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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07화 (804/1,567)

807화. 다시 만나 더럽게 반갑다! (2)

“흐음.”

청명의 시선이 절벽 너머로 향한다.

장일소를 필두로 절벽을 점거하고 있는 이들을 두 눈으로 한차례 훑은 청명의 시선이 이번에는 아래로 향했다.

무당, 남궁, 청성, 그리고 소림까지.

네 문파 수장의 당황한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호오오오오?”

청명이 아주 흥미진진하다는 듯 씩 웃었다.

“이거, 이거 아주 재밌는 상황에 도착해 버렸는데?”

허도진인은 그런 청명을 올려다보며 두 눈을 부릅떴다.

‘화산?’

그들이 왜 여기에 있는가?

화산은 분명 강 건너에서 대기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또 제 마음대로……!’

하지만 이번만은 분노가 치밀기는커녕 반가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전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화산을 이렇게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순간은 다시는 없으리라 자신할 수 있었다.

“장문인! 화산이……!”

법계 역시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에 눈에 띄도록 화색이 돌고 있었다.

‘다른 문파라면 이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았겠지.’

천하의 어느 문파라도 감히 무당과 소림, 그리고 남궁과 함께 합의한 사항을 제 마음대로 깨 버릴 수는 없다. 설사 강 건너에서 대기하던 문파가 종남이라 해도, 대기하기로 약속을 했던 이상은 큰일이 터지기 전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하지만 이번에는 그 덕분에 살았다.

물론 화산이 절벽 위의 네 문파를 상대하는 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 아직 전력으로 따지자면 구파 중 가장 약한 곳에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 바로 화산이다.

그러나!

‘화약이 터지지 않도록 잠시 막아 주는 역할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네 문파가 절벽을 오를 때까지 시간을 아주 잠시만 벌어 주면 된다. 아주 잠시만.

저들이 네 문파의 말을 무시하고 멋대로 미리 움직인 덕분에 말도 안 되는 기회가 생겨났다. 하늘이 무너진 가운데 한 줄기 탈출할 구멍이 생긴 셈이다.

‘설마 화산에 구원을 받을 줄이야.’

이 기가 막힌 상황에 헛웃음을 흘린 허도는 이내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화산신룡!”

“응?”

청명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본디 이런 경우라면 청명을 물리고 현종을 불렀을 허도진인이지만, 지금은 체면을 차릴 만한 시간이 없었다.

청명과 눈이 마주치자 허도진인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이내 본론부터 꺼냈다.

“저들을 잠시! 아주 잠시만 막아 주게!”

“네?”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막으라고요?”

“그렇네! 저들이 화약에 불을 붙여 절벽을 폭파시키지 못하도록 시간을 끌어 주면 되네! 그럼 우리가 절벽을 타고 올라가 저들을 상대하겠네!”

“아, 화약.”

청명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법계가 재빨리 허도진인의 말을 받아 외쳤다.

“그렇다네, 화산신룡! 쉽진 않겠지만 잠시만 저들을 붙들고 시간을 끌어 주면 되네!”

분명 저들을 동시에 상대해 붙든다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의 화산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들이 어떻게든 막아 내려 했던 화산의 성장이 되레 그들이 살아날 길을 열어 주고 있다.

“아, 쟤들이랑 싸워서 시간을 끌라고요?”

“정확하네!”

단호한 허도진인의 대답을 들은 청명의 고개가 순간 옆으로 삐딱하게 꺾였다.

응? 왜 저러는…….

“저희가요?”

그 괴이한 대답에 법계가 당황하여 입을 열었다.

“그, 그렇지. 지금 여기 화산 말고 누가 있는가?”

“그러니까, 저희가요?”

“…….”

“왜요?”

법계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심지어 허도진인조차 이 말만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입을 쩌억 벌리고 넋이 나간 얼굴로 청명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뭐…….”

청명이 심드렁하게 귀를 후비적후비적 파 대더니 손끝을 훅 불었다.

“뒤에서 구경이나 하라고 해서 구경하러 온 건데 갑자기 싸우라고 하시면 저희도 당황스럽죠.”

