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798화 (795/1,567)

798화. 잘생기고 재수 없으면 진가 놈인데. (3)

“입구가 너무 좁소.”

“흐음……. 게다가 방해물이 너무 많습니다.”

장문인들의 시선이 강으로 향했다.

건너편 절벽 가운데 난 깊은 골짜기 앞에는 수적선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만만치 않군.’

수적들을 상대하는 건 이래서 힘들다.

저들이 다른 문파들처럼 개방된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면 소림과 무당, 남궁과 청성이라는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그냥 쓸어 버리면 될 일이다.

하지만 저런 지형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진입부터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아니, 진입부터가 아니지.’

접근부터라고 해야 맞다.

저 배들과 수전을 치르고 나서야 겨우 골짜기에 진입할 수 있을 테니까.

‘이럴 때는 사파 놈들이 부럽기까지 하다니까.’

남궁황이 이를 갈았다.

저 골짜기의 지형을 보고 있으면 속이 울렁거렸다.

이쪽이야 지금 안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양민들 때문에 쓸 수 있는 수단이 제한되지만, 저놈들은 그렇지 않다. 저 좁은 골짜기 안에 어떤 사특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위쪽을 확보하긴 해야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들이 무슨 수작을 벌일지 모르니.”

“……쉽지 않은 일이겠군요.”

패배는 생각도 않는다. 흑룡채 하나를 상대하기에는 넘치다 못해 과할 만큼의 전력이 모여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최대한 피해를 적게 입으면서 다른 문파 이상의 공을 세워야 한다. 그렇기에 이들의 머리가 각기 복잡한 것이다.

‘공을 세우려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피를 흘리면 이들이 좋아할 뿐이지.’

‘어찌한다?’

서로 눈치를 보던 이들 중 법계가 먼저 입을 연다.

“소림이 선두에 서겠습니다.”

“역시 소림이십니다. 천하의 누가 소림의 협의지심을 의심하겠습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저희 무당에 선공을 양보해 주시지요.”

“남궁은 배도 가져왔소이다.”

“배는 청성도 가져왔소.”

네 사람이 슬쩍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럼 우선은…….”

“으하하하하핫!”

“선봉을 누가 서는지…….”

“자, 한잔 받으시고!”

“……그것부터 결정을 해야…….”

“야! 술 가져온 거 다 꺼내 봐! 챙겨 온 거 알고 있어!”

“…….”

간신히 조금 평온해졌던 남궁황의 얼굴에 다시 힘줄이 돋아났다.

“이…….”

“진정하십시오, 남궁가주님.”

“신경 쓰지 마십시오.”

“끄응…….”

다른 장문들의 만류에 남궁황은 화병이 나 돌아 버리겠다는 얼굴로 눈을 부릅떴다.

그도 그럴 게, 이쪽의 고충과는 무관하게 뒤쪽에선 아주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검은 무복을 입은 화산 놈들과 녹의를 입은 산적들, 거기에 청의를 입은 수적 놈들까지 한데 어우러져 술판을 벌이고 있다.

“전장에 나오면서 술을…….”

화산에 꽤 호의를 보이던 현천자도 이것만큼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신경 쓰지 마십시다! 사파 놈들이랑 어울리는 이들에게 생각이랄 게 있겠습니까? 저런 이들을 전장에 끼워 넣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등 뒤에서 칼을 맞고 싶지 않다면야.”

“크흠.”

세 사람이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딱 한 사람, 허도진인은 그 모습을 보며 내심 혀를 찼다.

‘멍청한지고.’

술판을 벌이는 걸 언짢아 할 일이 아니다.

중요한 건 저들이 술을 준비해 왔다는 것이다. 그건 다시 말하자면 저들 중 누군가는 이곳에 올 때부터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연합하여 그들을 뒤로 밀어낼 것을,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는 의미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니냐고?

‘그럴 리가.’

저들은 화산이다.

한창 명성을 날리고 있는, 중원에서 가장 기세가 좋은 문파기는 하다. 하지만 동시에 구파일방에서 퇴출된 지 백 년이 다 되어 가는 문파다. 다시 말하자면 저들 중에서는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를 겪어 본 이가 없다는 의미다.

구파와 오대세가를 많이 겪어 그들의 생리를 이해하고 있는 이라면 어느 정도야 짐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영역 밖으로 백 년 넘게 밀려나 있던 화산이 확신을 가지고 술까지 준비해 온다?

여기서 제일 주목해야 할 건 그 통찰력이다.

그리고 그걸 짐작한 이는 아마도…….

