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4화. 야! 거기 남는 술 좀 챙겨라! (4)
“이, 이건…….”
허도진인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도인이고, 타인에게 이런 얼굴을 보이는 이가 아니었다. 그의 감정이 얼굴 위에 떠오른다는 건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단 뜻이었다.
타앗!
허도진인이 두말할 것도 없다는 듯 밖으로 뛰쳐나간다.
상황의 심각함을 이해한 다른 장문인들 역시 재빨리 그런 그의 뒤를 따랐다.
전장의 풍경이 변했다. 이미 싸움은 멈춰 있었다. 조금 전까지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던 것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허도진인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분지 안에 있는 모두가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벽 위.
까마득하게 높아 목이 꺾일 것만 같은 그곳에서 한 사내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신을 휘감은 흑의.
배꼽까지 내려온 거칠고 긴 검은 수염.
그리고 대춧빛으로 붉은 얼굴과 사자갈기 같은 머리.
이 특이한 외양과 더불어 가슴에 검은 흑룡의 형상까지 새겨져 있다.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핫! 정파의 잡것들이 뭘 얻어 처먹겠다고 이 장강까지 왔느냐!”
남궁황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목소리에 실린 어마어마한 내력이 남궁황의 피부를 저며 내는 듯했다.
‘흑룡왕이 이 정도였나?’
그 명성이야 익히 들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사파 놈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형제, 심지어 피를 나눈 형제들과도 경쟁을 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정파에 명문에 비하면 사파는 성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중이떠중이를 모아 놓은 잡스러운 집단에 불과하다.
그런 곳의 수장이라 해 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냐 했거늘…….
직접 눈으로 본 흑룡왕은 그런 남궁황의 생각을 단숨에 깨어 놓았다.
전신에 패도가 흐르는 것만 같다. 등골이 절로 오싹오싹해질 정도로.
“감히 장강을 침범한 걸로도 모자라 이 흑룡채까지 기어들어 오다니. 정파의 잡것들이 겁을 상실했구나!”
듣고 있던 남궁황이 크게 소리쳤다.
“겁쟁이 놈이 그 먼 곳에 숨어서 잘도 지껄이는구나. 수하들을 버리고 꽁무니를 뺀 주제에 할 말은 남아 있다는 것이냐!”
남궁황의 말은 이치에는 맞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동요하고 있던 남궁세가의 무사들을 진정시키는 데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꽁무니를 뺐다…….”
흑룡왕은 남궁황의 말을 되뇌더니 조소했다.
“지껄이고 싶은 대로 지껄여라. 어차피 곧 무덤에 들어갈 놈의 말 따위 간지럽지도 않으니까.”
“이놈이!”
그때 법계가 입을 연다.
“아미타불. 소승은 소림의 법계라고 하오.”
“흥! 방장도 아닌 장로 따위가 감히 나와 말을 섞으려 들다니! 소림의 오만함이 하늘에 닿았구나!”
흑룡왕이 대놓고 조롱하니 법계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시주. 시주의 주장은 잘 들었으나, 이 상황에서 우릴 어쩌겠다는 것이오? 시주 혼자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을 텐데?”
“못 할 것도 없지!”
흑룡왕이 크게 웃는다.
“너희 같은 조무래기를 상대하는 데 다른 이가 굳이 필요하겠느냐? 내 도만 있으면 충분하다.”
흑룡왕이 허리춤에 찬 도를 잡아들었다. 손잡이 부분이 철컥거리며 길어지더니 이내 기다란 언월도(偃月刀)가 만들어졌다.
파아아앗!
허공에서 도를 한차례 떨친 흑룡왕은 오만하게 웃었다.
“누가 나를 상대하겠느냐?”
남궁황이 고함을 지르기 전에 법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아미타불. 원한다면 이 법계가 상대해 드릴 수도 있소.”
“너 따위가? 으하하하하하하핫!”