“……이, 이보게, 화산신룡?”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괜히 안 끼어들고 잘 지켜볼게요. 눈치 없이 남의 공을 탐하는 그럼 파렴치한 문파는 아니니까요. 자…… 어디 보자. 읏차.”

청명이 몸을 돌리더니 뒤쪽에서 뭔가를 받아 확 펼쳤다.

법계의 두 눈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도, 돗자리?”

아니, 저게 뭔…….

청명은 말끔하게 펼친 돗자리 위에 털썩 앉더니 옆을 팡팡 두드렸다.

“사숙이랑 사형도 앉아. 명당 찾았으니 편안하게 구경하자!”

“…….”

“왜 안 앉아?”

백천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이 상황에 어떻게 앉냐, 이 미친놈아!’

‘제발 사람답게 좀 굴어라! 제발!’

평소 같으면 벌써 소리를 지르고 타박을 했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오검도 입조차 열지 못했다.

그들이 아무리 청명에게 단련된 이들이라고는 하지만, 아래로는 무당과 소림, 남궁의 장문인들이 있고, 건너편에는 신주오패의 수장들이 있는데 평소처럼 굴 수 있겠는가?

물론 청명이 놈이야 제정신일 때를 찾는 게, 정신이 나가 있을 때를 찾는 것보다 더 빠른 놈이지만, 설마 이런 상황에서까지 평소처럼 굴 줄이야.

화산의 제자들조차 당황하는 걸 본 청명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더니 태연한 얼굴로 아래를 빼꼼 내려다보며 물었다.

“안 싸워요?”

“…….”

“판 깔렸으니까 이제 싸우시면 될 것 같은데? 하던 거 하세요!”

그 순간 노기를 참지 못한 남궁황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 댔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그 우렁우렁한 고함에 청명이 눈살을 확 찌푸리더니 더 크게 소리 질렀다.

“아니, 왜 무섭게 소리를 지르고 그러세요? 시키는 대로 한다는데!”

“사파와 싸우는 일이 아니더냐! 아무리 서로 악감정이 있다고 해도 당연히 협력해야 하는 일이거늘! 이게 화산과 천우맹의 방식이더냐!”

“허…….”

청명이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남궁황을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협력하기 싫다고 했어요? 도와주겠다고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뒤에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으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

“그, 그건……!”

“시키는 대로 해도 뭐라 하고, 시키는 대로 안 해도 화내고!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고!”

남궁황이 입을 쩌억 벌렸다.

“그리고 이게 천우맹의 방식이냐고?”

청명은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아니죠. 이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방식이죠. 강 건너 불구경하기. 아니에요? 좋아하시잖아요.”

말을 마친 청명이 법계를 노려보았다. 법계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

당연히 협력해야 한다. 도와줄 수 있으면 당연히 도와야 한다.

이 말들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공허한 말인지 법계는 알고 있다. 화산이 천하에 도움을 청했을 때, 그들은 그 요청을 깔끔하게 무시했었으니까.

그 역사를 뻔히 알면서 당연하게 협력을 요구하다니, 이 얼마나 후안무치한 일인가?

“그런데 이제 와서 뭐? 협력? 협려어어어억?”

“…….”

“알아서 하시라고. 우린 구경이나 할 테니까.”

청명이 쐐기를 박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자 뒤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현영과 현상이 불안 가득한 얼굴로 현종을 돌아보았다.

“……장문인.”

“괘, 괜찮겠습니까?”

물론 청명의 말에 틀림이 없다. 당연히 화산이 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해도 장소와 때를 달리해야 하는 법. 이런 상황에서 구원을 들이미는 것은 좋게 보이지 않을 확률이 너무도 높다.

하지만 현종은 그런 저간의 사정을 모두 짐작하고 있음이 분명함에도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왜? 청명이의 말이 틀린 것이 있더냐?”

“마,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만…….”

“그럼 됐지 않느냐.”

“자, 장문인!”

현상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다른 화산의 제자들의 얼굴 역시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나서지 마라.”

“예?”

“나서지 말고 청명이에게 맡겨 두거라.”