허도진인의 시선이 가운데서 호쾌하게 술을 퍼먹고 있는 청명에게로 향했다.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로군.’

대체 저 나이에 어떻게 저만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그도 강호에서 수많은 천재들을 봤지만, 저런 이를 보는 건 진정으로 처음이었다.

‘재능이 넘치는 이는 많지.’

물론 화산신룡의 재능도 타인과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그 재능 이상으로 허도진인을 긴장하게 하는 것은 수십 년은 강호에 굴러먹은 듯한 여유와 통찰력이었다.

‘다시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분명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화산은 앞으로도 한동안은 무당과의 격차를 좁히지 못해 허덕일 게 분명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들이 죽고 저 아이가 화산의 장문이 된다면? 그때 무당은 정말로 청명의 화산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할수록 두려…….’

“크하하하하! 장문인! 한잔 받으십쇼! 와, 여기 경관 진짜 끝내준다!”

“……나는 차로 됐다.”

“에이! 이런 날은 차보단 술이죠! 쭉쭉쭉! 쭉쭉쭉!”

“…….”

허도진인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대단하긴 한데…….

진짜 대단하긴 한데…….

어쩐지 저 새끼를 높이 평가하는 건 죽기보다 싫은 허도진인이었다.

“……괜찮을까?”

“…….”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건가?”

그동안 저 인간이 벌이는 괴악한 짓은 봐도 너무 많이 봤다.

이제는 화산 뒤뜰에서 갑자기 이무기가 튀어나와 승천하려다가 청명이 놈한테 걸려 얻어맞고 여의주를 상납한 뒤 줄행랑을 친다고 해도 뒷짐 지고 구경할 자신이 있는 백천이다.

하지만…….

‘진짜 이래도 되는 건가?’

그들의 눈앞에 무려 네 문파의 정예들이 모여 있다.

소림, 무당, 청성, 남궁.

그 하나하나의 이름만으로도 강호를 떨게 하기에 충분한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하나도 아니고 무려 넷이나 모여 있는 자리라는 게 얼마나 굉장한지 모를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바로 그 한복판에서 도사와 산적, 수적이 한데 모여 술판을 벌이고 있다.

‘굳이 여기가 아니라고 해도 이 광경은 이상한 거라고!’

더 큰 문제는 술을 홀짝이는 이들의 표정이었다.

“……위장에 구멍 뚫릴 것 같아.”

“이거 먹어도 되는 겁니까?”

“차, 차라리 싸우는 게 낫지.”

화산은 화산대로 앞의 문파들이 주는 중압감을 느끼고 있지만, 사실 그건 녹림과 수적들이 느끼는 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녹채의 산적들은 아예 얼이 빠진 얼굴로 눈에 초점을 잃었다.

“하, 하하……. 한잔…….”

덜덜덜덜.

술잔을 들어 올리는 이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다.

‘토할 것 같아.’

‘저러다가 갑자기 방향 바꿔서 이쪽으로 공격해 오는 거 아냐?’

‘산신령이시여. 살려 주십시오!’

당연한 반응이다.

어찌어찌 상황이 이렇게 되기는 했지만, 저 앞에 있는 구파일방 놈들은 원래 산적들의 동료가 아니라 적이다. 지금 흑룡채의 수적들이 아니라 그들이 토벌당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 말이다.

그런데 달아나기는커녕 그 앞에서 자리를 깔고 술을 먹어야 한다니. 차라리 기름에 불을 질러 마셔 버리는 게 더 속이 편할 판이었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딸꾹!”

“…….”

“딸꾹!”

‘시체가 차라리 안색이 더 좋겠다.’

산적들은 안쓰러운 얼굴로 수적들을 흘끗거렸다.

그들은 그나마 녹림에서도 최정예로 쳐주는 녹채의 무사들이고, 이곳에는 녹림왕이라도 있다.

하지만 저 수적들은 말 그대로 일개 수채의 수적인 데다가, 애초에 얼마 전까지는 토벌을 하는 게 아니라 당하던 입장이었다.

그런 이들이 노예처럼 끌려와 과거 동료였던 이들이 토벌당하는 곳 앞에서 술판을 벌였으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게 용할 판이다.

“……그러게, 술은 왜 챙겨 왔는가?”

“저, 저분께서 챙기라시는데…… 저희가 무슨 대단한 재주가 있어서…….”

하기야.

까라면 까야지. 시키는 사람이 화산신룡인데.

금방이라도 심장마비로 쓰러질 것 같은 안색의 수적들과, 그 앞에 마주 앉아 튀어야 할지 옥쇄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 중인 산적들. 거기에 마시라고 하니 일단 마시기는 하는데, 진짜 이래도 되는지 갈피를 못 잡아 내내 눈치를 살피는 화산파 문도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속이 뒤집히고 있는 네 문파까지.

