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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789화 (786/1,567)

789화. 개처럼 살든가, 늑대처럼 죽든가. (4)

쿵!

흑룡왕이 마지막 계단을 오르며 진노한 범 같은 시선으로 장일소를 쏘아보았다.

“애송이 놈이……. 팔자도 좋구나. 이 먼 항주까지 와서 신선놀음이라니.”

평범한 이였다면 그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장일소였다.

쪼르르륵.

그는 험악한 시선을 보고도 태연자약하게 술잔을 채우며 웃었다.

“앉으시지요.”

“…….”

“이 먼 길을 오셨다는 건 대화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네 목을 따러 온 것일 수도 있지.”

“하하하핫!”

흑룡왕을 마주 보며 크게 웃은 장일소는 제 목을 느리게 문질렀다. 손목에 걸린 장신구가 가볍게 짤랑거렸다.

“이 목에 그만한 가치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천하의 흑룡왕께서 이 먼 길을 친히 오게 만들 정도라니. 이 장일소 헛살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느물거리며 매끄럽게 말하는 장일소의 모습에, 흑룡왕의 눈이 살짝 가느스름해졌다.

‘뱀 같은 놈.’

사파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온갖 모략을 버텨 낸다는 것과도 같다. 겉으로나마 정정당당함을 유지하며 최소한의 명분은 차리려 드는 정파 놈들과는 달리 사파인들은 상대를 쓰러뜨리는 데 방식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신주오패의 수장쯤 되는 이들은 평범한 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귀계를 두 팔과 다리로 뚫고 그 자리까지 올라간 이들이다.

하지만…….

흑룡왕의 차가운 눈이 장일소를 훑었다.

이 남자는 그런 이들과 격이 다르다.

장강수로십팔채, 녹림칠십이채, 그리고 하오문.

그 모든 문파는 나름의 역사를 지닌 곳이다. 당대 신주오패의 수장들은 선대로부터 이어 온 세력을 물려받거나 강탈한 이들. 물론 그 과정이 쉬웠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 분명 바닥부터 기어 오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장일소는 아니다.

이 사내는 말 그대로 맨 바닥부터 기어 올라와 만인방을 만들고, 심지어는 신주오패까지 끌어올린 이다.

그렇기에 장일소가 신주오패의 수장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리고, 그 경력이 부족함에도 누구도 그와 만인방에 신주오패라는 이름을 붙일 때에 비웃지 못한 것이다.

저 화사하고 매끈한 눈웃음 속에 무엇이 숨어 있을지를 생각하니 위장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네 목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 목이 잘려 나가도 딱히 억울하진 않겠구나.”

“목을 드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

장일소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 목을 잘라 돌아가면 장강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저 정파 놈들은 무슨 수로 막을 생각이십니까?”

“……이놈이!”

순간 발끈한 흑룡왕의 두 눈에서 살기가 뿜어지는 순간이었다.

“맞는 말이지.”

바로 옆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언제……?’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상의 중년인이 어느새 버젓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염소수염이 꽤 특징적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딱히 눈에 남지는 않았다. 번화한 길거리를 오가다 보면 하루에도 열 번은 스쳐 지나갈 것 같은, 지극히 평범한 외양의 중년인은 빈 다탁의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목소리를 높이는 거야 누구나 할 수 있지. 하지만 일을 해결하는 건 별개의 문제야.”

“……천면수사(千面秀士).”

흑룡왕이 입술을 짓씹었다.

저자의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저자의 진짜 얼굴이 무엇인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다.

지금 보이는 얼굴은 그저 저자가 만들어 낸 얼굴일 뿐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 어떤 얼굴로도 변장할 수 있고, 심지어 목소리와 체형마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저자가 바로 당대 하오문의 수장인 천면수사이기 때문이다.

“한잔 주겠나?”

장일소가 말없이 옆에 놓인 빈 잔을 잡아 제 앞에 놓았다.

쪼르륵.

그리고 채운 술잔을 들어 천면수사를 향해 밀듯이 가볍게 던졌다.

허공을 날았음에도 가득 찬 잔에선 술 한 방울 흘러내리지 않았다.

잔을 받은 천면수사는 지체 없이 쭉 들이켜고는 다탁 위에 다시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좋군. 취향주인가.”

