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2화. 오직 그만이 가치 있을 뿐이오. (2)
“고생하셨습니다, 방주님.”
“흐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장일소를 보며 호가명이 빙그레 웃었다.
“아니, 이제 련주님이라 불러야겠군요.”
“낯 뜨겁게 련주는 무슨! 됐다.”
장일소는 거창한 건 질색이라며 조금 머쓱하게 손을 가볍게 내저었지만 호가명은 여전히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르시지요.”
“흐음.”
장일소는 느긋하게 걸어 네 마리의 백마가 매여 있는 사두마차에 올랐다. 그가 탈 마차답게 더없이 화려하게 치장된 마차는 겉모습만큼이나 그 내부도 사치스러웠다.
장일소가 마차에 오르자 호가명이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뒤따라 올랐다. 두 사람이 마차에 타기 무섭게 말들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호가명이 답지 않게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운이 좋았지.”
“그게 어디 운이겠습니까.”
호가명은 안다. 이 그림을 만들어 내기 위해 장일소가 얼마나 긴 시간을 노력해 왔는지 말이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들였던 노력이 마침내 성과를 낸 것이다.
“이제 한 발짝일 뿐이다.”
하지만 장일소는 장신구가 주렁주렁 달린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겉으로야 고개를 숙이고 동조하는 척하지만, 저 구렁이 같은 것들이 순순히 나를 따를 리가 없지. 속으로는 나와 만인방을 앞으로 내세우고 제 잇속을 차릴 속셈뿐일 터.”
련주가 된다는 건 그런 것이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연합의 련주 자리는 권력과 힘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막대한 이문이 남는 자리다. 반면에 처음 시작하는 연합의 련주 자리는 손해 볼 일밖에 없다.
연합을 유지하기 위해서 서로 조율하는 단계에서는 모두가 제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결국 만인방이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게 분명하다.
저들이 서로 련주가 되겠다고 나선 것은 체면치례였을 뿐, 정작 등을 떠밀어 주었으면 다들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이 연합의 옥좌는 독사를 꼬아 만들었으니까. 한순간만 틈을 보여도 극독을 품은 이빨이 전신을 물어뜯을 게 자명했다.
“하지만 그 역시 방주께서 원하신 바가 아닙니까?”
“가명아.”
“예, 방주님.”
“내가 전에 말했지?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단다.”
장일소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배부른 돼지들이야 남는 밥이나 던져 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굶주린 늑대는 먹다 남은 밥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법이야. 사냥이라는 건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
장일소가 검지로 제 입술을 한차례 훑었다. 피처럼 붉은 그의 입술이 요사스런 빛을 발했다.
“목숨만큼 중요한 걸 얻고 싶다면 목숨을 거는 건 너무도 당연하지.”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호가명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장일소를 바라본다.
굉장한 일이다.
과거 마교와의 전쟁 이후 사파들이 서로 연합하여 한 세력을 구축한 적은 없다. 무려 백 년 만에 탄생한 사파 연합. 그 련주 자리를 장일소와 만인방이 꿰찬 것이다.
저 쟁쟁한 신주오패의 수장들 사이에서 가장 어리고 경력도 일천한 장일소가 말이다. 호가명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결코 당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장일소는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해내고도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응당 얻어야 할 것을 얻었다는 듯 태연했다.
장일소의 눈은 이미 다음을 바라보고 있다. 이미 손에 쥔 것에는 관심을 주지 않으니까. 장일소는 사냥한 짐승의 살을 채 다 뜯기도 전에 다른 사냥감을 찾는 사람이다.
“화산의 애송이들 덕분에 계획이 오 년……. 아니, 십 년은 더 빨라졌구나.”
“그렇습니다.”
“그놈들은 내가 천우맹의 창설을 진심으로 축하하러 갔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핫!”
장일소가 배를 잡고 웃어 댔다.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 준 격이지 않은가.
강호는 고여 버린 물과도 같았다. 그 누구도 부족할 게 없다. 그러니 그 누구도 위험을 무릅쓸 일이 없다.
