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0화. 다시 만나 더럽게 반갑다! (5)
암석밖에 보이지 않는 깎아지른 절벽, 그 삭막한 공간에서 붉디붉은 매화가 환상처럼 피어났다.
그 대경할 광경에 만인방도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미친 듯이 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건 밀려오는 파도를 칼로 막으려 드는 것처럼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사사사사삭!
날아든 매화검기가 그 짧은 순간에 육신을 수십, 수백 번 베어 낸다. 채 반도 베이기 전에 숨이 끊어진 몸뚱이는 매화검기가 스쳐 지나고 한참이나 지나서야 털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쾅!
땅을 힘껏 박찬 청명이 잠시 주춤한 만인방도들을 향해 돌진했다.
강력한 진각과 가공할 속도.
하지만 정작 청명의 두 눈만은 북해의 만년빙처럼 차디찼다.
“읏!”
흩어지는 매화검기 사이로 맹렬하게 돌진해 오는 청명의 모습에 만인방도는 당혹하여 잠깐 몸을 굳혔다.
그 순간 결말이 정해지고 말았다.
청명은 그 찰나의 틈을 놓칠 이가 아니었다.
파아아앙!
검이 허공을 찢어 내는 듯 날아들어 만인방도의 목을 단숨에 쳐 날렸다.
둥근 머리가 팽그르르 회전하며 허공으로 떠오르는 순간, 청명은 머리 없는 몸뚱이를 그대로 걷어차 날려 버렸다.
“이익!”
만인방도들이 이를 갈아붙였다.
본디 동료의 시신을 상하게 하는 건 있을 수 없다. 받아 낼 수 있다면 받아 내야 하고, 그럴 수 없다면 눈물을 머금고 피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정파의 기준이고, 청명이 노리는 바일 터.
“얕보지 마라, 애송이 놈아!”
만인방도가 날아드는 동료의 시신에 참격을 날렸다. 시신이 반으로 쩍 갈라지며 피를 흩뿌리고 튕겨 나갔다.
‘어떠…….’
푹!
하나 그 순간, 만인방도의 목에 매화검이 박혔다.
“끅…….”
만인방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충혈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가 시신을 베기 위해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틈.
시신 뒤에 몸을 숨겼던 청명이 검이 내리그어지자마자 그 빈 공간으로 몸을 던져 넣은 것이다.
“…….”
붉은 피가 점점이 묻은 청명의 얼굴이 보이고, 시야가 순식간에 흐려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또렷하게 본 청명의 눈에는 일말의 감정이나 망설임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만인방도는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이해했다.
파앗!
목을 꿰뚫었던 검을 그대로 휘둘러 뽑아낸 청명은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이노오오오옴!”
이 광경에 잔뜩 흥분한 만인방도들이 무시무시한 함성을 내지르며 청명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나.
챙!
날아들던 검은 청명의 근처까지 가기도 전에 연이어 날아온 검에 가로막혔다.
“이……!”
투웅!
만인방도의 검들을 단번에 튕겨 낸 백천의 검이 순식간에 매화검기를 흩뿌렸다.
일체의 흥분이 보이지 않는 얼굴.
그 쾌속하고 화려한 검과는 달리 백천의 얼굴은 더없이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검수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을 모양새였다.
“이설! 조걸!”
“예!”
“청명의 좌측을 맡아라!”
“예!”
“윤종은 청명의 뒤로 따라붙어!”
“예!”
매화검기로 적을 단번에 밀어 낸 백천의 눈이 청명을 빠르게 쫓았다.
쾅!
진각을 내리밟은 청명이 다시 앞으로 돌진했다. 그 광경에, 백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저건 ‘나 혼자 간다’가 아니다.
‘먼저 갈 테니 늦지 않게 따라붙어’다.
적의 검이 자신에게 날아드는 것을 알면서도 청명은 시선조차 돌리지 않는다. 당연히 백천이 그곳에서 그 검을 막아 줄 거라 믿는 것이다.
“대책 없지만…….”
백천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헌앙한 얼굴에 자신감이 차오른다.
