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2화. 야! 거기 남는 술 좀 챙겨라! (2)
“흠!”
골짜기 안으로 들어온 남궁황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묘한 지형이다.
절벽 사이로 물이 들어차는 긴 길이 나 있다. 무리한다면 배 두 척 정도는 나란히 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이니 아주 좁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넓다고도 할 수 없는 그런 길이었다.
‘배가 오가야 하는 수채의 입구로 이보다 좋은 곳은 없겠군.’
게다가 절벽이 높이가 상당했다.
그렇다 보니 골짜기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주변이 어두워졌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면 시커먼 세상에 길게 푸른 선이 그어져 있는 것만 같다.
“경계를 풀지 마라!”
남궁황이 고함을 쳤다. 소리가 울렸다.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한다. 상대는 사파! 무슨 수를 써 올지 모른다. 실력으로 지는 것은 수치가 아니지만, 방심으로 인한 죽음은 더없는 수치다!”
“예!”
남궁황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확인했다.
그도 이리 많은 이들을 이끌고, 이만한 적과 싸우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과히 흥분해도 딱히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궁세가의 가주라는 자리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그의 눈은 더없이 냉정했다.
“아버님.”
“가주다!”
“예, 가주님!”
남궁도위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길이 좁고 물살이 거셉니다. 이곳에서 배가 공격당한다면…….”
“걱정할 것 없다.”
남궁황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걸 대비해서 창궁검대에게 배를 호위하게 한 것이다. 하찮은 수적 놈들이 창궁검대를 뚫고 배까지 접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남궁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오만하게 들릴 만한 말이지만, 남궁도위는 안다. 저건 오만이 아니다. 오만할 자격이 있는 이가 부리는 오만은 자신감이라 불러야 한다.
“그보다…….”
남궁황의 시선이 위쪽으로 향했다.
그의 입꼬리가 조소로 비틀어졌다.
“수적 놈들이 주제도 모르는군. 수적이면 수적답게 자맥질이나 할 것이지.”
그에 남궁도위의 시선이 남궁황의 눈이 닿은 곳을 향해 획 돌아갔다.
“온다!”
좌우로 병풍처럼 늘어선 절벽을 타고 검은 무복을 입은 이들이 그들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해 오고 있었다.
‘다르다!’
남궁도위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저 가파른 절벽을 평지처럼 내달리는 것은 보통의 경신법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저 한 수만 보더라도 저 흑의인들은 지금껏 그들이 상대했던 수적들과 격이 다른 게 분명했다.
“과연, 흑룡채라 이건가?”
남궁황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가 채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배에 타 있던 창궁검대가 마치 커다란 비조가 날개를 펼치듯 솟아올라 절벽을 달려 나갔다.
발 디딜 틈 하나 보이지 않는 깎아지른 절벽, 그 가파르기 짝이 없는 경사면을 타고 두 집단이 얽혀들었다.
“쳐라!”
“모두 죽여라!”
검기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날카로운 검이 수적들의 몸을 꿰뚫고, 수적들이 날린 한 뼘 길이의 투창들은 창궁검대의 살을 갈라냈다.
서걱!
가슴을 길게 베인 수적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강 위로 추락한다.
풍덩! 풍덩!
승기를 잡은 것은 누가 봐도 창궁검대였다. 그들이 절벽 위에서 전투를 치르는 수련을 했을 리는 없을 텐데도, 오랜 기간 착실하게 쌓아올린 무위는 장소의 제약에 굴하지 않았다.
“이게 전부일 리는 없겠고.”
남궁황이 고개를 들어 위쪽을 살펴보았다.
“쏴라!”
아니나 다를까, 좁은 협곡 위로 보이는 하늘이 순식간에 검은 화살로 빼곡하게 메워졌다.
“그렇지.”
너무도 당연한 공격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위압감과는 달리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격에 불과했다.
카카캉!
남궁황의 검이 날아드는 화살을 모조리 쳐 냈다.
만약 이곳이 군사와 군사가 격돌하는 평범한 전장이었다면, 머리 위를 점하고 쏟아지는 화살의 비는 분명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아니, 이곳을 뚫고 들어가는 이들이 남궁세가가 아닌 적당한 문파만 되었어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선두로 전진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창천남궁세가.
