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5화. 야! 거기 남는 술 좀 챙겨라! (5)
“……사패련?”
남궁황이 굳은 얼굴로 입을 뗐다.
“사패련이라니?”
장일소는 느긋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없었던 이름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누구도 모를 수 없는 이름이 될 것입니다. 장강수로십팔채, 흑귀보, 하오문, 그리고 만인방이 하나의 이름 아래 모이게 될 테니까.”
“……사파 놈들이 연합을 했다고?”
백 년 전 마교와의 전쟁 당시, 사파도 연합을 꾸리긴 했다. 하지만 그건 생존을 위한 일시적인 동맹이었고 그마저도 완벽하지 않은 허울뿐이었다.
그렇게나 서로 반목하던 사파들이 한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 역시 크게 이상하게 여길 이가 없다.
‘하지만 저 네 사람이 한곳에 나란히 선 광경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꿈같은 일이 하필이면 지금 그들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흥!”
남궁황이 과하게 코웃음을 쳤다. 결코 저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듯.
“사파의 잡것들이 뭉쳤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란 말이더냐!”
“과연.”
장일소가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고매한 명문가의 가주께서 보시기에는 그리 대단치 않은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희 나름은 큰 결심을 하고 모인 것이니 축하라도 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
남궁황은 대답 없이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음.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시는군요. 아쉽네요.”
하지만 그 눈빛은 장일소를 조금도 움츠러들게 만들지 못했다.
말투 하나, 나긋한 손짓 하나에도 여유가 묻어난다.
그런 장일소를 보고 있으니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허도진인이 슬쩍 뒤쪽을 살폈다.
‘좁다.’
저 좁은 골짜기를 타고 들어올 때만 해도, 이곳은 방어를 위한 천혜의 요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이 이리되고 보니, 진입보다 오히려 빠져나가는 것이 더욱 어려워 보였다.
‘배끼리 서로 얽혀 지옥이 펼쳐지겠지.’
그렇다고 느긋하게 순서를 기다릴 수 있을 리 없다. 적들이 그들의 등을 노리고 올 테니까.
‘퇴로는 애초에 의미가 없었구나.’
그러니 설사 그들이 퇴로를 확보하고 이곳에 진입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퇴로는 사용할 수 있을 때나 의미가 있는 법이니까.
상황을 파악한 허도진인은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사패련이라……. 무엇이든 연합은 좋은 일이지. 축하는 내가 드려도 되겠소?”
장일소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무당의 장문인께 받는 축하라니. 더없는 영광입니다.”
“기쁘다니 다행이오. 하지만 말이오, 패군.”
허도진인의 눈빛이 장일소를 꿰뚫을 듯 꽂혔다.
“축하를 받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군. 진정으로 축하를 받고 싶다면 그곳에 서서 내려다볼 게 아니라 아래로 내려와야 하지 않겠소?”
“하하하하.”
장일소가 즐겁게 웃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요. 그렇지. 맞는 말입니다.”
“…….”
“그게 도리에 맞는 일이지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저는 예의라고는 모르는 사파의 버러지인걸요. 이제 와 예를 차리는 것도 우습지 않겠습니까?”
“설마 사패련의 련주라는 자가 겁을 집어먹은 건 아니겠지?”
“하하하하. 뻔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당연히 겁이 나지요.”
장일소의 요사스런 입꼬리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소림, 무당, 남궁에 청성까지. 이만한 문파를 상대하는데 겁먹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지금도 오금이 떨려 서 있기가 힘이 듭니다. 하하하하하핫!”
허도진인의 낯이 싸늘하게 식었다.
‘저 작자가…….’
자존심을 긁어 보려 던진 말이었건만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보통 높은 직위에 처음 오른 이는 본연의 성향과 관계없이 우선적으로 체면을 고려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장일소에게는 그런 기색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허도진인은 잘 알고 있다. 이런 자가 가장 상대하기 까다롭고 어렵다는 것을.