강변을 점거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불편하고, 언짢고, 껄끄러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마냥 신난 이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꼴꼴꼴꼴꼴!

청명이 시원하게 술을 넘기고는 입에서 병을 뽁 뽑아냈다.

“카아아아아아아! 크으! 술맛 좋다! 기가 막히다! 경치도 죽여주고!”

현종이 떨떠름한 시선으로 그런 청명을 응시했다.

그는 이해하고 있었다. 청명이 벌이는 모든 일에는 나름의 계산이 있다. 순간적으로 당혹스러울지는 몰라도, 일단은 따라 주는 게 이득으로 돌아온다.

안다. 알긴 아는데…….

“청명아.”

“네, 장문인.”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이냐?”

장단이야 기가 막히게 맞춰 주고 있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쟤들이 끼지 말라잖아요.”

“그렇다 해도…….”

“뒤에서 괜히 시무룩해 있으면 저 새끼들만 기분 좋아지는 거죠. 장문인 이걸 이해하셔야 앞으로 이 험난한 정치판에서 살아남으실 수 있습니다.”

“……뭘?”

“정치는 나 좋자고 하는 게 아닙니다! 꼴 보기 싫은 놈들 속 뒤집어지라고 하는 거예요!”

청명의 말에 현종이 흐뭇하게 웃었다.

‘선조들이시여.’

제가 요즘 너무 힘이 듭니다. 가끔은 옛날보다 더 힘이 들어요.

제발 이놈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응?”

청명이 입가에 묻은 술을 소매로 슬쩍 훔치며 조금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애들도 뒤에서 구경하는 법을 익혀야 해요. 지금까지야 뭔 일만 터지면 일단 달려가서 해결하는 버릇을 들였는데, 화산이 그 짓 하다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잊지는 않으셨죠?”

“……당연히 잊지 않았다.”

“화산이 무너질 판이 되었어도 구경만 하던 놈들이잖아요. 그런데 겨우 이깟 일을 보면서 돕지 못해 안달인 게 더 이상하죠. 기분 같아서는 강에다 기름 붓고 불 질러 버리고 싶은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현종의 얼굴이 굳었다.

“뭐, 장문인은 이러다가도 저들이 위기에 처하시면 나서시겠죠. 그걸 두고 보실 분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저 새끼들은요? 화산이 불타고, 제자들이 처참하게 죽어 나갈 때 누구 하나 도운 놈들 있어요? 뒷짐 지고 술 처먹다가 창고나 털어 갔지.”

현종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화가 훅 치밀었다.

돌이켜보면 저 문파들은 마교가 쳐들어와 화산에 불을 지르고, 제자들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서도 돕지 않은 이들이다.

지금 화산 일행이 하는 게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라, 그때 그들이 했던 짓이 진정 강 건너 불구경이다. 그런데 그랬던 이들이 전쟁을 벌이는 걸 구경만 하는 게 불편하다고?

‘좀 살 만해졌다고, 내가 그걸 다 잊었더란 말이냐?’

현종이 짧게 이를 간다.

“술!”

“예?”

“술 가져오너라! 어디 나도 한번 마셔 보자!”

“자, 장문인!”

“어서!”

현종의 호통에 현영이 찔끔하여 술을 가지러 갔다. 그 모습을 보며 청명이 히죽 웃었다.

“이해하셨네요.”

현종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잊어야 할 것이 있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똑같이 돌려주겠다는 마음은 결코 아니지만…….”

“그거면 되죠.”

현종이 고개를 돌려 제자들에게 소리쳤다.

“마셔라! 어디 물놀이 한번 제대로 즐겨 보자꾸나!”

“예, 장문인!”

현종이 현영이 가져온 술을 다기에 따라 단숨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크으!”

“자자. 안주도 한 점 하시고.”

“오냐!”

육포를 으적으적 씹어 대는 현종을 보며 청명이 낄낄 웃었다.

그래, 잊어서는 안 된다.

저들이 과거 화산에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청명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화산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지금은 이 정도지만…….’

언젠가는 저들도 화산처럼 피눈물 흘릴 날이 올 것이다.

“어디 재롱떠는 거 구경이나 하죠. 그런데 음…….”

“응?”

청명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게 정말 강 건너 불구경이 되지는 않아야 될 텐데.”

“……그게 무슨 소리냐.”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건가? 모르겠다. 낄낄낄낄.”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사특하게 웃어젖히는 청명의 모습에, 현종은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