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6화. 다시 만나 더럽게 반갑다! (1)
“……허산.”
“……예, 장문인.”
“제자들을 수습해라.”
“예!”
허도진인은 핏기가 가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피해?
아니, 피해는 의외로 그리 크지 않다. 압도적인 공격이었던 걸 감안한다면 십여 명의 부상자와 몇 명의 사상자는 그리 큰 피해도 아니다.
얼핏 보아 소림의 피해는 무당과 비슷했고, 남궁은 그보다 조금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 뒤쪽에 있었던 청성은 운이 좋게도 가장 피해가 적어 보였다.
그럼 이 피는 다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이…… 미친놈들이…….”
허도진인이 치미는 구역감과 노화를 이기지 못하고 욕설을 씹어뱉었다.
지금 땅을 적시고 있는 피는 대부분 흑룡채 수적들의 것이었다.
피아를 가리지 않는 눈 먼 공격은 다른 곳도 아닌 흑룡채의 수적들을 가장 많이 짓밟아 놓은 것이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광소를 터뜨리던 장일소가 이제야 진정이 조금 되었는지 입을 가리고 들썩였다. 잔여물처럼 남은 웃음기가 키득키득 모두의 귀를 긁었다.
그건 마치 승전보와도 같았다.
“하아아.”
마침내 웃음을 어느 정도 정리한 장일소가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합니다. 이거…… 워낙 근본 없는 놈이라 감정을 숨기는 법을 모르니 이해하시길.”
“…….”
허도진인은 문득 지금 본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더불어 큰 혼란을 느꼈다.
대체 저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저 괴이하다는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를.
“……화약을 썼소?”
그의 물음에 장일소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알아낸 허도진인을 칭찬해 주는 듯이.
“운 좋게 손에 넣었지요.”
“……그래서 화약을 쓰셨다?”
“보시다시피 효과가 좋습니다.”
허도진인이 이를 갈아붙였다.
“법도를 어기고 화약을 쓴 것은 이해하겠다. 너희는 애초에 그런 놈들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사파 놈들이라고 한들 짐승은 아닐 터! 동료가 아래에 있는데 어찌 이리 잔혹하게 눈 먼 공격을 해 댔단 말인가! 그게 너희의 방식인가!”
허도진인의 통렬한 목소리가 골짜기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그 분노가 담긴 외침도 장일소를 뒤흔들지 못했다.
“아아, 그렇소. 이게 우리의 방식이지.”
“네놈에게는 무인으로서의 자부심도 없는가?”
“……자부심?”
장일소가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그 고혹적이기까지 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온몸에 소름이 내달렸다.
“자부심?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붙어서 마지막엔 목을 내놓는 게 그대들의 자부심인가?”
“…….”
“다르지. 달라. 나의 자부심은 그런 게 아니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떤 짓을 해서라도,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반드시 이득을 본다. 반드시 적을 물리친다. 반드시! 반드시 살아남는다.”
잠깐 목소리를 높였던 장일소가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그게 내 자존심이오.”
“…….”
“이제 슬슬 지루하니 뻔한 이야기는 집어치우지. 허도, 이제 너희가 처한 상황을 이해했을 터. 설마 내가 준비한 게 이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허도진인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알고 있다.
무너진 건 겨우 한쪽 벽면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높고 넓은 절벽에서는 겨우 십분지 일이나 될까 싶은 크기였다.
그가 장일소라고 해도 이것만 준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초부터 그들을 이 안으로 몰아넣을 생각이었다면 절벽 전체에 화약을 둘렀겠지.
‘이 절벽이 통째로 무너지면?’
죽는다.
모두 죽는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몸을 건사할 수 있는 절정고수 몇십 명 정도는 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뿌드득.
허도진인의 얼굴에 힘줄이 꿈틀거렸다. 이 갈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새어 나왔다.
저만한 화약을 매설하고 이 절벽을 무너뜨릴 수 있게 준비하는 게 쉬운 일이었을 리가 없다.
매설 자체야 금세 할 수 있었다 치더라도, 지형을 확인하고 계획을 세우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 말은…….’
처음부터. 그들이 흑룡채를 공격하기로 한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그들이 장강으로 온 순간부터…….
