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화. 다시 만나 더럽게 반갑다! (4)
“그러니까…….”
청명이 귀를 후비적거리며 말했다.
“둘이서 여기 있는 놈들을 싹 때려잡자?”
“그렇지.”
“그게 찝찝하면 니들 하는 거 뒤에서 구경이나 하고 콩고물이나 받아먹어라?”
“정확하다.”
장일소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청명이 뭔가 아리송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저거 말이야.”
“으응?”
백천을 비롯한 오검이 하나같이 불안한 얼굴로 그런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 새끼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좋은 제안 같지 않…….”
“아악! 좀 닥치라고!”
“하지 말라니까!”
“제발 좀! 이 새끼야, 제발!”
정말로 솔깃한 것 같은 얼굴의 청명을 보며 오검이 일제히 소리를 빼액 질렀다.
“에이, 진짜.”
청명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현종을 보았다. 격하게 반발하는 오검들과는 다르게 그는 그저 심유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말한다.
무엇이든 마음 가는 대로 행하라, 화산은 언제든 너의 결정을 지지할 것이다.
그건 현종이 청명에게 보여 주는 믿음이었다.
‘에이.’
하지만 현종은 모른다.
그 굳건한 믿음이 실린 눈빛이 오히려 청명을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말이다.
청명은 먼 하늘로 슬쩍 시선을 주었다.
‘장문사형.’
만일 이곳에 서 있는 이가 청문이고, 청명이 그런 그의 뒤에 있었다면 청명은 분명 이 기회에 저 망할 구파 새끼들을 싹 다 쳐 죽이자고 했을 것이다.
청문이 조용히 하라고 일갈하면 그에 맞서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도 내심으로는 그런 청문의 말을 받아들이려 애썼을 테다.
하지만 지금 청명이 서 있는 곳은 청문의 뒷자리가 아니라, 청문의 자리였다.
‘사람 반성하게 만드네.’
문파를 이끈다는 것은 스스로를 내려놓는다는 것과도 같다.
마음속 원한, 세상의 이치, 격렬한 충동을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화산만을 위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게 얼마나 무거운 일이었는지를 지금에 와서야 이해한다.
“흠.”
하늘을 물끄러미 보던 청명은 잠깐 한숨을 쉬고 다시 장일소를 보았다.
장일소는 안을 들여다볼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깊디깊은 눈으로 청명을 주시하고 있었다.
“말귀를 못 알아 처먹는 것 같은데. 꼭 두 번, 세 번 얘기를 해 줘야 하나?”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개소리하면 들이받아 버린다고 했을 텐데?”
“…….”
장일소의 얼굴이 살짝 뒤틀렸다.
“개소리?”
“이래서 사파 놈들이랑은 상종을 하는 게 아니라니까.”
청명은 뺨을 한번 쓱 쓸며 장일소를 빤히 보았다.
“구파 새끼들 꼴 보기 싫은 거야 당연한 일이지. 성질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냅다 패 죽여 버리고 싶은 것도 사실이고.”
“그럼 뭐가 문제지?”
“그래도 이 새끼야!”
청명이 살벌하게 이를 갈아붙였다.
“어떤 아비도 애 앞에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아! 어떤 형도 동생에게 사람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목적만 이루면 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고.”
“…….”
“내 삶의 방식은 내 것이다. 화산의 것이 아니야! 나는 화산에 내 방식을 따르라고 할 생각은 없어. 그건 지옥이지.”
“……공감.”
“그건 따라하고 싶어도 못 따라해.”
“아우, 싫다.”
“…….”
청명이 슬쩍 돌아보자 오검이 헛기침을 하며 그 시선을 외면했다.
떨떠름한 눈으로 잠깐 그들을 보던 청명은 한층 더 날카롭게 장일소를 쏘아보았다. 눈빛에 분노와 경멸이 스쳤다.
“그게 사람이 지켜야 할 방식이라는 거다. 이 도리가 뭔지도 모르는 사파 새끼야.”