검이 햇살을 받아 희게 빛났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마라! 적은 사파다! 망설이면 이쪽이 죽는다!”
“예!”
백천의 당부에 이어 우렁찬 대답이 울렸다. 화산파의 제자들이 주저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카가강!
첫 번째 검격이 날아드는 창을 튕겨 냈다.
서걱!
연이어 휘둘러진 검이 적의 목울대를 깔끔하게 베고 지나갔다.
“끄르륵.”
피거품이 차오르는 괴이한 소리와 함께 만인방도의 몸이 썩은 짚단처럼 넘어갔다. 하지만 그 몸이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청명의 몸은 그를 스쳐 지나가 다음 적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이……. 이익!”
만인방.
천하를 통틀어 이들보다 많은 전투를 치른 곳이 있을까?
다른 문파들이 평화에 젖어 제 영역만 지킬 동안 만인방은 저 혼란했던 광서 땅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벌이며 그 영역을 넓혀 나갔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이들은 아니라 해도 이들이 천하에서 가장 전투에 익숙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광서의 전귀(戰鬼). 그건 만인방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만인방도들은 오늘 보고야 말았다. 진정한 전귀가 무엇인지 말이다.
제 목이 떨어져 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싸움 귀신들이 달려드는 청명을 보며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공포란 이해하고 느끼는 게 아니다.
머리가 이해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굳어 버린 몸은 반응을 늦추고, 그 늦어진 반응이 청명의 검을 더욱 빠르게 만든다.
파아아앗!
단숨에 만인방도의 목을 날려 버린 청명의 입가에 괴기한 미소가 서렸다.
“이, 이!”
“덮쳐라!”
장창을 든 만인방도들이 청명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청명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든 탓에 그의 전후좌우는 어느새 만인방도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전투에 있어서 선봉이 본대와 떨어져 포위된다는 건 곧 죽음을 뜻한다.
만인방도들 역시 백전을 치러 온 전투의 화신들이었다. 그 틈을 놓칠 만큼 어리숙할 리 없었다.
“타아아앗!”
병기가 수도 없이 날아들었다. 검과 도, 거기에 창까지. 서로 다른 길이의 병기들이 청명의 몸을 꿰뚫어 버리려는 그 순간.
“뭐?”
청명의 몸이 일순 그 자리에서 퍽 꺼지듯 사라졌다.
카가가가강!
거의 몸에 닿도록 날아들었던 병기를 회수할 방법이 있을 리 없다. 내력을 잔뜩 실은 병기들이 서로 정면으로 충돌하며 도로 튕겨 나왔다.
“끅!”
손에 강력한 반동이 전해졌다. 병기를 타고 밀려 올라온 내력이 그들의 내력을 역류시키기 시작했다.
그 순간.
파아아아아앙!
채찍이 대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허벅지에서 섬뜩한 고통이 느껴졌다. 격통이 퍼져 나갔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아악! 내 다리! 내 다리이이이이이!”
날아드는 병기들을 피해 바닥에 엎드렸던 청명이 몸을 회전시키며 원형의 검기를 날린 것이다. 수많은 병기들과 그 병기를 뒤덮은 기운에 가려져 청명의 몸과 참격의 순간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 패착이었다.
다리가 통째로 잘려 나간 만인방도들이 그 자리에 엎어져 꿈틀대며 비명을 질렀다. 청명은 한껏 낮춘 자세 그대로 뱀처럼 앞으로 돌진했다.
서걱! 서걱!
쓰러진 이들을 독사처럼 타 넘는 청명의 검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쓰러진 이들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 낸 청명은 남은 이들을 내버려 둔 채 앞으로 돌진했다.
“주, 죽여……!”
움직임이 더없이 실전적이고, 또한 기괴하다. 심지어 사람의 목숨을 끊어 내는 데 있어서 손톱만큼의 망설임도 없다. 다리를 잃어 더 이상 전투가 불가능해진 이들의 목까지 끝끝내 베어 내는 그 잔혹함이 천하의 만인방조차 질리게 했다.
“저 새끼는 반드시 죽여!”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만인방도들이 다시 사기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그걸 내버려 둘 청명이 아니다.
