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3화. 오직 그만이 가치 있을 뿐이오. (3)
“…….”
강변에 모여든 이들을 보는 백천의 낯빛이 검게 죽었다.
“……얘들아.”
“예, 사숙.”
“……장문인께서 가신다고 하더냐?”
“그런 것 같은데요?”
조걸의 대답에 윤종이 말을 보탰다.
“사실 뭐…… 그런 자리에 빠지는 것도 좀 그렇긴 하죠.”
“일단 현영 장로님이 눈 돌아가신 것 같던데…….”
“……왜?”
“무당 놈들만 명성을 날린다는 말을 듣자마자 거의 뒤집어지셨다고 하던데요? 금방이라도 장문인 멱살 잡으실 기세로.”
“…….”
“뭐 그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요, 사실.”
백천이 멍하니 듣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뭐 그도 그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그만 해도 최근 들어 무당에 대한 감정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으니까. 예전에는 가장 싫은 문파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종남이라 대답했지만, 이제는 숨 한 번 내쉴 시간 정도는 고민을 한 뒤 종남이라 대답할 것이다.
응? 같은 거 아니냐고?
많이 다르다. 적어도 이제는 종남이랑 무당을 비교는 해 봐야 한다는 뜻이니까.
예전엔 비교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어디 무당 따위가 종남에 비빈다는 말인가? 종남과 비교하려면 적어도 마교 정도는 와야 가능했다.
“그래, 그건 알겠는데…….”
“예, 사숙.”
“그럼 저 양반들은 왜 저러고 있는 거냐? 설마 같이 가려고?”
백천의 시선이 화산의 제자들 뒤로 쭉 도열한 산적들과 수적들에게 향했다.
그들 역시 하나같이 ‘우린 왜 이러고 선 거야?’라는 얼굴로 멀뚱멀뚱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 당황스럽겠지. 백천도 당황스러운데 저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윤종이 한숨을 쉬며 답했다.
“안 그래도 한번 말려 봤는데…… 말이 안 통합니다. 다 끌고 간답니다.”
“……왜?”
“녹림이야 그렇다 치고 수적 놈들은 여기다 두고 가면 다 도망간다고, 그 꼴은 죽어도 못 본답니다.”
“…….”
어……. 맞지.
확실히 수적들을 풀어주면 안 되는 건 사실이다. 지금 저들은 노역으로 제 죗값을 치르는 중이니까.
일을 저질렀으면 수습을 해야 한다. 수적들을 모조리 다 죽여 버릴 게 아니라면, 포로로 잡혔던 이들이 풀려나 양민들에게 해코지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 역시 화산의 역할이다.
문제는…….
“그렇다고 각 명문 거파들이 다 모이는 자리에 수적이랑 산적을 끌고 간다고?”
“그런 모양인뎁쇼?”
백천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수적들을 신명나게 걷어차고 있는 청명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이 수적 새끼들은 줄 하나 똑바로 못 서나! 어디 장문인 계시는데 짝 다리를 짚고 있어? 왜? 불편해? 내가 진짜 불편한 게 뭔지 보여 줘?”
“아, 아닙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으면 맞아야지, 이 새끼야!”
수적의 턱주가리를 돌려 버린 청명이 두 눈을 부라렸다.
그 기세에 움찔한 수적들은 물론이고 산적들까지 목을 움츠리고 청명의 눈치를 살폈다.
“…….”
그 쭈글쭈글한 자세에 미묘한 동질감을 느낀 백천은 차마 더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새끼에 앞에 서면 정파고 사파고 할 것 없이 모두가 공평해진다.
“좋아. 이제 좀 마음에 드는군. 준비 끝났습니다, 장문인!”
현종의 입에선 대답 대신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뭔가 말을 할 듯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결국 고개만 내젓고 말았다.
‘압니다, 장문인.’
‘저희도 압니다.’
현종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모두가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심지어 왜 그 말을 차마 입 밖에 내지 않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소 귀에 경을 외는 것은 군자가 할 일이 아니잖은가.
“그…….”
앞에 도열해 있는 도사, 산적, 수적이라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조합을 보던 현종의 어깨가 축 처졌다.