흑룡왕이 나지막이 비웃음을 흘렸다.

“평소에는 고양이 굴에 사는 쥐새끼처럼 숨죽이고 신중한 척하더니, 남이 내미는 술잔은 턱턱 잘도 받아 마시는군.”

“흑룡왕이 준 술잔이라면 버렸을지도 모르지.”

“……뭐라?”

천면수사가 사람 좋아 보이게 웃었다.

“하지만 패군이 준 술이라면 믿을 수 있지. 적어도 패군은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는 사람은 아니거든.”

“높게 봐 주셔서 감사하외다.”

“별말씀을.”

“이놈들이…….”

분에 찬 흑룡왕이 수염을 파르르 떨며 이를 갈았다.

천면수사는 여전히 빙그레 웃으며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흑룡왕께서는 그 화를 좀 줄일 필요가 있겠군. 지금 이곳에서 제일 급한 이는 바로 흑룡왕 아니신가?”

“나를 비웃는 것이냐?”

“천만에.”

천면수사가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동시에 표정이 일변했다. 좀 전까지 한없이 부드럽고 너그러워 보이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칼날처럼 벼려진 눈빛만 흑룡왕에게 꽂혔다.

“그만큼이나 상황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경거망동할 거면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라.”

“이 쥐새끼 같은 놈이!”

흑룡왕이 노화를 터뜨리려는 순간, 천면수사가 다시 장일소를 향해 말했다.

“녹림은 오지 않을 테고……. 아, 혹시 불러는 보았나?”

“쓸데없는 짓이겠지요.”

“그렇겠지.”

천면수사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하오문의 수장. 하오문은 개방과 함께 천하의 정보를 양분하는 곳이다. 이미 녹림의 마음이 돌아서서 천우맹에 합류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래도 이리 정도는 되는 줄 알았건만, 제 손으로 개목걸이를 차고 개집으로 들어갈 줄은 몰랐군. 패군이 너무 괴롭혀서 그런 것 아닌가?”

과거 만인방과 녹림의 전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릇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죠.”

장일소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건 꼭 제 탓만은 아닙니다. 천면수사께서 등 뒤에 비수를 겨누지 않으셨다면 녹림 따위야 진즉에 제가 병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랬다면 다음은 우리가 먹혔겠지. 아니면 틈을 봐서 수로채가 남하했든가.”

천면수사가 낄낄 웃어 댔다.

사파란 그런 곳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가 되고,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사파에 동료란 없다. 힘을 합쳐 싸우는 순간에도 적과 또 다른 적이 있을 뿐이다. 전쟁을 하는 이가 있다면 당연히 그 뒤를 노려야 한다. 노리는 것이 비겁한 게 아니라, 노리지 않는 것이 안일한 것이다.

그렇기에 신주오패는 서로의 영역을 지키며 산발적인 교전만 벌였을 뿐이다. 제대로 전쟁을 벌인다면 누군가가 반드시 등을 노리고 달려들어 올 테니까.

“그럼 다른 곳은?”

“서찰은 보냈습니다만.”

“흐으으음.”

천면수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더 기다리는 것은 의미가 없겠군그래. 하여, 패군은 무슨 일로 우리를 불렀는가?”

흑룡왕이 이를 갈아붙였다.

“나는 아직 말을 듣겠다고 한 적이 없다.”

“그럼 가시오, 흑룡왕. 잡지 않을 터이니.”

천면수사가 혀를 찼다.

“이곳에서 주도권 싸움 같은 건 의미가 없소. 지금 당장 모두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까. 아니, 어쩌면 비수가 목에 들이밀어진 상황인지도 모르지. 그리고…….”

흑룡왕을 바라보는 천면수사의 눈빛은 흡사 칼날과도 같았다.

“그건 누구보다 수로채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

“…….”

흑룡왕은 입술을 깨물며 화를 참았다.

“그래서? 그 잘나신 놈들이 모여 주판이라도 굴려 보자는 건가?”

“그럼 더없이 귀한 자리가 되겠지.”

또다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흑룡왕이 뒤쪽으로 돌아보았다.

계단으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내 드러난 얼굴에는 표정이라곤 없었다.