‘아니다. 더 이전이겠지.’
장일소가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 내고 이곳으로 유인한 것이다. 이는 즉, 소림과 무당, 남궁과 청성이라는 중원을 대표하는 네 문파가 모두 장일소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났다는 의미다.
“아미타불.”
법계도 허도진인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침중한 목소리로 불호를 외었다.
“패군.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원하는 것?”
“그렇소. 원하는 게 있으니 우리의 처지를 알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니외까. 상황을 알아야 대화가 통하는 법이니…….”
하지만 법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궁황이 불같이 호통을 쳤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장로! 지금 저들과 협상이라도 하겠다는 거요? 저 더러운 사파 놈들과?”
“남궁가주!”
그러자 법계의 입에서도 벼락같은 호통이 터져 나왔다. 실로 대단한 그 위세에 남궁황은 순간 당황하여 입을 닫았다.
“잠시만 제게 맡겨 주십시오. 잠시면 됩니다!”
“……빌어먹을.”
결국 남궁황은 차가운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 법계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라고 왜 저들과 협의를 하고 싶겠는가? 이미 저들의 공격에 소림의 제자가 목숨을 잃었다.
자식처럼 아끼던 제자의 생때같은 목숨이 검도 아닌 돌덩어리에 짓눌려 끊어졌다. 장일소의 생살을 뜯어내고 씹어 삼켜도 이 분이 다 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이런 공격이 연이어 쏟아진다면 절대 버틸 수 없다. 설사 운이 좋아 모조리 전멸하지 않고 반수 정도만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이 네 문파는 향후 백 년간은 본래의 위세를 회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과거 마교와의 전쟁 때는 모두가 피해를 입었다. 그렇기에 전력을 잃었다고 해도 입지가 뒤흔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자칫하다가는 구파일방의 수장과 오대세가의 수장이 그 지위를 잃고 말석으로 격하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법계는 그런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방장도 아닌 장로가 아닌가.
그의 시선이 절벽을 훑었다.
보인다.
처음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몰랐지만, 이제는 똑똑히 보였다. 저 넓디넓은 절벽 곳곳에 시커먼 구멍이 뚫려 있다. 아마도 저 안에 폭약이 그득그득 들어차 있을 것이다.
뚫린 구멍 안으로 박힌 기다란 줄이 절벽 위로 이어져 있다. 저곳에 불을 붙이는 방식으로 보였다.
장일소를 바라보며, 법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어떤 조건을 들어주더라도, 일단은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설사 그게 굴욕적인 협의라 해도 말이다.
“다른 장문인들께서도 제 생각과 같으시겠지요?”
“그, 그렇습니다.”
벽현자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허도진인은 입을 꾹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그 드높은 자존심이 사파들과 협의를 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법계는 그 대답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말씀하시오, 패군! 원하는 게 무엇이오?”
무당이 나중에 딴말을 하더라도 지금은 일단 이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
그런데 장일소의 입에서 나온 말은 법계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하하하. 원하는 것이라니.”
장일소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세상 물정 모르고 산골짜기에 틀어박혀 제가 왕입네 하는 것들이라 그런지, 잘도 지껄여 대는구나. 원하는 것?”
“…….”
“원하는 것? 원하는 것이야 당연히 있지.”
장일소가 과장되게 미소를 짓고 넓은 소맷자락을 보이듯 팔을 벌리며 말했다.
“사패련의 영역을 침범하고 공격한 이들에게 받을 것이라고는 그 목숨뿐이다! 내가 원하는 것? 당연히 너희의 몰살이지!”
“…….”
“착각하지 마라, 중놈아. 내가 너희를 단숨에 죽여 없애지 않은 것은 너희가 저지른 죄악이 그렇게 쉽게 죽기에는 너무도 크기 때문이란다.”
법계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너희가 왜 죽는지! 누구에게 죽는지! 어떻게 죽는지 똑똑히 알고 죽어 가라! 너희의 죽음으로 천하에 사패련이 등장했음을 알리겠다. 그 제물로는 아주 충분하겠구나! 하하하하하하하핫! 단 한 놈도! 단 한 놈도 살려 두지 않겠다! 단 한 놈도!”
