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0화. 개처럼 살든가, 늑대처럼 죽든가. (5)
“이…….”
그렇잖아도 상황이 좋지 않은 마당에 정곡을 찔린 흑룡왕은 여지없이 발끈했다. 두 눈에서 불꽃을 뿜으며 노호성을 내지르려는 찰나, 천면수사가 담담한 목소리로 끊고 들어왔다.
“목이 떨어진다라…….”
그는 빙긋 웃었다.
“패군이 우리 목을 자르기라도 한다는 건가?”
장일소 역시 미소로 응대했다.
“무서운 말씀을 하시네요.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천면수사의 부드러운 눈빛이 장일소에게로 향했다.
“하면 누가 우리의 목을 친다는 건가?”
“몰라서 물으시는 건 아닐 테지요.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이 자리에 오신 분이라면 제가 굳이 말을 나눌 이유도 없습니다.”
“하하하…….”
웃음은 끊이지 않았지만 천면수사의 두 눈에선 섬뜩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얼굴이야 한없이 사람 좋아 보이지만, 사실 신주오패의 수장 중에서도 가장 잔혹하다 불리는 이가 바로 천면수사다. 정보를 다루는 그의 특성상 인간을 고문하고 죽이는 것 따위는 죄악이라 여기지도 않는다.
“농이 지나치군, 패군.”
“흐음.”
장일소는 말없이 제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무시라고도 느껴질 수 있는 행위에 천면수사의 눈이 가느스름해지는 순간, 장일소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장강수로십팔채.”
“…….”
“다음에는 아마…… 흑귀보.”
만금대부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늘 무감한 그가 이만한 감정을 내보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저 짧은 움직임이 그의 내심이 지금 얼마나 불편한지 말해 주고 있었다.
“그 뒤에는 만인방. 마지막으로 하오문.”
“…….”
“차례차례 사냥당하고, 다들 목이 떨어지겠지요. 아니면 지금 가진 것들을 모조리 내려놓고 도망자 신세가 되거나.”
쿵!
흑룡왕이 다탁을 내리쳤다.
“누가 감히 그럴 수 있다는 말이냐?”
“구파일방.”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에 흑룡왕은 순간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입을 닫았다.
“…….”
“그리고…… 아마 천우맹까지.”
으드득.
얼굴을 흉신악살처럼 일그러뜨린 흑룡왕이 장일소를 노려보며 말했다.
“구파일방은 그렇다 치자. 한데 그 천우맹 잡것들까지 논해야 한다는 말인가?”
“잡것?”
장일소가 빙글빙글 웃으며 흑룡왕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이 중 단독으로 천우맹을 상대할 수 있다고 장담하시는 분 계십니까?”
“…….”
“사천당가와 남만야수궁, 북해빙궁에 저 화산……. 게다가 녹림까지 합류한 천우맹을 누가 상대할 수 있습니까? 그 잘난 장강수로십팔채가?”
“이놈이…….”
“시대가 변했어요, 흑룡왕. 장강수로십팔채의 이름은 더는 세인들에게 두려움을 주지 못합니다.”
“흠.”
만금대부가 고개를 까딱였다.
“확실히 천우맹을 단독으로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하지만 천우맹이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는 건 이상론이다. 그들은 일단 서로 거리가 너무 멀고, 느슨한 결속으로 얽혀 있다. 천우맹의 모든 힘이 한곳에 집중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아.”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다만…….”
장일소의 입꼬리가 요사스럽게 올라갔다.
“천우맹은 존재 자체만으로 문제입니다.”
“…….”
“알고들 계시겠지만, 천우맹이 없었다면 소림과 무당은 절대 움직이지 않았을 겁니다.”
만금대부가 부인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랬겠지. 얻을 것이 없으니.”
장강을 토벌하는 건 분명 명성과 호의를 가져올 만한 일이다.
하지만 소림이나 무당, 남궁세가 같은 곳은 더 이상의 명성을 필요로 하지 않다. 그건 아직 쌓아올리지 못한 이들에게나 의미가 있는 것. 과할 정도로 이름 드높은 그들이 새삼 명성과 세간의 호의 따위를 탐낼 이유는 없다.
“하지만 천우맹이 있으면 말이 달라지지.”
대체재가 생겨 버린 셈이다.