흑룡왕의 광소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우스워 참을 수 없다는 듯 광소를 터뜨린 흑룡왕이 비웃음을 가득 담은 눈으로 법계를 바라본다.
“조무래기는 꺼져라! 어른들이 말하는 데 끼는 거 아니다. 나를 상대하고 싶다면 방장이라도 데리고 오거라!”
법계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무려 소림의 일장로인 그가 대체 어디에서 이런 취급을 받아 보았겠는가?
“아미타불. 아미타불.”
법계는 연신 불호를 외어 들끓는 마음을 달래려 애썼다.
“격이 맞는 상대를 원한다면 내가 상대해 주마. 설마 이 제왕검 남궁황마저도 상대로는 부족하다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제왕검이라…….”
흑룡왕이 입꼬리를 뒤틀었다.
“남궁세가라는 울타리 안에서 편하게 풀이나 뜯던 놈들이 범인 척 구는구나!”
“뭐라?”
“왜 정곡이라도 찔렸느냐?”
흑룡왕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모두를 노려보았다.
“물론 너희 따위는 나 혼자서도 쓸어 버릴 수 있다. 하지만……. 너희가 보기에 나 혼자로 부족하다면 그 기대를 채워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뭐라?”
그때 흑룡왕의 옆쪽으로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확실히 그건 나쁘지 않지.”
“구파일방의 고매하신 양반들이라면 우리만으로는 아쉬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모습을 드러낸 그들을 보며 허도진인이 얼굴을 굳혔다.
‘저들은…….’
물론 두 눈으로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다. 천하에 저 흑룡왕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이는 정말 몇 없을 테니까. 그리고 하필이면 저들 중 하나의 용모가 그 자격을 갖춘 이와 맞아떨어진다.
“……만금…대부.”
“영광이로군. 천하의 허도진인이 나를 알아보다니.”
흑룡왕의 좌측에 선 만금대부가 싸늘하게 웃으며 허도진인을 내려다보았다.
“허도진인의 목 하나만 가져가도 남는 장사지. 그러니 오지 않을 도리가 있나? 이만큼 이득을 볼 기회는 쉽게 오지 않지.”
그에 반해 흑룡왕의 우측에 선 이는 딱히 특징이 없는 평범한 얼굴의 사내였다.
하지만 허도진인은 알 수 있었다. 그가 확인한 이가 정말 만금대부라면 그 건너편에 설 만한 이는 단 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그 외양으로는 결코 정체를 알아낼 수 없는 사람.
“처, 천면수사.”
“천면수사? 저자가?”
벽현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만금대부와 천면수사.
각기 흑귀보와 하오문을 이끄는 신주오패의 수장들이다.
그 말은 지금 이곳에 신주오패 중 세 곳이 모여 있단 말이 된다.
‘신주오패 중 세 곳이라고?’
실로 강대한 전력이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중 세 곳이 모여 있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전력이다.
“자, 장문인!”
벽현자가 자신도 모르게 허도진인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허도진인 역시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양으로 이만 사리물고 있었다.
‘어째서 저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인가?’
이런 일이 벌어질 리 없다. 그래야 했다.
이곳에 모인 네 문파가 아무 생각 없이 이곳까지 밀고 들어온 게 아니다. 장강수로채와 전쟁을 벌인 이유는 하나다.
사파는 결코 뭉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마교와의 전쟁 당시에도 사파는 끝까지 서로 반목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제 이득을 취했을 뿐, 서로 등을 찔러 대고 이를 갈며 싸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파는 제 목에 마교의 칼이 박히는 순간까지도 서로를 공격하고 으르렁대지 않았던가?
장강수로채가 정파의 공격을 받는다면, 도우러 오는 게 아니라 수로채의 영향력이 사라진 구역을 뜯어먹기 위해 승냥이처럼 달려들어야 진정 본성대로의 사파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순간.
