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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03화 (800/1,567)

803화. 야! 거기 남는 술 좀 챙겨라! (3)

“장로님!”

“알고 있다!”

법계가 답지 않게 언성을 높였다.

소림은 제자들에게 언제나 부동심을 유지하라는 가르침을 내리는 문파다. 법계 역시 부동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를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법계의 오랜 수양을 순식간에 무위로 돌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피가 튀고 비명이 난무한다.

조금 전까지 숨이 붙어 있던 이들이 순식간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널브러진다.

“장로님! 가야 합니다!”

“하선하라!”

법계가 고함을 내지르며 단숨에 배에서 뛰어올라 뭍에 내려섰다.

진득한 피비린내가 콧속으로 훅 밀고 들어왔다. 거기에 매캐한 화약 냄새,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향들까지 제멋대로 뒤섞여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법계뿐만 아니라 다른 소림승들의 얼굴도 하나같이 상기되어 있었다.

“서둘러라! 소림이 구경만 하다 돌아갔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예!”

법계가 손짓하자 소림승들이 일제히 앞으로 박차고 나갔다. 황포를 걸친 소림승들이 일제히 경공을 펼치며 헤일처럼 밀어닥치는 광경은 경탄과 공포를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단 한 사람.

혜연만은 그 대열에 동참하지 못했다.

앞서 나아가는 사형제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야.’

이건 아니다.

적어도 소림은 이래서는 안 된다. 그가 아는 소림은 결코 이렇지 않다.

적과 용감히 맞서 싸운다?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싸움에도 올곧은 함의(含意)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맹렬히 달려드는 소림승들에겐 양민들을 지킨다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다른 문파에 뒤질 수 없다는 공명심만이 가득할 뿐.

‘어째서 이리 헛헛하단 말인가?’

혜연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한 사람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언제나 명분이고 나발이고 이득이 전부라고 외치고, 다른 문파가 명성을 날리는 꼴은 죽어도 못 본다고 고함을 쳐 대는 사람.

하지만 결국 그 행동의 마지막에는 모두를 이롭게 만드는 사람.

‘너무도 다르구나.’

청명은 득(得)을 논하지만 정의를 행하고, 소림은 의(義)를 논하지만, 이득을 쫓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 말을 청명이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겠지만, 적어도 혜연이 보기에는 그랬다.

그 차이가 혜연의 발을 무겁게 만들었다.

소림에서 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에 비한다면, 그가 화산에 머물렀던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안에 화산이 너무도 크게 자리했다.

“아미타불.”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보일 리가 없다. 눈앞에 놓인 건 드높은 절벽과 골짜기를 따라 진입하고 있는 청성의 배뿐이다.

언제나 앞에서 달려 나가던 이가 보이지 않고, 그의 등 뒤를 받쳐 주던 이들도 보이지 않는다.

‘생각하지 말자.’

혜연이 작게 불호를 외었다.

설령 이 상황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해도, 사형제들만 싸우게 둘 순 없었다.

“아미타불!”

마음속 미혹을 억지로 떨쳐 낸 혜연은 앞을 향해 거칠게 달려 나갔다.

“큭! 빌어먹을!”

“이 더러운 놈들! 넷이나 몰려오다니! 그러고도 너희가 정파냐!”

“무, 물러나지 마라!”

전장의 향방은 순식간에 정해졌다.

물론 이곳에 각 문파의 모든 전력이 온 것은 아니다. 문파에 남은 이들의 수도 꽤 되는 데다가, 모두가 배에 탈 수는 없었기에 데려오지 않은 인원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흑룡채 역시 마찬가지다.

장강수로십팔채의 모든 전력을 모아야 이곳에 있는 문파 하나와 비견된다. 아무리 흑룡채가 장강수로십팔채의 총 전력의 절반쯤을 차지한다고 해도, 그 전력으로는 이곳에 온 문파 중 하나를 상대하는 것도 버겁다.

그런데 지금은 무려 네 문파가 연합을 펼치고 있지 않은가?

애초부터 흑룡채에겐 승산이 주어지지 않은 싸움이었다.

우우우우웅!

파아아아아앗!

웅혼한 남궁세가의 검과 부드러움 속에 진중함을 담은 무당의 검이 경쟁하듯 악착같이 수적들을 쓰러뜨려 갔다.

“아미타불!”

그리고 소림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쿠우웅!

그들의 주먹에 어린 금빛의 경기가 달려드는 가볍게도 날려 버리고 튕겨 냈다.

소림은 단순히 권만을 쓰는 문파는 아니다. 소림승들이라면 모두가 십팔반에 웬만큼은 정통하다. 그럼에도 그들이 권을 고집하는 건, 상대를 살상하지 않고 제압하는 데에 권법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투우웅!

