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8화. 다시 만나 더럽게 반갑다! (3)
“어디 보자…….”
청명의 시선이 건너편의 사패련에게로 향했다.
“저 새끼들도 마음에 안 들고.”
이번엔 절벽 아래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이 새끼들도 마음에 안 들고.”
그는 이내 심드렁한 얼굴로 혀를 끌끌 찼다.
“세상에 마음에 드는 놈들이 이렇게나 없나. 고민일세. 고민이야!”
그때, 윤종이 바로 뒤에 바짝 붙어 서며 속닥거렸다.
“야, 청명아.”
“응?”
“너 말로만 그러는 거지? 사실은 밑에 있는 구파를 도우려고 하는 거 맞지?”
청명이 세상 한심하다는 얼굴로 윤종을 돌아보았다.
“아니, 이 양반은 뭔 병이라도 걸렸나. 내가 저 새끼들 뭐 예쁘다고 도와줘? 마음 같아서는 기름 쏟아붓고 불까지 질러 버리고 싶구만.”
“…….”
“왜? 그래도 정파다 이거야?”
“그, 그게 아니라, 인마!”
“응?”
윤종이 필사적으로 아래쪽을 향해 눈짓했다.
“저기 있잖아, 저기!”
“뭐가?”
청명이 영 눈치 없이 못 알아들으니 듣다 못한 유이설이 눈살을 확 찌푸리며 윤종을 거들었다.
“혜연 스님. 아래에!”
“엥?”
“맞아! 저기 혜연 스님이 계시다고! 아니, 구파고 나발이고 혜연 스님은 구해야 할 거 아냐!”
“맞아요, 사형!”
청명의 눈에 그제야 아차 하는 기색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쟤가 저기에 있네?”
혜연이 소림의 한가운데 서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소처럼 큰 눈망울이 슬픔으로 반짝이는 모양새가 사람이라면 도저히 외면할 수 없을 듯했다. 청명이 그 양을 물끄러미 보다 말했다.
“근데…….”
“응?”
“스님이 원래 죽으면 다비탑 쌓고 화장하잖아?”
“……갑자기 그건 왜?”
“아니. 뭐…….”
청명이 뒷머리를 슬쩍 긁적이더니 씨익 웃었다.
“어차피 그렇게 끝나는 건데 미리 불 질러서 화장한다고 생각하면 안 억울하지 않을까?”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아!”
“말 같은 소리를 해야 될 거 아냐!”
“네가 사람이냐? 네가?”
결국 오검이 일제히 달려들어 청명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 모두 눈이 돌아가고 나니 장일소고 나발이고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청명은 억울한 듯 항변했다.
“아니! 원래 불교라는 게 집착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 아니냐고! 제 목숨 아끼는 게 제일 큰 집착이지! 어찌 보면 이건 내가 도와주는 걸 수도 있다니까?”
“조동아리! 요 망할 조동아리!”
“혼나야 돼!”
윤종이 청명의 입을 손바닥으로 때려 대고, 유이설이 검집으로 청명의 머리를 콩콩 두드렸다.
“에이! 귀찮게 굴지 말고 놔 봐! 그럼 이렇게 하면 되잖아! 야! 땡중!”
청명이 유이설과 윤종을 밀쳐 내고는 크게 소리쳤다. 혜연이 영문을 모르고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올라와!”
“……예?”
“너는 그냥 올라오라고. 너 하나 올라온다고 쟤들이 발작이야 하겠냐?”
“…….”
“너만 올라오면 깔끔하게 해결된다. 얼른 올라와!”
혜연이 빙그레 웃었다.
미친 줄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내 생각보다 더 미쳤구나. 상상 초월이로다.’
미친놈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 청명이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사형제들을 두고 제가 어떻게 올라갑니까, 시주.”
“응? 안 와?”
“저는 못 갑니다…….”
“크으. 역시 우리 땡중이 의리는 있네. 그럼 같이 뒈지시든가.”
“…….”
혜연의 눈가에 맑은 이슬이 맺혔다.
‘내가 저런 새끼를 잠시나마 보고 싶어 했다니.’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한편 벽현자는 할 말을 잃고 청명을 망연히 보았다.
안하무인. 언어도단.
“……어찌 저리 경망스러울 수가 있다는 말인가?”
“미친놈이 따로 없군.”
남궁황의 얼굴에서도 지울 수 없는 불쾌감이 묻어났다.