문파를 이끄는 이는 무릇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
‘청문 사형이라면 반드시 이리 말했겠지.’
그리고 그가 아는 가장 완벽한 장문인은 두말할 것 없이 청문이었다.
“도리란 돌아오기를 바라고 지키는 게 아니다. 모두가 지키지 않는다 해서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니다. 도인이란 스스로를 갈고닦는 이. 가장 중요한 건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느냐다!”
“…….”
“사파랑 손을 잡느니 지나가는 개랑 손을 잡는 쪽이 낫지. 그건 귀엽기라도 하잖아? 안 그래?”
말없이 청명을 빤히 보던 장일소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도리?”
“그래, 도리.”
“그래도 말이 조금 통할 줄 알았더니, 병신 같은 소리를 지껄이네. 도리?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장일소가 입가를 비틀었다.
“도리란 얻지 못한 자의 피난처! 가지지 못한 자의 위안! 용기 없는 자의 변명에 불과하다. 세상을 제 손에 쥔 이들은 도리 따위는 논하지 않아. 그럴 용기가 없는 이들만이 세상에 순응하며 도리를 논하지!”
그 말에 청명은 반박하기는커녕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맞아.”
“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
장일소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청명을 바라본다.
“……하면 어찌 내 말을 거부하는 것이냐?”
“착각하는 모양인데, 방금 내가 한 말은 해야 하는 말이야.”
“…….”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스르르릉.
청명이 천천히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 끝을 정확히 장일소를 향해 겨누었다.
“친근한 척은 적당히 하시지, 빌어먹을 새끼야. 방관한 자는 역겨워. 무지한 자는 추악하고. 하지만…… 방관한 자의 죄도 무지한 자의 죄도 네놈에게는 미치지 못해.”
청명의 두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만인방의 손에 사숙조의 팔이 잘린 순간부터 화산과 만인방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너희와 손을 잡느니 손목을 잘라 버리는 게 나아.”
“허…….”
장일소는 어이가 없다는 듯 붉은 입술을 뒤틀며 실소를 흘렸다.
“소인배로구나.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치겠다고?”
“물론 나는 소인배지.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소인배다. 그러니까…….”
청명의 두 눈이 살기를 내뿜었다.
“그 소인배의 원한을 똑똑히 느끼게 해 주지.”
장일소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멍청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일소는 알고 있다.
청명의 두 눈에 어린 지독한 원한을 말이다. 그리고 그 원한이 결코 만인방에게만 향해 있지 않다는 것을.
아니, 원한이라면 오히려 저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 더 깊을지도 모른다.
농담처럼 너스레를 떨고, 이미 결정해 놓은 일을 읊듯 말했지만, 이 짧은 시간 동안에도 청명의 내심에서는 지옥 같은 고뇌가 오고 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청명이 이런 결론을 내린 이유는 단 하나다.
“문파라……. 그따위 것이 그리 중요하단 건가?”
장일소에게 만인방은 스스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청명에겐 청명 그 자신조차 화산을 일으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스스로의 원한을 풀기 위해 화산을 이용할 심산이었다면 장일소와 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명은 문파를 위해서 자신의 원한을 내려놓았다.
본인은 지옥 불 속을 걷는 한이 있더라도 화산만은 반드시 정도를 걷는 문파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이해가 가면서도 납득이 되질 않는다. 저건 거의 속박에 가까운 강박이다.
“가여운 놈이구나.”
마음만 먹으면 세상을 뒤흔들 수 있을 담력과 입지를 손에 쥐고서도 그 힘을 마음껏 휘두를 수조차 없다니.
가엽고도 안쓰럽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어리석군.”
장일소가 경멸 어린 눈으로 청명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내가 있어야 문파도 있는 법이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나다.”
“아아, 맞아. 나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지.”
청명이 입꼬리를 뒤틀었다.