“……출발하자꾸나.”
“예!”
에잉, 하고 몸을 돌려 버린 현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화산과 녹채, 그리고 대경채의 수적들까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인원이 강가를 빠르게 질주했다.
화산이야 원체 달리는 데 특화되어 있는 문파고, 녹채의 산적들도 녹림에서는 정예인 데다가 산지를 타는 데 익숙해서 나아가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죽어나는 건 수적들이었다.
“끄으으으…….”
“주, 죽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용케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그 이유야 무척 간단했다.
‘뒤처지면 죽는다.’
‘저 인간은 진짜 죽일 거야!’
그들의 뒤쪽에서 청명이 뒷짐을 진 채 따라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뒷짐 지고 걷는데 왜 우리가 달리는 속도랑 비슷하냐고!’
‘저게 사람이냐, 귀신이냐!’
확실한 건 사람이건 귀신이건, 뒤처지는 이는 저놈에게 반드시 맞아 죽는다는 사실이었다.
“빨리빨리 달려, 이 수적 놈들아! 그 강바닥 좀 팠다고 너희 죄가 없어진 줄 알아? 어디 뒤처져 봐. 그 김에 밥그릇 하나 줄여 보자!”
“히이이이익!”
꽁지가 빠져라 달리는 수적들을 뒤쫓는 청명을 향해 백천이 천천히 따라붙었다.
“청명아.”
“왜?”
“이리 급하게 갈 것 있느냐?”
“히야, 동룡이 많이 컸네. 이제 수적들 걱정까지 해 주는 거야?”
“그게 아니라, 인마! 네 말대로라면 적당히 얼굴이나 비추고 끝낼 일이잖아. 그런데 괜히 일찍 도착하면 싸워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하는 말이다.”
“오?”
순간 눈을 휘둥그레 뜬 청명이 백천을 빤히 보았다. 뭔가 기분이 슬그머니 나빠진 백천이 퉁명스레 물었다.
“왜?”
“아니, 드디어 사숙이 생각이라는 걸 하는구나 싶어서. 지금까지는 나는 목 위에 붙은 그게 고급 영웅건걸이인 줄 알았거든.”
“이 새끼가 진짜?”
백천이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려 하자 그 직전에 청명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한데.”
“응?”
“……뭔가 좀 찝찝해서.”
“……뭐가?”
“그냥.”
짧게 대답한 청명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뒤틀렸다.
‘여기까지는 해야 할 일이었지.’
화산도 천우맹도 아직은 약하다.
물론 천우맹이 구파와 오대세가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입지를 다진 것은 분명하지만, ‘상대할 수 있다’가 ‘대등하다’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천우맹은 여전히 구파일방이 기침 한 번만 해도 몸살을 앓아야 할 정도로 나약한 세력에 불과하다.
‘사파 놈들이 필요해.’
천우맹은 그 영향력을 사방으로 떨치고 있다. 그럼에도 구파일방이 지금까지 천우맹을 좌시한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체면.
고고한 명문을 자처하는 이들이 협행을 하는 같은 정파를 대놓고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
청명이 지금껏 구파를 마구 두들겨 팰 수 있었던 이유도 저들에게 체면이 생각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숙.”
“응?”
“사람이 언제 체면을 내려놓는 줄 알아?”
“……글쎄?”
“제 밥그릇을 뺏길 때야.”
“갑자기 그게 뭔 말이냐?”
청명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냉소했다.
‘거의 한계까지 왔지.’
명분이니 체면이니 하는 것도 제 밥그릇이 아직 멀쩡할 때나 차리는 것이다. 이대로 천우맹이 커져 나간다면 저들도 결국에는 그런 허울들을 집어던져 버리는 날이 올 것이다.
애초에 구파일방을 움직이는 행동 원리가 협의가 아니라는 건 뼈저리게 실감하지 않았는가?
제가 먹어야 할 쌀을 빼앗긴다고 여기는 순간, 저들은 과거 화산에게 했던 짓을 똑같이 반복하려 들 것이다.