“그럼…….”
그는 차가운 눈으로 장일소를 쏘아보았다.
“인사나 하러 온 모양이로군.”
말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그건 그의 내심이 점점 흔들리고 초조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인사라…….”
장일소는 흰 손으로 턱을 느리게 매만졌다.
“허락도 없이 남의 영역을 침범하고 칼을 휘두른 분들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지 않습니까?”
“수적을 소탕하는 데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처음 듣는군.”
“하하. 그렇지요.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지요. 예, 그랬습니다. 지금까지는.”
허도진인을 내려다보는 장일소의 기름한 눈에 오만한 빛이 어렸다.
“하지만 이제는 허락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장일소에게 말이지요.”
으득.
허도진인이 이를 갈아붙였다.
그가 누구에게 이런 말을 들어 보았겠는가?
“허락을 받으라?”
그는 허리춤의 검을 꽉 움켜잡았다.
“그러지 못하겠다면?”
“하하하하. 당연한 말을 물으시는군요.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남궁황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우렁우렁 고함을 내질렀다.
“애송이 놈이 입만 살았구나!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어디 내려와 내 검을 받아 보아라!”
“흐으음.”
장일소가 묘한 표정으로 모두를 둘러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여러분들께서는 지금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더니 이내 그럴 만도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지요. 소림과 무당, 남궁과 청성. 그 네 문파의 힘이라면 분명 세상 어떤 세력과 맞부딪친다 하더라도 결코 밀리지 않을 테니까요. 더구나 이 높은 절벽은 위치의 이점을 논하기에도 애매한 면이 있습니다.”
빠져나갈 수는 없다.
하지만 공격받지도 않는다.
화살을 쏘아 댄다고 해도 돌을 굴려 댄다고 해도, 심지어 끓는 기름을 퍼붓는다고 해도 절정고수인 그들이 큰 피해를 입을 리는 없다.
‘게다가 이곳에는 흑룡채의 잔당들도 있다.’
꽤 많은 이들이 죽었지만, 아직 삼분지 이 이상이 살아 있다. 그들을 무시하고 광범위한 공격을 퍼붓는 것은 아무리 사파라 해도 선택할 수 없는 일일 터.
결국 저들이 공격하기 위해서는 절벽을 내려와야 한다는 의미다.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아무리 신주오패 중 네 곳이라고 해도 상대해 볼 만하다. 저들도 급히 오느라 모든 전력을 끌고 오지는 못했을 테니까.
장일소 역시 이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웃음을 머금은 장일소의 흰 얼굴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건 이 장일소를 너무 쉽게 보고 하는 생각이지. 아무래도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 같군.”
순간 허도진인은 가슴이 싸늘히 식었다.
장일소가 가볍게 손가락을 튀겼다.
따악.
골짜기 안으로 날카롭게 소리가 퍼져 나갔다.
‘……뭐지?’
허도진인은 긴장 어린 눈으로 절벽 위를 바라보았다. 분명 장일소가 뭔가 신호를 보낸 것이 분명한데, 딱히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정적이 흘렀다.
‘허세?’
아니, 그럴 리는…….
바로 그때였다.
우르릉.
“…….”
……무언가 심장을 저미는 듯 공포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쥐 죽은 것처럼 적막이 흐르는 이 골짜기 안에선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뭘…….”
콰아아아아아아앙!
그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내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저들이 점하고 있는 절벽의 한쪽 면이 거대한 폭발과 함께 터져 버린 것이다. 뿌연 흙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그 파편들이 폭죽처럼 쏘아졌다.
쿠르르르릉!
쿠르르르르릉! 쿠르르릉!
“저…….”
천하의 허도진인도 입을 쩍 벌리고 경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폭발이 일어난 절벽의 한쪽 면이 천천히 떨어져 나와 기우뚱 기울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렸다.
