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9화. 잘생기고 재수 없으면 진가 놈인데. (4)
“전쟁하는 사람 어디 갔나?”
조걸이 살짝 떨떠름한 얼굴로 앞쪽을 살폈다.
화산이 잔치판을 벌인 지 한참이나 되었건만, 저들끼리 논의에 들어간 다른 장문인들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질 않는다.
“사형. 쟤들 아무래도 오늘 안엔 싸울 생각이 없나 본데요? 경관도 좋겠다, 느긋하게 구경이나 하다 철수하려는 거 아닙니까?”
“걸아.”
“예, 사형!”
“입 닫아라.”
“…….”
시무룩해진 조걸이 고개를 푹 숙이자 윤종이 한숨을 쉬었다. 요즘 가만 보면 조걸이 놈이 청명이 녀석보다 더한 면도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저 쟁쟁한 문파들을 보면서 저런 말을 할 생각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번에는 백천도 조걸과 생각이 비슷한 모양이었다.
“……너무 안 움직이기는 하는데.”
눈살을 찌푸린 그가 중얼거렸다. 뭔가를 준비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시간이 너무 지체되고 있다.
그러자 잠시 살펴본 윤종이 말했다.
“저 골짜기를 공략하는 게 생각보다 더 까다로운 문제라 그러는 거 아닐까요?”
“으음. 그럴 수도 있겠구나.”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가만 듣고 있던 청명이 피식 웃었다.
“그런 게 아니고…….”
“응?”
“지금 한창 피 튀기며 싸우고 있는 거야.”
“……싸운다고?”
백천이 의아한 눈으로 앞쪽을 바라보았다. 네 문파의 수장들은 여전히 강 건너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있었다.
“칼 들고 싸우는 건 아닌데, 지금 지략 싸움이라도 하고 있다는 거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흑룡채에 저분들을 상대할 만한 모사가 있다고?”
“아니. 적은 수적이 아니라 제 옆에 있는 것들이지.”
“엥?”
청명은 네 문파의 수장들을 보다 입꼬리를 뒤틀며 비웃었다.
“지금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눈앞에 수적은 안중에도 없다고.”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원래 높으신 양반들은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면서 속이 구리잖아.”
청명의 눈엔 한심하게 여기는 기색이 스쳤다. 지난날이 떠올라서였다.
‘옛날에도 그랬지. 망할 자식들.’
마교가 처음 발호해 중원으로 밀고 들어왔을 무렵. 아니, 마교가 새외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중원을 불바다로 만들기 시작했을 무렵.
그때라도 중원이 하나로 힘을 뭉쳐 마교에 대항했다면 미래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원은 결국 하나로 뭉치지 못했다.
겉으로야 마교를 막는다는 목표 아래 의기투합한것처럼 보였지만, 그 속으로는 어떻게든 자문의 피해를 줄이고 이득을 취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하. 저것들은 세월이 지나도 똑같네. 하하……. 하……. 하…….”
청명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흩어지다 사라졌다.
“생각하니. 열받네, 저 새끼들!”
눈에서 화르륵 불길이 치솟았다.
‘간단한 작전에도 어느 문파를 투입하느냐를 가지고 하루밤낮을 싸워 댔지. 그 망할 새끼들!’
떠올릴수록 이가 절로 빠득빠득 갈렸다.
그때 그냥 뒤도 안 돌아보고 그 새끼들 대가리를 다 깨 버렸어야 하는 건데! 내가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걸 참았다가 이 꼴을 보나.
청문 사형이 말리든 말든 그냥 다 패 버렸으면 됐을 것을.
“……너 자꾸 뭘 그렇게 꿍얼대고 있냐?”
“끄응.”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곧 결론이 날 거야.”
“응? 뭐가?”
“결국에는 누가 선봉을 설 것인가로 싸우고 있겠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해.”
청명은 크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선봉이란 가장 크게 공을 세울 수 있는 동시에, 가장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자리거든. 그러니까 내가 나서기에는 묘하게 껄끄럽고, 그렇다고 남 주자니 못내 아까운, 그런 미묘하고도 복잡하고 또 애매한 그런 자리라 이 말씀이야.”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사숙이 뭘 알겠어.”
“…….”