감정이라고는 한 올도 느껴지지 않았고, 심지어는 핏기조차 없어 안색이 창백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보는 사람에게 더 강한 압박감을 안겨 주었다.

푸른 청삼을 입은 사내는 최상층에 오르는 즉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중요한 것은 이 자리로 어떤 이득을 보느냐니까. 주판알을 튕기지 않을 거라면 의미 없다.”

“……빌어먹을 놈.”

흑룡왕은 그런 그를 비난했지만 천면수사는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이득과 저자가 생각하는 이득은 조금 다를 것이다. 저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이득과 손해로 나눠 생각하니까.

사파라 해서 모두가 제 욕망에 충실하지는 않다.

때로는 더 큰 것을 위해서 참아 내기도 하고, 완벽한 덫을 놓기 위해서 스스로를 감추며 위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다르다. 저치의 머릿속에는 오직 당장의 이득밖에 없다.

물론 천하에 돈에 미친 이는 수도 없이 많고, 가장 돈을 밝히는 이들이야 응당 상인들일 것이다. 눈부신 황금에 기꺼이 영혼을 내다 팔고, 황금을 얻기 위해서라면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는 이들. 그러니 상인들은 흔히 돈 귀신(錢鬼)이라 불린다.

하지만 진정 세상의 내면을 아는 이들은 그런 이들을 두고 전귀(錢鬼)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진짜 돈에 미친 이들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돈이라면 무엇이라도 하는 이들.

세상의 이치를 따르는 이들은 누런 황금에 제 목을 걸지만, 세상의 이치조차 희롱하는 이들은 ‘진짜 금(金)’에 목숨을 건다.

황금은 그저 사치품에 불과할 뿐.

진짜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금은 황금이 아니라 소금이다.

그렇기에 어떤 나라든 소금만은 상인들이 다루지 못하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소금에 손을 대는 행위를 반역과 동일하게 취급하곤 한다.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밀염(謐鹽)에 손을 대는 검은 귀신들.

바로 흑귀보(黑鬼堡)다.

그리고 이자가 바로 그 흑귀보의 수장인 만금대부(萬金大夫) 공야월(孔夜月)이다.

만인방. 하오문. 장강수로십팔채. 흑귀보.

신주오패 중 네 세력의 수장들이 바로 이 항주, 취향루의 최상층에 모여들었다.

강호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숨조차 시원하게 쉬지 못했을 것이다.

“돈 귀신…….”

흑룡왕이 뭔가 말을 하려 하자 만금대부가 손을 짧게 내저었다.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워라, 흑룡왕. 나는 바쁜 사람이다. 용건부터 들어 보지.”

“…….”

“패군. 우리를 여기까지 부른 이유를 말해라. 만약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다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다. 내 시간을 낭비하게 한 죄는 더없이 크다.”

패군이 묘하게 웃으며 답했다.

“대부께 하나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건 풍류와 여유겠지요.”

“돈이 되지 않는 것은 내게 조금의 쓸모도 없다.”

“일단 앉으십시오.”

만금대부는 장일소를 흘끗 보았지만 딱히 반발하진 않았다. 그저 패군이 말한 대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천면수사도 저벅저벅 다가와 마련된 자리에 앉았고, 마지막까지 서 있던 흑룡왕이 영 좋지 않은 얼굴로 쿵쿵 소리 내어 걸어오더니 거칠게 의자를 뺐다. 그러더니 앉기 전에 으르렁거렸다.

“의미 없는 헛소리나 지껄인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장일소!”

“의미 없는 헛소리라…….”

장일소는 나긋한 손길로 앞에 놓인 잔을 살짝 쓸며 웃었다.

“체면은 중요합니다.”

그의 시선이 흑룡왕에게 닿았다.

“돈은 물론 더없이 귀하고.”

이번엔 만금대부를 바라보았다.

“정보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천면수사에게 시선을 준 장일소는 제 술잔을 채웠다.

쪼르르륵.

조용하다 못해 고요한 취향루의 최상층에 술 따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잔을 든 장일소가 입가를 뒤틀었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호선을 그린 장일소의 두 눈이 달빛처럼 창백하게 빛났다.

“목이 붙어 있을 때의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최상층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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