쾅!
땅을 박찬 청명이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파아아앗!
매화검법에는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
으레 거리를 만들어 내는 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이 물러나는 것, 또 하나는 적을 물러나게 하는 것.
청명의 기세에 차마 곧바로 달려들지 못하고 주춤한 이들의 눈앞에서 붉은 피의 꽃이 피어났다.
“아아아아아악!”
“크아아악!”
매화검기가 전방의 만인방도들을 뒤덮었다.
앞쪽에 서 있던 이들에겐 비명조차도 사치였다. 입을 채 벌릴 틈도 없이 핏덩어리가 되어 죽어 갔다.
죽음과 맞닿은 순간 그들은 한 가지는 확실하게 이해했을 것이다.
화산의 검수를 상대로 거리를 벌린다는 게 어떤 대가를 각오해야 하는 것인지를 말이다.
털썩!
탁!
숨이 끊어진 이들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청명이 바닥에 발을 디뎠다.
만인방도들을 서늘하게 쏘아보던 청명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반대편 절벽에서 이곳을 응시하는 장일소의 눈과 피와 죽음을 타넘는 청명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만금대부가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건 사람이 아니로군.”
“왜 저런 놈이 저쪽에 있는 거지?”
“지독하구만.”
천면수사와 흑룡왕도 좀처럼 청명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강함?
그런 거야 사실 아무래도 좋다. 강한 이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저런 독기는 수많은 전장을 극복해 온 그들조차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저건 반드시 죽여야 한다.”
만금대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장일소가 혀를 내어 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붉은 입술을 스치고 휘감는 혀가 마치 뱀 같았다.
“뭐 하느냐?”
“예?”
“불을 붙여라.”
모두가 청명에게 눈을 빼앗겼지만, 장일소만은 예외였다.
“광대놀음에 눈을 빼앗길 것 없다. 그래 봐야 여기까지 오지 못한다. 절벽을 터뜨려 아래에 있는 놈들부터 파묻어라!”
“예!”
홰를 들고 온 이들이 미리 설치된 도화선에 불을 가져다 댔다.
화르르륵!
기름을 먹인 천이 순식간에 불타오르며 순식간에 수십 줄기의 불꽃들이 붉은 뱀처럼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 순간.
타아아앗!
청명이 땅을 박차고 몸을 띄웠다.
만인방도들이 기겁을 하며 움찔했지만, 청명이 날아오른 방향은 그들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뭣?”
경악한 만인방도들이 순간 입을 쩍 벌렸다.
청명이 느닷없이 저 절벽 아래로 몸을 날린 것이다.
“뭐냐?”
절벽 끝 쪽에 있던 이들이 다급히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은 보았다.
타닥! 타다다다다닥!
깎아지른 절벽. 발 디딜 틈 하나 보이지 않는 그 가파른 절벽의 옆면을 청명이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모두의 부릅떠진 눈에 경악이 스쳤다.
“저……. 저게…….”
타다다다닥!
청명은 앞쪽에서 불타는 도화선을 향해 직선으로 내달렸다. 흡사 평지를 뛰는 것처럼 보였다.
한 손에는 암향매화검.
그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
만인방도는 물론이고, 이곳에 있는 모든 무인들의 머릿속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을 광경이었다.
“막아! 이 버러지 같은 놈들아! 뭘 지켜보고 있느냐!”
그때 처음으로 장일소의 입에서 커다란 고함이 터져 나왔다. 화들짝 놀란 만인방도들이 이를 악물고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장일소의 고함이 일깨운 것은 만인방도들뿐만이 아니었다.
“뛰어올라라! 당장! 저 불을 꺼야 한다!”
“예!”
절벽 위에서 벌어진 격전에 잠시 혼을 빼앗겼던 소림과 무당이 황급히 절벽으로 달려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제길! 뒤처지지 마라! 살 길은 위뿐이다!”
그 뒤를 이어 남궁과 청성 역시 혼신의 힘을 다해 절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비규환.
죽이려는 자와 살아남으려는 자.
도도히 흐르는 장강의 어귀에서 일백 년 만에 정과 사의 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