다.
“흥!”
하지만 청명은 코웃음을 치며 그들을 맞았다.
파앗!
절벽면을 박차고 오른 그는 되레 달려오는 이들을 향해 돌진했다.
깎아지른 절벽. 그 위에서 내리긋는 만인방도의 도를 맞아 청명의 검이 정면으로 맞부딪혀 온다.
만인방도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멍청한!’
그들은 아래로 향하고 있고, 저놈은 절벽 아래에서 위로 뛰어오르고 있다. 게다가 그의 무기가 중병인 도인 데에 비해, 저자의 병기는 얇디얇은 검이다.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누가 밀려나게 될지는 너무도 뻔한 일!
‘아래로 처박혀라, 이 오만한 놈!’
둘의 병기가 허공에서 서로 충돌했다.
카가가각!
청명의 검이 살짝 비틀어진다 싶더니 이내 도를 아래에서 위로 밀쳐 올렸다.
“엇?”
몸이 살짝 위쪽으로 밀려 올라갔다. 물론 아주 조금에 불과했다. 평소라면 발뒤꿈치를 내리는 것만으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곳은 절벽이다. 한번 튕겨 올려져 중심을 잃은 몸은 그저 아래로 추락할 뿐이다.
“이, 이 빌어먹…….”
발작적으로 도를 휘둘러 대며 몸부림치는 만인방도를, 청명은 그저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솟구쳐 오른 그는 이내 절벽을 타는 독사처럼 영활하게 움직이며 연이어 돌진해 오는 만인방도들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투우우우웅!
최소한의 힘, 그리고 최대의 효과.
한번 검을 나누면 반드시 상대의 목줄을 끊어 놓던 조금 전의 방식과는 조금 달랐다. 지금 청명의 검은 부드러움을 한껏 담고 있었다. 상대를 상하지 않게 하며 최소의 힘으로 절벽에서 떨쳐 내기만 한다.
물론 그 결과는 결코 자비롭지 않다.
“이, 이 새끼가!”
“이런 빌어먹을!”
절벽에서 멀어져 떨어지던 만인방도들이 기겁을 하며 반대쪽으로 장력을 연이어 발출했다.
수십 번의 장력을 뿜어낸 끝에 겨우 다시 절벽에 달라붙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은 그리 마음 같지 않았다.
“쳐라!”
“이 사파 놈들!”
기어 올라오던 무당의 제자들이 만인방도들을 확인하고는 검을 뽑아 들더니 절벽을 박찼다.
“이!”
절벽 면의 한중간에서 만인방도들과 무당파, 그리고 소림이 서로 살수(殺手)를 날려 댔다.
“아아아아악!”
그 결과야 뻔했다.
만인방이 제아무리 강하고 위쪽을 점거한다 해도, 불과 십여 명으로는 밀고 올라오는 무당을 상대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검에 꿰뚫려 고슴도치가 되어 버린 만인방도가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하나.
덥석.
“뭐, 뭣…….”
“끄으으……. 으으……. 개…같은 정파 놈……들.”
전신이 꿰뚫리고도 악은 남은 만인방도가 절벽에 붙은 무당의 제자를 움켜잡았다. 그러더니 이내 독기 어린 눈을 번들거리며 씨익 웃었다.
“같이 가자.”
콰득!
“아아아아아악!”
무당의 제자 하나가 비명을 내지르며 추락했다. 그가 마지막까지 움켜잡았던 절벽이 부서져 나가며 돌가루가 함께 후드득 부서져 내렸다.
“진며어어어어엉! 장로님! 진명이!”
“무시하고 올라라!”
“장로님!”
“빌어먹을! 모르겠느냐! 아래에 있으면 어차피 죽는다! 진명을 살리고 싶다면 저 줄을 끊어야 한단 말이다! 올라! 당장 올라라!”
“젠장……!”
그 광경에 청명은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나만 고생할 수는 없지.”
중얼거린 그가 절벽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땡중!”
“오오오오!”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혜연이 단번에 권력을 위로 발출했다.
조금 전 무당이 말했듯, 아래에 있으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그들이 들어온 길은 완벽한 사로(死路)가 되었을 터. 저 장일소가 저 뻔히 보이는 길을 그냥 두었을 리 없잖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기어올라 절벽이 무너지는 걸 막아야 한다.
하지만 혜연은 한 치의 의심이나 흔들림도 없이 아래를 지키고 있었다.
“시주!”
“오냐!”
혜연이 발출한 권력을 밟은 청명이 절벽 반대편으로 뛰어오른다.
카가가각!
단숨에 세 줄기의 도화선을 잘라 버린 청명은 장일소를 흘끗 노려보았다.
“흐으음.”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장일소의 얼굴엔 흥미롭단 기색이 가득했다.
“패군. 아니, 련주.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은 것 같은데?”
만금대부의 말에 장일소는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흠.”
이내 그의 눈에 괴기스런 빛이 스쳤다.
“아무래도 너무 쉽게 보인 것 같네? 그럼 선물을 줘야지.”
따악!
장일소가 손가락을 튀겼다. 그러자 잠시 후 무언가가 날라져 왔다. 만인방도들이 옮기는 것의 정체를 확인한 만금대부가 잠깐 정적을 지키다 말했다.
“……이걸 미리 준비했다고?”
“당연한 말씀.”
“…….”
그의 얼굴에서 슬쩍 핏기가 가셨다.
‘그럼 대체 언제부터 이 상황을 그렸다는 건가?’
최소한 그들을 만나기 전이다. 그렇다면 장일소는 그들을 만나기 전부터 녹림을 제외한 신주오패 모두를 설득하여 자신의 휘하로 넣을 자신이 있었다는 건가?
“귀하신 분들이 우릴 만나겠다고 저리 오시는데, 당연히 선물 정도는 준비해야지.”
장일소가 득의에 찬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선두에서 절벽을 오르던 허도진인은 그런 장일소의 표정을 보고 순간 흠칫하여 멈춰 섰다.
그런 그의 예감에 호응이라도 하는 듯 잠시 후 절벽의 끄트머리에서 시커먼 솥 같은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저거?’
장일소가 휘파람을 불며 경쾌하게 말했다.
“부어라.”
허도진인의 입에서 비단 찢어발기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피, 피해라! 아니, 막아라! 기름! 기름이다! 끓는 기름이 쏟아진다!”
수십 개의 솥이 단숨에 기울어졌고, 부글부글 끓는 기름이 머리 위로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절벽을 오르던 구파 제자들의 눈에 진득한 공포와 절망이 들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