천우맹의 가치를 훼손하고, 천우맹에 속한 문파들을 물어뜯어 실속을 차리려 하겠지. 공격받던 화산을 돕기는커녕 얼씨구나 하며 제 이득을 챙겼던 그때처럼.
‘한 번은 당해도 두 번은 안 당해 준다, 개자식들아!’
그 꼴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저들이 움직일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이 싸움이 천우맹 대 구파일방의 양자 구도로 흘러간다면 결과는 뻔하다.
‘못 이겨.’
시간이 필요하다. 천우맹에 속한 문파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그 결속을 더욱 단단하게 다질 시간이!
그러니 당장은 구파일방의 눈을 돌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쨌거나 아직 저들이 명분과 체면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할 때 말이다.
“여기까지는 맞는데.”
“……자꾸 뭔 소리냐? 좀 알아듣게 얘기해라.”
청명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그런데 돌아가는 모양새가 좀 이상하다는 말이지.”
“어?”
“흑룡채로 놈들이 모여 든다는 건, 흑룡채가 장강을 버리고 물러나지 않았다는 거잖아?”
“……그야 그렇겠지. 아무도 없는 곳에 모여들지는 않을 테니까.”
“그게 말이 안 돼.”
“응?”
청명이 눈을 부라렸다.
“수적들이 뭐 그리 통뼈라고 소림이랑 무당, 남궁이 일시에 쳐들어오는데 버티고 있어.”
“청성도 왔어.”
“조무래기는 빼고.”
백천은 기가 막혔다. 청성의 장문인이 지금 이 말을 들었다면 게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갔을 것이다.
저 쟁쟁한 구파일방에 속한 문파를 조무래기라고 칭하는 사람이 세상에 이놈 빼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수적들의 생리를 보면, 일단은 도망가는 게 맞아. 저놈들은 구파와는 달라. 체면이고 뭐고 따지지 않는 놈들이니까. 저들끼리야 뭐 체면을 차릴지 모르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문파의 장이잖아. 수하들이 아직 싸우고 있는데 도망이야 치겠어?”
“사파는 그런 거 없어. 일단 내가 살아야 세력도 있고 수하도 있는 거니까. 정파는 문파가 우선이지만, 사파는 자기가 우선이다. 그래서 사파야.”
“…….”
“그런데 흑룡채가 아직 버티고 있단 말이지.”
청명은 턱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건데.’
이건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그가 생각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의 계획대로라면 저들이 장강에서 물러나는 것까지는 외통수였다. 그런데 그 외통을 밟지 않는다는 건 둘 중 하나를 의미한다.
하나는 이대로 패하겠다는 것.
다른 하나는…….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누군가가 봤다는 거지.’
생각에 잠긴 청명의 입가에 웃음이 스쳤다.
‘재밌어.’
누굴까?
알 수 없다. 아니, 알 수 없어야 한다.
하지만 청명은 왠지 알 것 같았다. 이토록 찝찝한 기분이 들게끔 일을 벌이고 있는 장본인이 누군지 말이다.
청명의 머릿속에 자꾸 하나의 눈빛이 어른거렸다.
피처럼 붉은 입술 위로 보이던, 검게 일렁이는 두 눈이.
‘장일소.’
두 번의 생에 걸쳐 수없이 많은 이들을 만났고, 수없이 많은 이들과 싸웠다.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이 강호의 어느 누구도 청명의 발끝에조차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청명조차도 그렇게 기묘한 눈빛을 직면한 건 맹세코 처음이었다.
‘달라.’
마교인들의 두 눈에 담긴 광기와는 다르다.
천마의 두 눈에 자욱한, 끝없는 허무와도 다르다.
그건…….
“청명아! 앞에!”
“응?”
골몰해 있던 청명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한 무리의 무인들이 보였다.
‘적?’
아니, 아니다.
청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빤히 보았다. 두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무복과 한 손에 들린 장검. 가슴께에 새겨진 선명한 태극 문양.
“하…….”
웃음을 흘린 청명은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이거…… 귀한 분들이 마중을 나오셨네. 황송해서 원.”
무당파.
어쩌면 지금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들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선두에서 그들을 이끄는 무당 장문인, 허도진인의 두 눈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빛이 화산파를 향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