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4화. 오직 그만이 가치 있을 뿐이오. (4)
“장문인!”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허도진인이 고개를 돌렸다. 이내 그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검은 무복을 입은 이들과, 그 뒤를 따르는 녹의, 청의 차림의 무리.
실로 괴이한 조합이었으나 허도진인은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대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화산…….”
허도진인의 입에서 살짝 억눌린 듯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현 강호에 저리 요란한 이들은 화산파밖에 없다.
현재 가장 껄끄러운 이들을 하필이면 흑룡채로 향하는 와중에 마주치고 만 것이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허산자의 물음에 허도진인이 눈을 빛냈다.
“굳이 피할 이유는 없지 않느냐. 우리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이윽고 그의 입가에 슬쩍 묘한 미소가 어렸다.
생각해 보면 과거 비무대회 이후로 그가 화산을 직접 본 적은 없다. 그저 전해져 오는 이야기만을 들었을 뿐이다.
‘내 눈으로 확인해 둘 필요가 있겠지.’
결정을 내린 허도진인이 짧게 말했다.
“허산.”
“예, 장문인.”
“화산파를 만나 봐야겠다.”
“……장문인.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당황한 허산자는 일단 허도진인을 만류하기 시작했다.
화산을 만나는 일이 껄끄럽기 때문이 아니다.
정파이다 보니 사파들처럼 엄격하게 문파의 상하를 나누진 않지만, 은연중에는 당연히 그 급이 나뉘기 마련이다.
무당의 명성과 실력은 화산의 것에 비할 바 없이 드높다. 이치를 따진다면 그들이 화산에게 다가가는 게 아니라 화산이 와서 인사를 하는 게 맞다. 허도진인이 먼저 말을 건넨다면 괜히 화산의 어깨에 힘을 실어 줄 수도 있다.
그런 허산자의 내심을 짐작했는지 허도진인이 살짝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도 그런 것에 연연하느냐?”
“……장문인, 하나…….”
“쓸데없는 허례 같은 건 됐다. 중요한 건 무엇을 얻느냐다.”
이렇게 나오니 결국 허산자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허도진인이 그러기로 마음먹은 이상 더 이상의 설왕설래는 낭비가 될 뿐이다.
“가자.”
“예.”
허도진인이 방향을 바꾸자 뒤따르던 무당파의 제자들도 일제히 뒤를 따라 화산에게로 향했다.
한편 현종은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으음.’
무당의 정예들이 내뿜는 기세에 숨이 턱 막혀 왔다.
‘무당…….’
실전을 치른 이들이다. 딱히 위협하기 위해 기세를 뿜어 대는 것은 아니나, 자연스레 무겁고도 진중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쪽으로 옵니다, 장문인.”
“알고 있다.”
현종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들을 주시했다.
과거라면 감히 무당의 장문인과 대면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화산파가 과거와 달라졌듯이, 그의 입지 역시 과거와 같지 않다.
화산파의 장문인이자 천우맹의 맹주로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야 할 때였다.
‘하나…….’
현종의 등이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다.
그의 입지야 분명 달라졌다. 그러나 꼭 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 저들이 현종을 대하는 방식 역시 달라졌을 게 분명했다.
선두에 선 허도진인이 쏘아 보내는 눈빛이 현종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때였다.
“뭐 주워 먹을 거 있다고 저렇게 슬금슬금 다가온대요?”
긴장을 확 깨는 목소리에 현종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그의 뒤에 따라붙은 청명이 양손을 뒷머리에 올린 채, 심드렁하게 무당 쪽을 보고 있었다.
“……청명아.”
“쟤들도 엉덩짝에 불이 붙기는 한 모양이네요. 예전 같으면 봐도 무시하고 갔을 텐데.”
“…….”
“장문인.”
“으응?”
“너무 구박하지는 마세요. 요즘 속이 타 죽을 텐데, 넓은 마음으로 받아 줘야죠. 그래도 쟤들이 알고 보면 우리 후예들이잖아요?”
“…….”
현종은 멍하니 그 말을 듣다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무당을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이는 천하에 오직 청명뿐일 것이다. 심지어 소림의 방장조차 무당을 저리 쉽게 보지는 못한다.