순간 법계의 두 눈에 절망이 어렸다.
‘어찌 저런 광인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저건 미쳤다는 말로도 설명이 불가능했다.
으드드득!
반면 절망한 법계와는 달리 허도진인은 노기를 숨기지 못하고 이를 갈아붙였다.
‘무당의 명성이 내 대에 끝날 수도 있겠구나.’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둔 허도진인의 손끝이 떨려 왔다.
“너희의 피로써 세상은 알게 될 것이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지배하던 세상은 종말을 고했다는 사실을! 이제 이 중원은 사패련의 이름 아래 복속될 것이다!”
장일소의 손이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 나긋나긋한 손가락 끝에 짙은 흥분이 어려 있었다.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만금대부가 비릿하게 웃었다.
“이런 날이 이리 빨리 올 줄이야.”
흑룡왕 역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장강에서 죽어 간 형제들의 목숨 값을 받겠다!”
지금 절벽 아래에는 네 문파뿐만 아니라 흑룡채의 수적들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흑룡왕은 애초에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저 네 문파가 힘을 잃는다면 강북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지.”
천면수사의 얼굴에도 흥분감이 여과 없이 떠올라 있다.
입술을 깨문 채 그 모습을 보던 허도진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허산.”
“……예, 장문인.”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속삭임이었다.
“내가 신호를 보내면 제자들을 이끌고 이곳을 빠져나가라.”
“……장문인. 차라리 저 폭약을 제거해 보는 것이…….”
“그건 소림과 남궁이 할 것이다.”
허산자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과연 법계와 남궁황의 시선이 절벽에 나 있는 구멍들을 훑고 있었다.
“저들에게 맡겨라. 제자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한다.”
“…….”
허산자는 차마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씹었다.
지금 허도진인의 명은, 소림과 남궁을 방패막이 삼아 무당만은 살아 나가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도무지 협의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허산자는 차마 그 명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허산자가 답하자 허도진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사패련…….’
무당의 실책을 놓고 따지자면 결국 잘못은 그에게 있다.
적을 쉬이 본 것. 공명심에 이끌려 뒤를 돌아보지 않은 것. 그 모든 것이 맞물려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 조금만 더 침착했더라면 이런 험한 꼴을 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모든 오욕은 그가 지면 된다. 무당의 제자들만큼은 반드시 이곳에서 살아서 나가야 한다. 반드시!
‘소림과 남궁도 만만한 자들이 아니니, 전격적으로 움직인다면 반 정도의 폭약은 제거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저 심지를 끊어 내기만 하면 되니까.
적이 그 상황을 두고 보지 않고 응전해 올 테니 모두 제거하기는 불가능할 테고, 기껏해야 반이다.
‘그럼 살아남은 이들과 절벽 위의 사파 놈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터.’
양쪽 모두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각오해야 한다.
‘그럼 우선은…….’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계산을 하고 있는데, 장일소가 장포 자락을 휘날리며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쥐새끼들이 머리를 굴리는구나. 그 너절한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 봐야 빠져나갈 구멍은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죽어라!”
허도진인의 시선이 급하게 위로 향했다.
‘아, 안 돼!’
“허산! 당장 제자들을 이끌고……!”
허도진인이 비명 같은 명령을 내뱉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근데 나는 왜 저 새끼 얼굴만 보면 속이 뒤틀리지?”
내력을 실은 높은 목소리가 절벽 위에 카랑카랑 선명하게 울렸다.
높이 들려 있던 장일소의 천천히 손이 내려왔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건너편이었다.
콰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검은 흑의를 입은 사파인들 몇몇이 비명을 지르며 절벽 아래로 튕겨 나와 추락했다.
사패련이 차지한 절벽의 건너편을 지키던 이들이었다.
저벅. 저벅.
더는 지키는 이가 없어진 절벽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화산신룡.”
청명이었다.
“사형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아. 그건 동감이지.”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
“…….”
그 모습을 본 장일소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걷혔다.
“어이.”
“…….”
“다시 만나 더럽게 반갑다!”
청명이 씩 웃었다. 사악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