평소에는 청명을 제일 못 미더워하고 구박하는 이가 현종이다. 하지만 정작 문파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이 오면, 현종은 태도를 완전히 달리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천하의 어떤 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냉정하게 생각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현종이 아는 한에서는 그게 가능한 이는 화산에서 오직 한 명뿐이다.

하지만 백천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처, 청명아.”

“응?”

장일소를 마주하면서도 침착함을 유지했던 백천의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도, 도와야지.”

“돕는다고?”

“그래! 아무리 그래도 돕긴 해야지.”

청명이 ‘아.’ 하는 얼굴로 백천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 그래도 좀 심하지 않아? 그래도 돕기는 해야…….”

“응?”

그런데 청명은 충격받았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되물었다. 생각한 반응과는 달라서 백천이 말끝을 흐리며 멍하니 보자 청명이 중얼거렸다.

“동룡이가 과격한 거야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파 놈들을 도와서 구파를 치자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물론 원한이 깊은 건 알겠지만, 사람이 할 짓이 있고 못 할 짓이 있는 거지.”

“뭐,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아! 당연히 구파를 도와서 사파를 쳐야지!”

“엥? 아, 그 소리였어?”

청명이 히죽 웃었다.

“글쎄. 그것도 문제네……. 집 안에서 쥐랑 바퀴벌레가 싸우고 있으면 어느 쪽을 도와야 할까?”

“…….”

“이왕이면 둘 다 뒈지는 쪽이 좋은데. 끄응. 싸움을 붙여 볼까?”

이 새끼는 미쳤다.

지금까지 빈번히 말해 온, 감탄사에 가까운 미쳤다가 아니라 진짜로 미쳤다.

“미친놈아! 당연히 사파를 도와야지!”

“사파를 돕는다고?”

“저, 정파! 정파! 빌어먹을, 내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백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평소에는 좀처럼 이런 말실수를 하지 않는 백천이지만, 지금은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뭐래? 사숙은 원한 있는 착한 놈이 좋아? 아니면 원한 없는 범죄자가 좋아?”

“응? 그건…….”

“거봐. 이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니까. 하……. 고민이 되네, 이거. 끄응…….”

“…….”

가장 슬픈 것은, 지금 청명이 놈이 하고 있는 말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똑똑히 듣고 있다는 점이었다.

“흐으음.”

그때.

잠자코 상황을 주시하던 장일소가 나지막이 콧소리를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지. 화산은 저들을 도울 이유가 없지.”

청명이 고개를 들어 장일소를 바라본다.

“화산은 도울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천우맹은 그럴 이유가 없지. 그렇지 않은가, 화산신룡?”

붉은 입술에 미소가 또렷하게 걸려 있었다. 청명은 그런 장일소를 마주 보며 웃었다.

“어이, 장일소.”

“말하시게, 화산신룡.”

“아가리 닥쳐.”

“…….”

장일소의 미끈한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그 히죽대는 낯짝을 보고 있으면 미간에 칼을 박아 버리고 싶으니까. 괜히 지껄여서 산통 다 깨지 말고 주둥아리 닫고 있으라고.”

청명이 으르렁대며 말했다.

그가 뿜어내는 살기가 넓은 분지를 넘어 장일소에게 똑똑히 닿았다.

“…….”

사패련은 물론이고, 아래에 있는 네 문파들마저도 아연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세상 누가 감히 장일소에게 저런 언행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

청명. 화산신룡이 아니고서야 아무도 저럴 수 없을 것이다.

아무도.

법계는 그 순간 깨달았다.

지금 나타난 이들은 구원자도 아니고, 적도 아니다.

그들은 구원의 손길을 내릴 수도 있고, 악의에 찬 칼날을 들이밀 수도 있는 이들.

다시 말하자면…… 이곳에 있는 여덟 개의 문파는 물론이고, 어쩌면 강호 전체의 운명이 화산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어째서 저자란 말인가! 어째서!’

그 화산의 입장을 결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저 화산신룡이다.

이 순간 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괴악한 이의 손바닥 안에 천하의 운명이 굴러다니고 있다.

‘어이하여.’

법계는 결국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귓가로 낄낄대는 청명의 웃음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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