그토록 평온하기 짝이 없었던 강호의 세력 균형을 저 천우맹이 단번에 깨어 버린 것이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십 년은 더 걸렸을 일. 하지만 천우맹……. 아니, 화산의 존재 덕에 이 많은 것을 단번에 이룰 수 있었다.
“정말 기껍고 즐거운 일이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더없이 위험해. 호기를 놓칠 수 없어 움직이기는 했지만, 아직 준비가 덜 됐단 말이지.”
“위험할수록 얻는 것은 크겠지요.”
“그렇지, 그렇지. 역시 가명이 너는 내 마음을 아는구나.”
배 속에 네 마리의 독사를 넣었다.
안온함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독사들은 그의 위장을 물어뜯고, 배 밖으로 튀어나오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장일소는 꼼짝없이 목숨을 내어 놔야 한다.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
장일소의 위산이 그들의 몸 역시 녹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누가 휘두르게 될지는 지켜봐야 알 일이니까.”
피를 머금은 듯 붉은 장일소의 입술이 살짝 열리며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섬뜩하리만치 날카로웠다.
“가자꾸나.”
“직접 가실 생각이십니까?”
“가명아.”
“예, 방주님.”
“사람은 결코 원한을 잊지 않아야 하잖니. 하지만 은혜 역시 그렇다.”
호가명이 살짝 의아하다는 눈으로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은혜를 베푼 이가 있다면, 받은 입장에서 그 은혜를 갚는 것 역시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옳으신 말씀이십니다만……. 그렇다면?”
“갚아야지. 부족할지는 모르겠지만, 갚아야 해.”
장일소는 나지막이 소리 내어 웃었다.
“물론 그들이 내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할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어쨌거나 성의는 표하는 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장일소의 미소를 본 호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는 군사라는 자리가 무색하다.
그는 머리 쓰는 일로는 어디 가서도 뒤지지 않으며 누구라도 뒤흔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장일소만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호가명은 그 사실에 딱히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장일소는 장일소다. 평범한 인간이 재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호가명이 흘끗 보니 장일소는 어느새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사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호가명은 숨을 죽였다.
눈을 감은 장일소가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제 시작이다.’
겨우 한 걸음을 내디딘 것에 불과하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진 길은 앞으로도 한참 험난한 가시밭길일 것이다. 걷는 것만으로 살이 찢어지고, 가시가 뼈에 박힐 테다.
하지만, 그곳을 걸어 얻을 것을 생각하면 장일소는 가시밭길이 아니라 불구덩이도 웃으며 걸을 수 있었다.
굶주린 자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장일소의 이 지독한 허기가 사라지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 * *
“싸움이 안 일어나?”
“그런 모양입니다.”
청명은 냅다 임소병의 멱살을 움켜잡고 짤짤 흔들어 댔다.
“그게 뭔 소리야? 더러운 사파 새끼들이랑 비열한 정파새끼들이 한데 몰려 있으면 응당 다들 눈깔을 까뒤집고 싸워야지! 왜 안 싸워, 왜! 판을 이렇게나 깔아 줬는데!”
“끄륵. 이, 이것 좀 놓고!”
“아니! 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면서 서로 죽어나야 할 것 아냐! 그래야 내가 꿀을 빨지!”
그 사악한 말을 들으며 백천이 한숨을 쉬었다.
“청명아…….”
“응?”
“그런 말은 남들 안 듣는 데서 해야지.”
“아.”
이제는 도사가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는 백천이었다.
‘사갈 같구나.’
더러운 사파 놈과 비열한 정파 놈이라니. 저놈의 머릿속에 과연 자기편이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가?
“콜록! 콜록! 그게…… 수로채 놈들이 정파 놈들만 보면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나는 모양입니다!”
“그걸 못 쫓아가? 소림 새끼들은 경공은 엿 바꿔 먹었대? 땡중 이 새끼 어디 갔어? 이놈이고 저놈이고 꼭 찾으면 없어!”
“경공은 의미가 없습니다. 배를 타고 물로 나가는데 무슨 수로 따라가겠습니까?”
“그럼 배를 타고 쫓아가야지!”