“후우.”
어쨌든 그 덕에 몸을 옥죄던 압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느낌이었다. 이제 다가오는 허도진인을 한결 편한 얼굴로 바라볼 수 있었다.
두 문파간의 거리가 가까워지며 자연스레 발이 느려졌다. 허도진인은 느긋해진 걸음으로 현종을 향해 다가왔다.
현종이 가만히 양손을 모아 공수를 취해 내밀었다.
“무당 장문인을 뵙습니다.”
“무당의 허도입니다. 화산 장문인을 뵙습니다.”
허도 역시 마주 포권 했다. 깊이 고개를 숙였던 그는 고개를 들고 사람 좋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천하후기지수 비무대회 이후로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장문인.”
“그렇습니다. 다시 만나 뵙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의례처럼 인사가 오가고, 허도진인은 빙그레 웃었다.
“그 당시만 해도 화산이 이렇게까지 명성을 떨칠 거라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경하드립니다.”
“과찬이십니다. 화산이 제아무리 이름을 높였다고는 하나, 어디 천하무림의 북두라는 무당에 비견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하하하하. 과한 겸손은 비례가 되는 법 아니겠습니까? 장문인께서는 이제 맹주가 되셨는데, 그것마저 운이라 하시면 천우맹의 맹도들이 가슴을 칠 일이지요.”
“다들 저를 좋게 보아 주신 덕분입니다. 실력과 인망으로 맹주를 결정했다면 제가 어찌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습니까? 무거운 짐에 어깨가 내려앉을 판입니다.”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조걸이 윤종에게 속삭였다.
“사형, 사형. 말씨는 두 분 다 엄청 부드러운데, 듣고 있자니 무시무시한 느낌인데요?”
“걸아.”
“예?”
“……주둥아리 닫거라. 여기서 사고 치면 정말 뼈까지 갈아 마셔 버릴 테니까.”
“……네.”
조걸이 양손으로 조용히 제 입을 막았다.
그때 허도진인이 가만히 현종에 뒤에 서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 뒤에 선 이들이 누구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녹림칠십이채의 사람들입니다.”
“……그렇군요.”
허도진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반응의 전부였다.
사파를 끌고 다닌다는 걸로 분명 딴죽을 걸어올 것이라 예상했던 현종은 살짝 묘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설마 허도진인이 이 부분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을 줄이야.
“왜 그러십니까?”
“아…… 뭔가 변명을 해야 할 줄 알았습니다.”
현종의 말에 허도진인은 그저 웃었다.
“장문인께서 높은 덕으로 녹림의 무뢰배들조차 교화시키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저 부럽습니다. 한평생 도를 추구해도 저는 그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현종이 당황하여 고개를 숙였다.
허도진인은 흐뭇한 낯으로 웃으며 화산의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날카롭구나.’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기세가 무당에 못지않다. 물론 무당보다는 진중하지 못하고, 일견 가볍게까지 느껴진다. 빈말로라도 진중한 도가의 기운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대신에 맑고 자유롭다.’
새삼스러운 감상이 불쑥 들었다.
‘언제부터 무겁고 진중한 것이 도가를 대표하게 되었는가?’
애초에 도란 얽매이지 않는 것이었을 텐데.
잠깐 생각에 잠겼던 허도진인이 이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현종을 보았다.
“지난 무한에서…….”
무한이라는 말이 나오자 현종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한에서 있었던 비무.
화산에게야 즐거운 기억이지만, 허도진인에게는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기억일 것이다. 그 이야기를 굳이 허도진인이 화산파 앞에서 꺼내고 있는 것이다.
“저희 제자들이 망신을 당했다 하여 심히 언짢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현종은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답했으나 의외로 허도진인의 얼굴은 선선했다.
“저도 내심은 그리 생각한 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리 화산의 제자들을 보고나니, 그게 결코 운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허도진인이 다시 한번 현종을 향해 포권 했다.
“많은 것을 배워 갑니다, 장문인.”
“이러지 마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장문인께서 하신 일이 없다면, 화산이 어찌 오늘날에 이르렀겠습니까.”
현종이 다시 한번 겸양의 말을 뱉으려는 순간, 허도진인의 시선이 다른 누군가에게로 정확히 꽂혔다.