천우맹이 없다면 아무리 더럽고 아니꼬워도 결국은 모두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사파를 상대하고 그들을 막아 낼 수 있는 문파가 그들밖에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 더는 그들에게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천우맹이 충분한 힘과 능동성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무림사는 늘 같은 일의 반복입니다. 강인한 두 정파가 서로 세력을 다툴 때, 직접적인 전쟁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예컨대, 무당과 소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서로를 죽여 가며 싸워 본 적이 없습니다. 대신…….”
장일소가 이를 드러낸다.
“사냥감을 찾아왔죠.”
“…….”
“내가 더 강한 범이라는 걸 보여 주는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싸워 이기는 것이고, 둘째는…… 더 많은 늑대를 물어 죽여 증명하는 것.”
“……우리가 늑대라 이거로군.”
“그렇습니다.”
장일소가 옆에 놓인 빈 술잔을 하나하나 앞으로 밀었다.
“우선은 장강수로채.”
장일소의 검지가 앞에 놓인 술잔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째앵!
술잔이 날카로운 비명 같은 소음을 내며 쩌억 갈라졌다.
“다음은?”
“…….”
“누구 목이 먼저 잘릴지 내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요. 내기를 한다면 다른 게 더 재미있어요. 내 목이 어느 문파의 측간에 처박힐 것인가. 소림인가, 무당인가, 그것도 아니면 화산이나 당가인가. 쿡쿡쿡쿡.”
장일소는 키득키득 웃으며 세 사람을 천천히 훑었다.
“저는 소림에 걸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거시겠습니까?”
“…….”
모두가 차마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장일소의 말이 결코 허황된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 공격을 받고 있는 입장인 흑룡왕은 물론이고,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 역시 더없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만금대부가 차갑게 잘랐다.
“쓸데없는 사설은 치우지. 시간 낭비니까.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힘을 합쳐야지요.”
“이런 쓰레기들과?”
여과도 없이 나온 쓰레기라는 말에 흑룡왕과 천면수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주둥이 잘 단속하는 게 좋을 것이다, 만금대부. 혀가 도려진 채 죽어 나자빠지고 싶지 않으면.”
“아니면 사지를 잘라 개먹이로 만들어 주는 것도 좋겠지.”
살벌한 목소리들이 흘러나왔지만 만금대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연합 따위야 누구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도 시행할 수는 없지. 우리가 서로를 믿을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맞는 말이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히는군.”
사파는 정파를 증오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사파 역시 증오한다. 정파보다도 훨씬 더 숱하게 싸우고 물어뜯고, 칼을 꽂은 이들이 바로 같은 사파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 기회에 네놈들의 목을 모조리 따 버리고, 그 세력을 내가 먹어치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그것도 좋은 의견이로군.”
세 사람이 순간적으로 뿜어 낸 살기가 취향루를 자욱하게 메웠다. 평범한 이들을 물론이고 웬만한 고수도 속이 진탕이 되어 버릴 지독한 살기였다.
하나 그 순간.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장일소가 누각이 떠나가라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탁자를 쳐 가며 눈물까지 흘리고 웃어 대는 탓에 세 사람이 뿜어 내던 살기가 일순간에 사라졌다. 모두의 시선이 장일소에게 꽂혀 있었다.
“……뭐가 그리 우습지?”
질문이 나오자 장일소는 손을 들어 눈가에 흘러내린 눈물을 부드럽게 훔쳤다.
“아……. 아. 죄송합니다. 아, 거참…… 너무 우스우니 참을 수가 있어야죠.”
“뭐가 그리 우습냐고 물었다.”
“우습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닙니까?”
장일소가 여전히 웃음기 남은 얼굴로 말했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제 발이 이미 늪에 잠긴 줄도 모르고 서로 으르렁대며 싸워만 대고 있으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런 한심한 것들이 신주오패의 수장이라니! 하하하하!”
“……방금 뭐라 지껄였느냐?”
장일소의 붉은 입술이 뒤틀렸다.
“왜?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소?”
“…….”
“짐승도 제 목숨이 위험할 때는, 천적을 가리지 않고 연합하는 법이지. 그런데, 사람이라는 것들이 목숨이 걸린 일에 사사로운 원한을 끌고 들어온다?”
“…….”
표면적으로나마 공손함을 유지하던 말투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장일소가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원한도, 증오도, 너희가 누리는 그 모든 하찮은 감정도 목이 붙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죽고 나면 원한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원한도, 체면도, 실리 따위도 아니야.”