쿠르르르르릉!
어마어마한 크기의 암석은 네 문파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점점 속도를 더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으, 으……. 으아아아아아아악!”
“피해라아아아아아아아아!”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정예 중의 정예들이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 달아났다.
동료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조차 걸 수 있을 이들이다. 하지만 머리 위로 당장에 떨어지는 저 어마어마한 암석을 맞닥뜨린 순간 그들의 손은 본능적으로 제 앞길을 막는 사형제를 잡아끌고 마구잡이로 밀쳤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이치와 상식을 초월하는 그 무언가였다. 천하의 허도진인조차 그 광경에 눌려 입만 멍하니 벌릴 뿐,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앗!”
의외로 먼저 움직인 것은 남궁황이었다.
그의 검에서 가공할 검강이 뿜어져 나왔다. 조금 전 배를 통째로 격파했던 검강보다 배 이상 커다랗고 위압적이었다. 그는 목이 터질 듯 사자후를 질러 대며 검을 휘둘렀다.
콰가가가가가가각!
그가 발출한 검강이 떨어지는 암석에 틀어박혔다. 실로 가공할 검강이었고, 실제로 무려 다섯 자에 가까운 상흔을 남겼지만 암석은 부서지지도 갈라지지도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아!”
남궁황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온 내력을 모조리 끌어내 검강을 뿜었다.
“아미타불!”
법계 역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았는지 거친 목소리로 불호를 내뱉으며 권을 날렸다.
막대한 황금빛 권력이 남궁황의 검강에 더해져 암석에 박혔다.
콰르르릉!
마침내 커다란 전각만 한 바위가 두 동강 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뭣들 하느냐! 부숴라! 부숴어어어!”
법계의 처절하기까지 한 비명이 쩌렁쩌렁 울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들이 저마다 내력을 뽑아내며 머리 위로 장력과 검기를 날려 댔다.
“흐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악!”
거의 발악에 가까운 광경이었다.
형형색색의 경기가 낙하하는 암석을 때리고 가르며 분쇄했다. 암석이 점차 쪼개지고 갈라지며 으스러졌다.
“더! 더! 있는 힘을 모두 짜내라! 아니면 모두 죽는다! 어서어어어어어!”
“흐아아아아악!”
두 눈에 핏발을 세운 구파일방의 정예들이 있는 힘을 다해 공격을 해 댔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크기의 암석을 없앤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커다란 전각만 했던 암석이 이리저리 부서지고 갈라져 수백 개의 사람만 한 크기의 돌덩이로 화해 바닥으로 쏟아졌다.
쾅! 콰아앙! 콰아아앙! 쾅!
까마득한 곳에서부터 떨어진 바위들이 단단한 바닥을 진흙처럼 으깨며 박혀 들었다.
콰아아앙! 콰아앙!
연이은 낙석이 한참을 이어졌다.
세상이 들썩이고, 절벽이 통째로 비명을 질러 댔다.
인간의 비명과 땅의 비명이 뒤섞여 울리는 이곳을 지옥이라는 말이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쿵! 쿠우웅!
마침내 마지막 바위가 땅에 떨어졌다.
흙먼지가 사위를 자욱하게 메웠다.
마치 이 끔찍한 광경을 세상에 보여 주지 않겠다는 듯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피어난 흙먼지를 걷어 올리고서야 처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 드러났다.
허도진인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눈앞에 드러난 참상을 직시했다.
“끄으으…….”
“내, 내 다리가……. 내……. 으으으…….”
바위에 깔린 이들.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진 이들.
흘러나온 피를 피어오른 먼지가 뒤덮고, 그 위로 다시 새로운 피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허도진인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절벽 위로 돌렸다.
“하하하하하핫!”
“…….”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정말로 미쳐 버린 듯한 장일소의 광소와 장신구 짤랑이는 소리가 신음 소리로 가득한 골짜기 안을 무참히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