어안이 벙벙한 백천을 보며 혀를 찬 청명은 앞쪽을 향해 턱짓했다.
“걱정하지 마. 말했듯이 이건 결론이 정해져 있는 문제니까. 아무리 옥신각신해도 선봉에 설 곳은 하나뿐이야.”
“소림?”
“아니, 남궁세가.”
“응?”
그 의외의 말에 듣던 이들이 하나같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런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여 조걸이 입을 열었다.
“어……. 아니, 물론 남궁세가가 어디 가서 처지는 문파는 아니지만…….”
“소림이랑 무당이 있는데 왜 남궁세가가 선봉에 서냐고?”
“응.”
충분히 품을 만한 의문이었다. 청명은 작게 웃으며 설명했다.
“소림이나 무당 중 하나만 있다면 남궁세가는 선봉에 설 수 없었겠지. 그런데 둘 다 있으면 설 수 있어. 거기에 청성까지 있으면 남궁세가 말고는 선봉에 설 곳이 없지.”
“그건 또 뭔 소리냐?”
조걸은 아무리 생각해도 영 이해가 안 가는 눈치였다.
하지만 백천은 청명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다는 듯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같은 구파 중 한 곳이 선봉에 서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오대세가에 그 공을 넘기겠다는 건가?”
“오. 동룡이는 그래도 머리가 좀 돌아가는데?”
백천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윤종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으로 반문했다.
“아무리 그래도 소림, 무당, 청성은 같은 구파일방 소속이지 않느냐? 물론 오대세가와도 친하다지만, 같은 구파와는 비교할 수 없을 텐데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냐?”
청명이 감탄했다는 듯 윤종을 바라본다.
“크으. 우리 사형은 착하기도 하지. 어쩜 이리 순진할까!”
“……그냥 욕을 해라, 청명아.”
“사형이 잘 모르는 모양인데, 원래 사람이란 남 잘되는 꼴은 죽어도 못 보는 법이야. 그리고 생판 모르는 놈이 땅을 사면 그러려니 해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 죽지.”
“그건 세상을 너무 너처럼 보는 것 아니냐?”
“그럼 봐.”
청명이 다시 앞쪽을 향해 턱짓했다.
“내 말이 틀렸는지.”
“…….”
윤종이 의혹 어린 눈으로 청명이 가리킨 쪽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진을 갖추고 있던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지?”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도열해 있던 이들 중 하늘색 무복을 입은 이들이 일제히 강가로 달려 나갔다.
“남궁세가다!”
백천은 살짝 질린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놈은 대체 어떻게 이런 걸 맞추는 거지?’
“왜? 신기해?”
“…….”
“신기해할 것 없어. 그냥 저놈들이 어떤 놈들인지를 이해하면 누구라도 맞힐 수 있는 거니까.”
청명은 조소하듯 입꼬리를 비틀며 다시 술을 들이켰다.
“그건 그렇고…… 저 남궁가주도 어지간히 공명심(功名心)이 대단한 사람인 모양이네. 그 자릴 준다고 덥석 무는 걸 보니 말이야. 하긴…… 오대세가 중에 당가가 이탈했으니, 어떻게든 아직 오대세가가 건재하다는 걸 알리긴 해야겠지. 낄낄.”
백천은 그가 말하는 걸 듣다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이놈은 정말이지 예측이 안 된다니까.’
청명이 생각보다 훨씬 똑똑한 놈이라는 건 이젠 화산의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마저 그의 예측 안에서 움직일 줄이야.
그들이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전장은 움직이고 있었다.
강으로 달려 나간 남궁세가의 문도들이 강변에 정박되어 있던 선박에 일제히 뛰어올랐다. 승선을 완료하고 내렸던 닻을 회수하기까지 과정이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 버렸다.
‘능숙하다.’
백천은 내심 감탄했다.
저 속도야 어떻게든 따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저 일사불란함은 화산으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저들이 얼마나 엄격한 통제 아래서 생활해 오고, 얼마나 고된 수련을 해 왔는지 절로 짐작되는 광경이었다.
‘저게 남궁세가……!’
오대세가의 수장이라는 평은 확실히 아무나 얻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듯했다. 남궁세가가 몸을 실은 배들은 강 건너를 점령한 수적선들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조걸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정면돌파?!”