모두가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장일소를 주시했다.
그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장일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존.”
“…….”
“살아남아야 뒤가 있지. 살아남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의미가 없소.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것이오. 거름 더미를 구르는 일이라 해도, 배알 없이 원수의 발을 핥는 일이라 해도!”
이건 신주오패의 수장이라는 지고한 신분에 있는 이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장일소의 진심이 더욱 잘 느껴졌다.
“그런 것에 비하면 어제까지 칼을 겨누던 이의 등을 지키는 일 따위는 별것도 아니지.”
새 술잔에 따른 술을 단번에 넘겨 버린 장일소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모두를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물었다.
“그렇지 않소?”
“흐음.”
천면수사와 흑룡왕의 입에서 슬쩍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확실히 밀려오는 정파 놈들보다 지금 앞에 있는 이들이 더욱 증오스럽다. 그들의 역사는 서로를 죽여 온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하지만 어찌되었든 그들은 사파다. 정파와는 손을 잡을 수 없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정파를 상대하기 위해서 비빌 언덕이라고는 서로밖에는 없는 것이다.
“먼저…….”
만금대부가 입을 열었다.
“이게 일시적으로 끝날 일이라면, 이 모든 논의는 의미가 없지 않나. 수로채만 피해를 보고 끝날 테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요.”
장일소가 딱 잘라 말했다.
“천우맹이 멈추지 않는다면, 구파일방은 자력으로 멈출 방법이 없소. 힘은 그들이 더 강할지 모르지만, 주도권은 이미 천우맹이 쥐고 있으니.”
“…….”
“그리고 천우맹의 머리인 화산은 절대 멈출 곳이 아니지. 그들은 탐욕스럽소. 어쩌면 나만큼이나.”
화산을 떠올린 장일소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눈빛에는 언뜻 광기가 스쳤다.
“어떤 식으로든 그들은 반드시 장강 이남으로 밀고 올 거요. 그럼 구파일방 역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체면 때문에?”
“그것도 맞소. 하지만 정확하게는 천우맹이 장강 이남의 땅을 제 영역으로 차곡차곡 흡수하는 걸 눈 뜨고 볼 수 없기 때문이겠지.”
만금대부가 주판을 다 굴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천우맹과 구파일방, 오대세가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뭉쳐야 한다?”
“그렇소. 그렇지 않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
돌연 미소를 싹 거둔 장일소가 으르렁거리듯 나지막이 말했다.
“개처럼 살든가, 늑대처럼 죽든가.”
“…….”
“…….”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늑대로서 살아남는 거지. 상대를 사냥감으로 여길 수 있는 건, 내가 피해를 입지 않고 사냥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요. 사냥의 대가로 팔이 뜯겨 나가고, 내장을 질질 흘릴 각오를 해야 한다면 감히 사냥이란 말을 입에도 올려선 안 되지.”
한 손으로 얼굴을 틀어쥔 장일소가 말했다.
“거창한 이유 같은 건 아무거나 좋을 대로 가져다 붙이시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두 눈이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명분이 뭐가 되었든 목표는 생존이오. 살아남는 것. 때를 놓친다면 그때는 뭉친다 해도 물어뜯길 뿐이지. 나는 살아야겠소. 반드시 살아남아 내가 얻은 모든 것을 누릴 것이오. 단 한 톨도 놓치지 않고.”
가만 듣던 천면수사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나지막이 소리 내어 웃었다.
“너무 노골적이고 질이 낮아서 뭐라 말도 못 하겠군.”
“…….”
“하지만…….”
그의 두 눈이 새파란 광망을 흘려 냈다.
“틀린 말은 없다. 나 역시 죽고 싶어 안달이 난 인간은 아니야. 살길이 그것뿐이라면 그리해야겠지. 나는 패군과 뜻을 같이하겠다.”
장일소가 입꼬리를 매끄럽게 말아 올렸다.
“지금 이 순간부터, 신주오패는 더 이상 없소.”
드높은 선언이 터져 나왔다.
“남은 것은 네 개의 문파, 그리고 연합! 신주오패가 사라진 곳에는 오로지 ‘사패련(四覇聯)’의 이름만이 남을 것이오!”
천하를 폭풍으로 휩쓸 그 이름.
사패련의 존재가 처음 장일소의 입에서 나온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