전방의 수적을 쳐 낸 법계가 사자후를 터뜨렸다.

“중생을 굽어살피는 것만이 불자의 길은 아니다! 마라를 제거하여 중생의 길을 열어 주는 것 역시 불자의 역할! 손끝에 자비를 담지 마라!”

“예!”

푸르고, 희고, 노란 군세들이 검은 흑룡채의 수적들을 게걸스레 먹어치웠다.

‘흑룡왕은?’

‘적의 수괴는 어디 있는가?’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어 버리니 수적을 얼마나 더 처리했는가는 더 이상 전과가 되지 못할 듯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장강수로채의 수장인 흑룡왕을 누가 쓰러뜨리느냐.

“밀고 들어가라!”

“베어 내라!”

흑룡왕은 당연히 저 전각 안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이곳을 뚫고 안에 도착하느냐에 따라 판가름이 날 터.

‘내가 먼저다!’

남궁황이 두 눈에 불을 켰다.

흑룡왕은 분명 천하를 오시하는 강자이고, 저 수많은 사파의 악적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인 명성을 떨치는 이다.

하지만 그 역시 제왕검 남궁황.

흑룡왕을 상대로 패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곳에 그와 같은 생각인 이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선봉은 순순히 양보했지만, 허도진인도 법계도 절대 흑룡왕을 양보할 생각은 없을 것이다.

‘죽 쒀서 개 줄 수는 없지!’

저들이 흑룡왕의 목을 베어 버린다면, 선봉에 서서 길을 뚫어 낸 남궁세가의 전과가 빛이 바랠 거라는 사실은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콰아아아아앙!

남궁황이 휘두른 검기가 폭탄처럼 터져 나가며 전방을 휩쓸었다.

“가주님! 힘을 아끼십시오!”

“길은 저희가 뚫겠습니다!”

남궁도위가 앞쪽으로 치고 나간다. 남궁황이 그 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마음이야 급하지만, 흑룡왕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이곳에서 내력을 낭비한다면 그가 흑룡왕에게 패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남궁황이 급한 마음을 억누르고 옆을 돌아보았다.

우우우우웅!

검 끝에 희고 검은 내력을 휘감은 허도진인이 검을 부드럽게 휘둘렀다.

실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부드럽다와 쾌속하다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하지만 저 검에는 그 두 가지가 분명히 양립하고 있었다.

검은 분명 느릿하게, 천천히 휘둘러진 듯했는데 순식간에 적의 빈틈을 파고 들어가 급소를 베어 냈다.

‘허도!’

남궁황의 마음에 호승심이 차올랐다.

한 사람은 천하제일세가라 불리는 남궁세가의 가주.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천하제일도문이라 불리는 무당의 장문인.

또한 동시에 두 문파는 천하제일검문의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다.

하지만 그런 깊고도 복잡한 관계에 놓여 있음에도 두 사람은 지금껏 한 번도 서로 검을 맞대 본 적이 없다.

목숨을 걸고 검을 나눌 만큼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어설픈 비무로 승부를 결정하기에는 그들이 잃을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남궁황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는 순간 허도진인도 자연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여유를 읽은 남궁황이 입매를 굳혔다.

‘내 검을 보고도 아직 여유를 부리시겠다?’

남궁황은 검을 꽉 움켜잡았다.

“오냐. 어디 그 여유가 언제까지 가는지 보자!”

호승심이 극에 달한 남궁황이 앞으로 먼저 박차고 나갔다.

“가주님!”

“힘을 아끼셔야 합니다!”

“비켜라!”

콰아아아아앙!

또 한 번 일검을 휘둘러 수적들을 날려 버린 남궁황이 우레와 같이 소리쳤다.

“흑룡왕 따위를 상대하는데 내력을 아낄 필요가 어디 있더냐! 나는 제왕검 남궁황이다!”

다른 이의 입에서 나왔다면 더없는 오만일 테지만, 남궁황의 검은 그럴 만한 자격을 충분히 보여 주었다.

콰아아아앙!

또다시 남궁황의 검에 수적들이 피떡이 되어 나가떨어졌다. 그의 양옆을 지키는 창궁검대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더욱 드높아졌다.

“가주님을 따라라!”

“가주님의 발이 멈추지 않도록 해라!”

문파와 세가.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가주에 대한 충심과 서로에 대한 결속력은 분명 세가가 가지는 이점이다. 혈연으로 끈끈하게 이어진 세가의 힘이 이곳에서 확연하게 발휘되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앙!

“흠!”

기세가 일변하여 치고 나가는 남궁황을 보며 허도진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선불 맞은 멧돼지가 따로 없군.’

검이란 저리 쓰는 것이 아닐진대.

‘하지만 그럼에도…….’