내력 한 줌 실리지 않은 평범한 화살 따위는 하루 종일 쏟아진다고 해도 남궁세가의 무인들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
근거리에서 내력을 실어 화살을 쏘아 댔다면 분명 위험했겠으나, 이 정도 거리에서 화살을 날리며 끝까지 내력을 유지하는 것은 웬만한 실력으로는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너무 높은 절벽이 저들에게 되레 방해가 되고 있는 것이다.
“가주님! 올라갑니까?”
“됐다. 무시해라!”
남궁황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조무래기들에게 연연하지 마라! 뒤치다꺼리는 뒤따르는 놈들이 할 것이다!”
“예!”
잠시 주춤했던 배가 다시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한다. 창궁검대를 상대하던 수적들이 배를 저지하기 위해 절벽을 박차고 몸을 날렸지만, 그들 중 누구도 남궁황이 타고 있는 배에 발을 디디지 못했다.
“크아아악!”
“끄륵!”
배를 호위하듯 난간에 오른 남궁세가의 장로들이 달려드는 수적들을 단번에 베어 낸 것이다.
“방해하지 마라, 이 악적 놈들!”
“사파 놈들이 감히 어딜 노리는 것이냐!”
가장 앞에서 방해를 받으며 전진하고 있건만, 남궁세가의 배는 오히려 뒤따르는 무당의 배와의 거리를 더욱 벌리며 전진하고 있었다.
쾌도난마라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었다.
촤아아아악!
배가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그 누구도 남궁황의 앞을 막아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남궁도위는 사자 형태의 선수상 위에 선 남궁황을 보며 전율했다.
악에 받친 수적들이 절벽을 타며 달려들고, 머리 위에서는 화살의 비가 쏟아진다. 그리고 이제는 화살뿐 아니라 사람만 한 바윗덩어리들까지 떨어지며 거센 물보라가 몰아치고 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하지만 그 중앙을 헤치고 나아가는 남궁황의 등에는 한 점 흔들림도 없었다.
‘남궁세가의 가주.’
제왕검 남궁황.
그리고 창천남궁세가.
남궁도위는 새삼 제 가문이 가진 힘을 더없이 크게 실감했다. 그 역시 언젠가는 지금의 남궁황과 같은 모습으로 남궁세가를 이끌어야 한다.
‘언젠가는 저 소림도, 그리고 무당도 남궁세가의 발아래 무릎을 꿇을 것이다.’
남궁도위가 날아드는 화살을 쳐 내며 다짐하는 그 순간, 남궁황이 크게 소리쳤다!
“보인다!”
드디어 앞쪽으로 길게 이어지던 협곡의 끝이 보였다. 좁디좁았던 골짜기가 크게 넓어지며 골짜기 가장 안쪽의 모습이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크다.
‘마치 커다란 화산 꼭대기 같군.’
좁은 소로를 타고 들어온 물이 부채형으로 퍼지며 뭍에 닿아 있다. 이곳의 지형은, 말하자면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드넓은 분지였다.
“잘도 이런 곳에 자리를 잡았군.”
확실히 이곳은 천혜의 요새다.
들어가는 길은 과도하게 좁아 배가 여럿 들어올 수 없고, 안으로 들어오려면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절벽 위에서의 공격에 무방비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건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 무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다. 저 높은 곳에서 무슨 짓을 하건, 일류 고수만 되어도 모조리 피해 낼 수 있을 테니까.
남궁황이 입가를 뒤틀며 웃었다.
“상대가 우리여서야 독 안에 든 쥐 꼴이 아닌가?”
남궁황이 검을 뽑아 들었다.
“상륙하라! 단숨에 몰아친다!”
“충!”
뭍에는 커다란 전각이 여러 채 지어져 있었다.
수적들은 본디 수채를 빈번하게 옮기기 때문에 거창한 건물을 지어 대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의 건물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거대하고 웅장했다.
다른 수채들이야 언제든 버리고 달아날 수 있지만, 이 흑룡채만큼은 다르다는 패기와 의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 봐야 수적 놈이!’