분명 청명의 행동은 도를 넘었다. 하지만 딱 두 명, 나머지와는 다른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인 허도진인의 눈빛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저건 하고자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사람이 결국엔 동물이니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게 되어 있다. 천하의 천둥벌거숭이도 제 목에 칼이 들이밀어지면 평소처럼 날뛸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지금 청명은 되레 평소보다 더 날뛰고 있다.
‘소림도 무당도, 심지어 만인방이나 흑귀보마저도 저 아이를 긴장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의미겠지.’
그는 안다. 화산신룡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할 멍청이가 아니다. 오히려 과도하게 계산이 빠르고, 시류의 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상황을 모르고 설쳐 대는 이의 방종은 멍청함이지만, 상황을 알고 나서는 이의 행위는 자신감이 아니던가?
‘이 상황마저 제 발아래에 둘 자신이 있다는 건가?’
허도진인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그는 여지껏 충분히 청명을 고평가해 왔다. 천하를 통틀어 그보다 청명을 높이 평가하는 이는 몇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허도진인은 그의 청명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어긋나 있었던 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허도진인을 제외한, 청명을 다른 눈으로 보는 또 한 사람.
장일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재미없는 경극을 계속 하려는 건 아니겠지, 화산신룡?”
청명이 장일소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너는 주둥이 닫으라고 했을 텐데?”
“나도 그래 주고 싶지만, 너도 알고 있겠지. 내가 입을 열지 않으면 영원히 대치가 지속될 뿐이다.”
청명이 말없이 머리를 긁었다. 장일소의 입에서 나왔지만 저게 틀린 말이 아니란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럼 어디 지껄여 봐. 대신 말조심해라. 개소리 지껄이면 뒤도 안 돌아보고 들이받아 버릴 테니까.”
그 말을 들은 모두가 입을 쩌억 벌렸다.
아까는 아가리를 닥치라더니, 이번에는 개소리 지껄이지 말란다. 소림의 방장인 법정이라고 해도 감히 장일소를 저리 대하지는 못할 텐데 말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새파란 어린놈에게 막말을 들은 장일소의 기분이 딱히 나빠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잠자코 보고 있던 만금대부가 입꼬리를 뒤틀며 웃었다.
“걸물이로군.”
“그 말로도 부족하지.”
장일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청명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만금대부는 그런 그의 표정이 어쩐지 유쾌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과연, 미친놈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다는 건가?’
실로 기이한 일이다.
강호에서의 격을 따진다면 만금대부의 명성은 오히려 저 장일소보다 조금 더 높은 편이다. 그리고 저 화산신룡인가 하는 애송이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런 만금대부가 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둘에게는 강호에서 논해지는 명성이나 지위와 무관한 다른 힘, 무언가가 있었다. 비단 광기라고만 칭할 순 없는, 그들은 알 수 없는 다른 무언가가.
장일소의 붉은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어떤가, 화산신룡. 내가 준비한 선물이?”
“……뭔 개소리냐?”
“이제 와 서로 숨길 것도 없지 않나? 물론 너는 나를 찢어 죽이고 싶겠지?”
“잘 아네.”
“하지만 동시에, 너는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원수와도 협력할 수 있는 놈이고.”
“…….”
환하게 웃음 짓는 장일소의 얼굴은 얼핏 기괴해 보였다.
“문파와 문파를 엮어 인연을 만들고, 결코 모일 수 없어 보이는 이들은 하나의 지붕 아래에 집결시킨다. 이건 욕망에 몸을 맡긴 이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지.”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천우맹은 그런 게 아니야.”
“아니지. 아니지, 화산신룡.”
장일소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지. 중요한 건 너는 이 정도에서 만족할 생각이 없다는 거야. 네가 원하는 건 천우맹이 더욱더 커지는 거겠지! 더욱 더! 모든 것을 게걸스레 집어삼킬 만큼! 더!”
청명의 눈이 가라앉는다.
“너 나 아냐? 아주 잘 아는 듯 지껄여 대는데?”
“알다마다. 알 수밖에 없지. 우린 닮은꼴이니까.”
청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거 터진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은 아니란 걸 모르나? 개소리 지껄이면 가만 안 둔다고 했을 텐데?”
“아니, 아니. 하나는 확실히 닮았잖아.”
장일소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청명을 샅샅이 훑었다.
“만족을 모른다는 것.”
“…….”
그 말에 움찔한 것은 청명이 아니라 그 곁을 지키고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저건 진짜 부정할 수가 없네.’