허도진인은 제 얼굴을 가볍게 훑었다. 이 나이에 이르러서도 아직 그의 가슴속에 호승심이라는 감정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심장이 이리 뛰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하나.

“흥분하지 마라.”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뒤를 따르는 무당 제자들의 귀에 똑똑히 박혀 들었다.

“기회가 오면 단숨에 낚아채면 된다. 평정심을 잃지 마라!”

남궁세가가 치고 나가는 것에 조급함을 느끼던 무당의 제자들이 그 말에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이내 짧게 심호흡을 하며 더욱 굳건해진 자세로 수적들을 몰아쳤다.

‘법정. 이건 당신의 실수요.’

만일 이곳에 남궁황이나 벽현자만 있었다면 법계로도 충분히 소림을 이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곳에 있는 이상 소림이 활약할 일은 없다.

“치고 들어가라!”

남궁과 무당이 동시에 기세를 끌어올리자 간신히 유지되던 수적들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만다.

“아, 안 돼…….”

“더는 못 버텨!”

허도진인과 남궁황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비켜라! 이놈들!”

남궁황이 틈을 파고드는 순간, 허도진인은 아예 비조처럼 솟아올라 수적들의 머리를 뛰어넘고 전각 안으로 날아들었다.

“저!”

남궁황의 두 눈에 불똥이 튀어 올랐다.

“타아아아압!”

수적들을 일거에 뭉개 버린 남궁황이 굶주린 범처럼 허도진인의 뒤를 쫓았다.

“이런, 빌어먹을!”

콰아아아앙!

전각의 문을 단번에 부순 남궁황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좌우를 살폈다.

‘어디냐?’

머리가 깨닫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이내 빛살처럼 달려 전각 중앙의 부서진 문을 향해 박차고 들어갔다.

“흑룡왕!”

대단한 기세로 뛰어들었던 남궁황의 발이 돌연 우뚝 멈췄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내실, 그리고 그 중앙에 있는 고급스럽고 위엄이 넘치는 의자, 그리고…… 굳은 얼굴로 그 의자를 바라보는 허도진인의 모습이었다.

“흑룡왕은 어디 있소?”

“……여기에 없소.”

“뭐, 뭐라고?”

남궁황의 얼굴이 처음으로 당황함에 일그러졌다.

이곳은 장강수로십팔채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다. 아무리 흑룡왕이 제 한 몸의 무위로 수로채를 집어삼킨 이라고는 하나, 흑룡채를 잃고서는 다시 재기를 할 순 없다.

그러니 누구보다 흑룡채를 사수해야 할 흑룡왕이 이곳에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뒤늦게 쫓아 들어온 법계가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눈살을 찌푸린다.

“흑룡왕이 없다는 겁니까?”

“……그런 것 같소, 대사.”

“어찌…….”

법계 역시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흑룡왕이 없다고 하셨습니까?”

계속 같은 말이 반복되니 허도진인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쏘아붙이기 위해 고개를 돌렸던 그는 순간 마지막 질문을 던진 이의 얼굴을 보고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청성은 위를 맡기로 하지 않았소?”

벽현자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말은 청성의 제자들 역시 이 안으로 들어와 있다는 말이다.

“왜 이곳에 계십니까? 왜!”

“그, 그리 말씀하셔도…… 애초에 강 위의 수적들을 처리하고 위쪽을 지킬 이들을 지원해 주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말없이 안으로 모두 진입하시기에 당연히 작전이 바뀐 줄 알았지요.”

“이…….”

허도진인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잘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보나마나 공명심에 사로잡혀 계획을 어기고 이 안까지 따라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퇴로는?”

“뚫는 것도 수월했는데 굳이 퇴로가 필요할지…….”

하지만 허도진인의 얼굴은 철갑이라도 쓴 듯 차게 식었다.

“그럼…… 지금 이 안에 모두가 다 들어와 있다는 말이오? 이 독 안에?”

독이라는 말이 나오고서야 다른 장문인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살짝 가셨다.

“설마…….”

“아, 아니! 그럴 리가! 이 안에는 흑룡채도 있지 않소! 저들은 그저 그런 수로채의 수족이 아니라 머리나 심장 같은 이들이란 말이오! 제 심장을 내어 주며 함정을 파는 이가 어디에 있소!”

“……흑룡왕은 그럴 수 없겠지.”

“그게 무슨……?”

“아아.”

순간 법계가 허도진인의 말을 이해한 듯 탄성을 흘렸다. 그런 법계의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하, 함정…….”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고막을 찢는 듯한 거대한 광소가 저 위쪽에서 터져 나왔다.

가공할 내력을 실은 커다란 웃음은 그들을 둘러싼 절벽에 부딪혀 쩌렁쩌렁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울렸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마침내 완벽하게 직감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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