“아무리 그래도 수적들인데!”
다른 화산의 제자들 역시 놀란 눈으로 맹렬히 돌진하는 남궁세가의 배를 주시했다.
수적들을 향해 나포한 배는 생각 이상으로 많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강 건너편을 빼곡하게 메운 수적선들에 비하면 한 줌에 불과했다.
“괜찮지 않을까요? 병력의 질이 다르지 않습니까.”
“아, 아니, 그래도 물 밑에서 공격해 오면 막을 도리가 없지 않나?”
백천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수적들이 다가오는 배를 보며 강으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아래로 접근해 배 밑창에 구멍을 내 버리겠다는 생각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남궁세가 역시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선두에서 나아가는 배의 가장 앞부분, 사자 모양의 선수상(船首像)위로 한 사람이 올라섰다.
스르르릉.
남궁세가의 가주. 제왕검(帝王劍) 남궁황이 검을 뽑아 들고는 노기에 찬 얼굴로 전방을 응시했다.
“감히 하찮은 수적 놈들이!”
그는 검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
고오오오오오오오!
뿜어져 나온 기운이 검 주위로 폭풍처럼 몰아쳤다. 이내 그의 검에서 우윳빛의 검광이 뭉클뭉클 피어나 검을 휘감았다.
“타아아아아압!”
검이 위에서 아래로 단숨에 내리그어졌다.
그와 동시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집채만 한 크기의 검강이 포탄처럼 쏘아져 나갔다.
촤아아아아아아악!
가공하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부족한 검강이 강에 닿는 순간, 도도히 흐르던 강물이 사방으로 폭발하듯 솟구쳤다. 순식간에 강이 좌우로 밀려나며 일 장이 넘게 갈라졌다.
“저, 저게 뭐야!”
“미친!”
화산의 제자들은 경악하며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질렀다.
“검으로 강을 가른다고? 진짜로?”
실로 대경할 광경이었다.
우윳빛의 검강은 강을 갈라내고도 위력을 잃지 않고 앞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앞쪽에 진을 친 배에 박혀 들었다.
강조차 갈라 버리는 검강을 상대하기에, 판자 따위로 만들어진 배는 너무도 나약하고 하찮았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배가 잘리다 못해 폭발하며 사방으로 잔해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여파에 휩쓸려 비명을 지르고 날아가는 이들은 그나마 사정이 좋은 편이었다. 검강에 직격당한 이들은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산산조각이 나 죽어 갔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앙!
배 하나를 완전히 부수고도 모자랐는지, 검강은 연이어 두 척의 배를 박살 내고, 남은 한 척을 반파시킨 후에야 잦아들었다.
일 검.
단 일 검으로 무려 세 척의 배를 산산조각 냈고, 한 척의 배를 물속으로 천천히 가라앉혔다.
“아아아아아아악!”
“이, 이게 뭐야!”
비명은 배에서만 들리는 게 아니었다.
물 안으로 뛰어들었던 이들의 당혹감은 그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남궁황의 검강에 실린 파괴력은 물속도 완전히 헤집어 놓았다. 갑자기 발생한 와류에 휩쓸린 이들은 수공을 발휘할 틈도 없이 쓸려 나갔고, 그중 태반은 물의 윗면이 아니라 옆면으로 자신의 몸이 빠져나오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기괴한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그렇게 낙하한 그들을 맞이한 것은 평생 맑은 눈으로는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깊은 강바닥이었다.
쿵! 쿵! 쿵!
강바닥에 처박힌 수적들 위로 이윽고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쏟아졌다. 갈라진 강이 제자리를 찾으며 수적들을 수압으로 단숨에 짓눌러 버렸다.
장강의 수적들이 물에 빠져 죽는,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낸 남궁황은 성난 범처럼 포효했다.
“쳐라! 저 하찮은 수적 놈들에게 남궁의 이름을 똑똑히 알려 주어라!”
“충!”
남궁황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남궁세가의 문도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배에서 달려 나가 소용돌이치는 장강으로 뛰어내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은 하나같이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남궁세가구나.”
“제왕검……. 남궁황.”
화산의 제자들이 천하를 오시하는 진정한 강자의 위용을 두 눈에 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