“그런데 이제는 알아. 세상에는 나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는 거야. 너 같은 머저리 새끼는 평생 알 수 없겠지만 말이야.”
잃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일.
잃어 보았기에 깨달은 것이다.
누구도, 세상 누구도 다시는 청명에게서 화산을 앗아 가지 못한다. 그게 누구라 해도!
“말이 안 통하네.”
장일소가 살짝 과장된 얼굴로 안타깝게 혀를 찼다.
그와 청명은 분명 닮았다. 하지만 지독할 정도로 다르다.
대체 이 차이가 어디에서 생겼는지는 장일소도 알 수 없었다.
“역겹군.”
“그래. 나도 네가 역겹다.”
청명 역시 두 눈을 불태우며 장일소를 노려보았다.
그가 만일 화산에 들어 청문을 만나지 못했다면, 사형제들의 정을 알고 함께 걷는 이들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다면, 어디에 정 붙일 곳도 없는 고아로 뒷골목에서 자라나다 장일소 같은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욱더 저 꼴을 차마 눈 뜨고 봐 줄 수가 없다. 이건 장일소에 대한 혐오이자 스스로에 대한 혐오였다.
‘나는 화산이 세상에서 가장 답답했다.’
그에게 있어 화산은 전부인 동시에 속박이었다. 화산이라는 사슬이 그를 칭칭 옭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청문이 없었다면 화산 따위 진즉에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답답하기 짝이 없던 그의 화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가슴속에 끊이지 않는 통곡을 불러일으킨다.
이건 장일소에 대한 혐오이자 과거의 자신에 대한 혐오다.
‘왜 이렇게 저 새끼를 볼 때마다 속이 뒤틀리나 했더니.’
그저 운검에 대한 원한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그만 지껄이고 덤벼. 그 모가지를 잘라 내 줄 테니까.”
“하하하핫.”
장일소가 유쾌하다는 듯 크게 웃었다.
그러자 만금대부가 옆에서 실소했다.
“아무래도 잘 안 된 모양인데?”
“딱히 대단한 일도 아니지.”
장일소가 손을 내저었다.
“천우맹이라면 모를까, 화산 따위는 전력이라고 할 수도 없지. 조금 더 쉽게 풀어 보고 싶었던 것뿐이건만…….”
청명과 화산을 보는 장일소의 눈엔 이제 심드렁한 기색이 가득했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면, 별수 없는 일이지. 그 목을 뒤틀어 목구멍으로 술을 쑤셔 박아 주는 수밖에.”
장일소가 화산을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모조리 죽여. 아래에 있는 것들과 함께. 방해하지 못하게 해라.”
“충!”
절벽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만인방의 무사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절벽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방향은 화산.
“온다!”
청명의 외침과 동시에 화산파의 제자들이 일제히 한철검을 뽑아 들었다.
“장문인!”
“음.”
현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악적들을 물리쳐라! 화산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
“예!”
운암이 재빠르게 그 뒤를 이어 소리쳤다.
“화약이 설치된 도화선을 끊어라! 저들이 절벽을 폭파시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청명이 소리쳤다.
“사숙! 사고! 사형!”
“오냐!”
“준비.”
“지금이냐?”
“벌써 몸이 달았다고!”
청명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무래도 좋다.
등 뒤에 이들이 있는 걸로 지금은 충분하다.
“단숨에 간다! 죽을 각오로 따라붙어!”
청명이 절벽의 끝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뒤로 백천과 유이설, 윤종과 조걸이 한 몸처럼 뒤따랐다.
‘장문사형.’
이제는 안다.
청문도 올곧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도 사람이었으니 스스로의 욕망에 흔들리지 않았을 리 없고, 충동에 시달리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럼에도 청문은 한없이 올곧아야만 했다.
뒤에서 그의 등을 지켜보는 청명과 다른 제자들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청명이 그 길을 간다.
“가자아아아아아!”
절벽을 박차고 솟아오른 청명의 검 끝에서 붉디붉은 매화가 꿈결처럼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