“그렇지 않은가, 화산신룡?”
“저희 장문인께서 좀 대단하시긴 하죠.”
“하하. 내 말이 그 말일세.”
“역시 무당 장문인 정도 되시니까 그걸 딱 알아보시네요! 이래서 사람은 큰 자리에 있어야 한다니까요.”
“하하하하핫.”
“헤헤헤헤헤!”
두 사람은 일견 죽이 잘 맞는 것처럼 마주 보며 웃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겉으로 보이는 환한 표정과 달리 날카롭게 서로를 관찰하며 파악하고 있었다.
“자네가 허공을 꺾었다지?”
“네, 실력으로요.”
“…….”
일순간 말문이 막힌 허도가 현종을 잠깐 돌아보았다. 하지만 현종은 이미 뒷짐을 진 채 먼 하늘로 시선을 돌린 뒤였다.
‘저건 나도 어쩔 수 없으니 댁이 알아서 하시오’란 표현이었다.
“실력이라……. 그래, 실력이지. 허공은 운 따위로 꺾을 수 있는 녀석이 아니니까.”
“네. 굉장하더라고요.”
“그런 이를 꺾은 자네는 더 굉장하고?”
“헤헤. 꼭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그렇게 콕 집어서 말씀해 주시니 제가 부정하기가 어렵네요. 엣헴!”
“…….”
허도진인이 다시 화산파를 쭉 둘러보았지만 누구도 그를 마주 보지 못했다.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그들의 문도가 저 무당 장문인 앞에서도 배를 내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숨고 싶다.’
‘창피해서 죽을 것 같다.’
“하하.”
허도진인은 소리 내어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대단한 것을 대단하다고 말하는데 거리낌이 있을 리 없지. 노자께서도 쓸데없는 예의가 인간사를 좀먹는다 말씀하신 바 있으니.”
시원스런 그의 말에 청명은 두 눈에 이채를 띠고 허도진인을 보았다.
“다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걸세. 우리 아이들이 자네를 이기기 위해서 지금도 침식을 잊은 채 수련하고 있으니 말일세.”
“도전은 언제든 환영이죠.”
“도전이라…….”
잠깐 곱씹던 허도진인이 빙긋 웃었다.
“그리 말했으니, 다음에 우리 아이들이 도전하거든 귀찮다 물러서지 말게나.”
“어…… 그건 약속 못 드리겠는데.”
“하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허도진인은 가벼운 대화를 마무리 짓고 현종에게 말했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가던 길을 재촉해야 할 상황이라 더 담소할 수 없음이 아쉽습니다.”
“또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예. 그때 또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허도진인이 정중하게 포권 했다.
“그럼.”
“예, 장문인.”
현종이 정중하게 맞포권 하자 허도진인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출발하자.”
“예!”
멀뚱히 서 있는 화산파를 두고 무당파가 먼저 달려 나갔다. 그 뒷모습이 조금 멀어지고서야 현종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크구나.”
무당이 화산을 얼마나 싫어할지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허도진인은 단 한 순간도 예의와 존중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화산을 높이 치켜세워 주기까지 했다.
현종은 자신이라면 저럴 수 있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명문의 장문이란 무릇 저런 것이겠지.’
자세는 낮되, 그 낮은 자세에서 되레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 느껴지는 사람. 차라리 허도진인이 그들을 향해 노골적으로 이를 드러냈다면 이런 압박을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뒤를 받치고 있던 무당파 역시 이전의 비무에서 쌓았을 감정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아직은 갈 길이 멀구나.’
그도, 화산도 저 무당에 비견되기에는 아직은 부족하다.
“흐으음.”
한편 현종의 뒤에서 팔짱을 낀 채 멀어지는 무당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청명은 씩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직은 잘나셨다 이거지?’
허도진인을 비롯한 무당파 사람들이 무례를 저지른 부분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청명은 오히려 그래서 허도진인의 태도가 영 거슬렸다. 스스로를 올바르게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여유가 있다는 것과 같으니까.
“어디 그 여유가 언제까지 갈지 한번 보자고.”
무당파를 노려보는 청명의 두 눈이 날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