절벽의 위쪽에서 한 무리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끝에 선 그들은 차갑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분지 아래에 있는 이들을 노려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절정에 이른 고수들이다.
‘수하들까지 끌고 왔구나.’
머리 위가 저만한 고수들에게 점령당했다는 것을 실감하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압박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건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압박이다.
정말로 허도진인을 숨 막히게 하는 것은, 저곳에 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상황 그 자체다. 누군가 그들을 이 독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누구냐…….”
결코 뒤섞일 수 없는 이들을 이렇게 모이게끔 한 이가 있을 것이다.
“누구……!”
허도진인이 고함을 내지르려는 바로 그때였다.
짤랑.
귓가에 아주 작은 소리가 스쳤다.
마치 여인의 장신구들이 마주치는 듯한 맑은 쇳소리.
평범한 이들은 이 거리에서는 들을 수조차 없을, 허도진인마저 귀를 기울여야 겨우 잡아 낼 수 있는 작은 소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허도진인의 귀에는 그 작은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느껴졌다.
“흐음.”
살짝 높은 콧소리가 절벽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 순간 허도진인은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눈을 부릅뜬 그는 절벽 위를 잡아먹을 듯 응시했다.
이윽고.
한 사내가 절벽 위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허도진인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보았다.
지금 모습을 드러낸 사내에게 흑룡왕과 만금대부, 그리고 천면수사가 길을 터 주는 광경을 말이다.
천하의 누가 저들을 스스로 물러나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저벅. 저벅.
마침내 절벽 끝에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이의 모습은 그 색이 지나치리만큼 뚜렷했다.
검은 용이 새겨진 핏빛 적포.
분칠을 해 마치 여인의 그것처럼 보이는 새하얀 피부.
흑단 같은 머리 위에 올라 있는 새하얀 면류관.
그리고 몸과 양팔에 둘러진, 수도 없는 장신구들.
허도진인은 이자를 알고 있다. 아니, 알 수밖에 없다.
천하에 까마득하게 많은 사람이 산다고는 하지만, 이런 행색을 한 남자는 흔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감히 저곳에 설 수 있는 자는 더더욱.
있다면 오직 하나.
“……패군.”
패군 장일소.
그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분지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
다르다.
흑룡왕이 흘리는 패도는 이곳의 전투를 멈추게 할 만큼 강력했다.
만금대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냉기는 혹한의 추위를 연상케 했으며, 너무도 평범해 되레 이질적인 천면수사의 존재 역시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자, 패군 장일소는 다르다.
딱히 대단한 기운을 흘린 것도 아니고, 그는 그저 천천히 걸어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것이 전부다.
그럼에도 기도를 잡힌 것처럼 숨이 막혔다.
무인으로서의 강함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존재감 자체가 다른 이들과는 격이 다르다. 저 요란하고 우스운 복장마저도 장일소를 우스꽝스레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범접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잖은가?
“처음 뵙겠소이다. 강호 동도 여러분.”
장일소가 양손을 모아 앞으로 천천히 내민다. 그의 허리 역시 자연스레 굽혀졌다.
흔하디흔한 포권이다. 강호를 살아가는 이에게는 그저 숨 쉬듯 익숙한 예의이다.
하지만 그 익숙한 몸짓에도 이곳의 모두는 몸에 소름이 내달리고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그 흔한 인사치레에도 말이다.
“본인은 만인방의 방주, 그리고 사패련의 련주인 장일소라 하외다.”
장일소의 화사한 얼굴에 새하얀 미소가 걸렸다.
그 순간 허도진인은 볼 수 있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장일소의 두 눈에 조금의 웃음기도 담겨 있지 않았단 것을.
‘뱀? 아니……. 저건 이무기다.’
독니를 품은 이무기가 이 커다란 절벽에 커다랗게 똬리를 틀고 함정에 빠진 먹잇감들을 천천히 굽어보고 있었다.
그 싸늘하고 섬뜩한 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