남궁황이 선수상을 강하게 밟으며 앞으로 솟아올랐다.
쿠웅!
단숨에 이십여 장을 격하여 날아간 그가 뭍에 내려섰다..
“죽어라아아아앗!”
남궁황이 바닥을 딛기 무섭게 십여 명의 수적들이 동시에 공격해 들어왔다. 병기야 가지각색이었지만 그 기세는 하나같이 날카로웠다.
“하찮은!”
쿵!
남궁황이 진각을 내리밟으며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가공할 위력의 강검(剛劍)이 날아드는 이들을 단숨에 베어 냈다.
아니, 그건 벤다기보다는 부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일격이었다.
어마어마한 내력이 실린 검을 몸으로 받아 낸 이들은, 지극히 당연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마치 포탄처럼 튕겨 나간 이들은 몸이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절명했다.
“조무래기들은 꺼져라!”
남궁황이 사자처럼 포효했다.
“흑룡왕은 어디 있느냐! 이 제왕검 남궁황이 상대해 주겠다!”
그런 그를 필두로 남궁세가의 창천검대가 속속들이 뭍으로 뛰어올랐다.
“가주님!”
“명을 내려 주십시오!”
남궁황이 얼굴을 찌푸리며 크게 외쳤다.
“모조리 주살하라! 그리고 흑룡왕을 찾아 내 앞으로 끌고 와라!”
“충!”
가주의 명을 받은 창천검대가 질풍처럼 앞으로 돌진했다.
“막아라!”
“저 개 같은 놈들이!”
흑룡채의 수적들도 이를 갈며 그런 창천검대를 막아섰다.
어차피 퇴로는 없다.
이 천혜의 요새는 주인인 수적들에게조차 달아날 길을 허하지 않는다. 적이 쳐들어왔다면, 그들에게 남은 길이란 오직 하나. 끝까지 맞서 싸우는 것뿐이다.
장강수로십팔채의 수적들 중에서도 가장 악랄하고 잔혹한 이들만이 모여 있는 곳이 흑룡채다. 그들이 저지른 수많은 죄는 항복하고 목숨을 구걸한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옥쇄뿐!
“죽어라!”
“크윽!”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하나하나의 실력은 분명 창궁검대 쪽이 높다. 거기에 남궁세가의 장로들과 빈객들까지 합세하니 제아무리 흑룡채의 수적들이라고 해도 힘이 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는 흑룡채 쪽이 확실히 많았다.
대체 어디서 그만한 인원이 나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검은 흑의를 입은 수적들이 개미 떼처럼 밀고 나왔다.
“쏴라아아아!”
콰아아앙!
콰아아아앙!
전각에 설치되어 있던 포루에서 연이어 커다란 쇠 작살들이 쏘아졌다.
창천검대의 검수가 날아드는 작살을 후려쳤다. 하지만 그 바람에 방향이 틀어지며 우측에 선 창궁검대의 몸에 그대로 박혔다.
콰드드드득!
“끄으윽…….”
간격이 충분했다면 대응할 수 있었겠지만, 그들 역시 이만한 난전을 치러 본 경험은 전무했다.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진 창궁검대의 대원은 잠깐 경련하다가 곧 숨이 끊어졌다.
“이놈들이!”
남궁황이 우렁우렁 소리치며 앞으로 짓쳐 달려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검 끝에서 뿜어진 검강이 사람을 걷어찬 돌멩이처럼 쳐 날렸다.
“남궁세가의 의기를 보여 주어라!”
“충!”
남궁세가가 기세를 최고조로 끌어 올리는 순간, 뒤따라 분지로 진입한 배에서 무당의 제자들이 일제히 뭍으로 쏟아져 나왔다.
내려선 허도진인이 선두에 서서 제자들을 이끌고 단숨에 전열에 뛰어들었다.
“이, 이 개 같은 정파 노…….”
서걱!
차마 물러나지 못하고 주춤대던 수적의 목을 단번에 꿰뚫어 버린 허도진인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뒤처지지 마라. 단숨에 만회한다!”
“예!”
남궁과 무당.
천하를 대표하는 두 개의 검문이 서로 경쟁하듯 수적들을 주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