장일소가 욕망의 화신이라면, 청명은 탐욕의 화신이나 마찬가지다. 청명의 탐욕 덕에 화산이 이토록 빠르게 성장하지 않았던가?
다른 문파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성장을 단기간에 이뤄 내고도 만족하지 못해서 이 장강까지 와 또 다른 일을 벌이는 이가 바로 청명이다.
“그러니, 봐라. 화산신룡.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겠니?”
“…….”
“천우맹도 사패련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존재하는 한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지. 하지만…… 저놈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강북이라는 드넓은 땅을 천우맹과 사패련이 나눠 먹을 수 있다!”
모두가 청명을 그저 청명으로 보았다.
하지만 장일소만은 청명의 ‘위치’를 정확하게 보고 있다. 그가 지금 상대하는 이는 화산의 제자인 화산신룡 청명이기도 하지만, 천우맹의 실질적인 결정자인 청명이기도 하다.
“도의, 정의, 협의……. 그따위 말들이 얼마나 무가치한지 너라면 분명히 알고 있을 테지. 저들이 그따위 말을 논하는 것이 얼마나 역겨운 짓인지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청명은 대답 없이 건너편의 그를 쏘아보기만 했다. 장일소는 격앙되었던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미소 지었다.
“나를 도와라, 화산신룡.”
“…….”
“개미 새끼 한 마리 살아 나가지 못한다. 이곳에서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아. 그렇다면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천하의 누구도 알지 못하게 되겠지. 저들을 죽여 없었다는 비난은 사패련이 모조리 가져가겠다. 너희는 그저 그곳에 서서 구경이나 하면 된다.”
장일소가 양팔을 가볍게 펼쳤다. 그의 붉은 장포가 바람에 휘날리고, 그의 장신구들이 요사스럽게 짤랑거렸다.
“그럼 너희는 천하의 반을 손에 넣을 수 있다.”
“…….”
“무너뜨리는 것은 저들 따위가 아니야. 이곳에서 무너지는 것은 지난 백 년 동안 이어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치세다! 세상은 바로 여기서 뒤집어진다! 너와 내가 함께 이 세상을 뒤트는 것이다!”
장일소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확신이 들어차 있었다.
백천은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여기까지 닿을 리 없는 압력이 그를 밀어 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장일소…….’
그가 내뿜는 순수에 가까운 검은 광기가 이 절벽을 뒤덮고 있었다.
허도진인의 두 눈이 뒤흔들렸다.
‘저자가 대체……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지?’
천우맹이 사패련과 손을 잡고 구파일방을 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질 수 없다. 아니, 벌어져서는 안 된다. 사파와 정파가 힘을 합쳐 정파를 공격하는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허도진인이 가진 상식의 격렬한 반발과는 달리, 그의 이성은 이게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그의 흔들리는 눈이 청명을 쫓았다.
이곳에는 구파와 오대세가의 핵심이 모여 있다. 만약 이들이 이곳에서 전멸하기라도 한다면, 구파일방은 껍데기만 남게 된다.
소림과 무당이 없는 구파일방이, 그리고 남궁세가와 사천당가를 잃은 오대세가가 저들의 합공을 버텨 낼 수 있겠는가?
‘절대 안 되겠지.’
아니. 설령 버텨 낼 수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설사 구파일방이 기나긴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그곳에 소림과 무당, 남궁과 청성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청명의 결정에 따라 이 네 문파가 결국엔 강호의 역사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화산이 그들에게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순간 허도진인은 헉 숨을 들이켰다.
‘원한이 있다 해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도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인가? 지켜야 할 도리를 먼저 어긴 쪽은 구파일방이 먼저임에도?
“…….”
그 순간 허도진인은 자신들이 정파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며 화산에 얼마나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었는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알고 있다 여겼음에도 알지 못했던, 그 가혹하기 짝이 없는 잣대를 말이다.
그리하여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가 같은 입장이었다면 문파가 불타는 것을 방관했던 이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겠는가? 스스로의 도의를 지키기 위해서?
그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지켜보기만 해도 그만인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건 그저 과거에 구파일방이 저질렀던 일을 화산이 그대로 돌려주는 일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선택을 했다고 마냥 잘못되었다 비난할 수 있는가?
허도진인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화산신…….”
하지만 그보다 먼저, 잠자코 서서 장일소의 말을 듣던 청명이 입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