“……그럼 수적 놈들이 공격해 배를 부술 것 아닙니까.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잘된 거지! 땡중 새끼들이 다 물에 빠질 건데 그날은 잔칫날이지!”
“…….”
망연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던 임소병이 힘없이 백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백천은 차마 그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미안합니다.’
양민들 등쳐먹고 사는 산적 두목 놈이 명문 정파 제자의 인성에 대해 따져 묻고 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에 반박조차 못 하게 만드는 이가 바로 청명이다.
“여튼 그…… 아니, 이것 좀 놓으시고. 여튼…… 그놈들이 수채를 버리고 장강에 나간 모양입니다.”
“계속 그러고 있을 수는 없을 텐데?”
“아마 지금쯤…… 예, 비빌 언덕을 찾아야 하니까 흑룡채 쪽으로 몰리고 있을 겁니다.”
“엥? 흑룡채?”
임소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강수로십팔채의 녹채 같은 곳이지요. 다만 녹채가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이동식 산채 같은 곳이라면, 흑룡채는 장강수로채의 힘이 집중된 곳입니다. 흑룡왕은 저처럼 관리형 수장이 아니라 황제 같은 사람이거든요.”
“모이라고 한 건가, 그럼?”
“아니요. 원래 산적이나 수적들의 생리가 그렇습니다. 각자 알아서 도생하라고 해도 일단 비빌 만한 데로 모입니다. 그게 뭐 도와달라는 건지 혼자는 못 죽겠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친놈들인가?”
“도적 놈들이 다 그렇지요. 쯧쯧, 못 배워 먹은 놈들.”
백천은 결국 눈을 감아 버렸다.
네가 그 도적입니다, 네가.
“여하튼 그래서 지금 흑룡채로 모이고 있다는 거지?”
“그렇게 예상하고 있습니다.”
“소림이나 무당도 다들 거기로 가고 있고?”
“아마 그렇지 않겠습니까?”
청명이 임소병의 멱살을 단단히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야지! 사숙!”
“……왜?”
“장문인께 빨리 전해서 애들 다 준비시켜! 흑룡채로 간다!”
“거긴 또 왜…….”
“왜는 왜야? 흑룡채에 수적 놈들이랑 정파 새끼들이 다 모이면 한판 크게 붙을 거 아냐!”
“……자꾸 정파 새끼들이라고 하지 마.”
계속 그러니까 우리가 사파 같잖아, 이 새끼야!
“그만한 대전투가 벌어지는데 우리만 멀리서 뒷짐 지고 있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애초에 판은 우리가 다 깔았는데 저 새끼들이 그거 다 먹어치우면 나는 잠도 못 자!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준비시켜!”
“그럼 전투에 참여할 셈이냐?”
백천이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물었다. 전투라는 말에 자연히 호승심이 치솟았다. 하지만 그 순간.
“아니.”
“……응?”
“가서 뒷짐 지고 구경할 건데? 그 새끼들 서로 죽이는데 우리가 왜 껴?”
피시시식.
뜨겁게 타올랐던 백천의 마음에 청명이 찬물을 들이부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백천이 힘없이 물었다.
“……좀 전엔 뒷짐 지고 있으면 안 된다며.”
“거기 가서는 괜찮아. 사람들이 직접 볼 것도 아닌데, 화산도 거기 있었단 얘기만 나오면 되지.”
“…….”
“거지새끼 잘 구슬려서 우리도 열심히 싸웠다고 소문 퍼뜨리라고 하면 돼. 아니면 뭐 수적 놈들 시켜서 퍼뜨리지 뭐. 지들이 당했다는데 안 믿겠어?”
“그건 저희도 잘 퍼뜨려 드릴 수 있습니다. 낄낄낄낄.”
“그렇지! 낄낄낄낄!”
죽이 맞아 웃어젖히는 청명과 임소병을 보고 있으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미리 전병이랑 술도 준비해. 원래 남이 치고받는 거 보면서 먹는 술이 꿀맛이거든!”
“…….”
“이히히히힛! 다 죽었으면 좋겠다! 히히히히힛!”
백천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맑고 평화로웠다.
‘원시천존이시여.’
이제 진짜로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발 이 새끼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