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8화. 개처럼 살든가, 늑대처럼 죽든가. (3)
“캬아! 살맛 나는구먼!”
구강의 한 주루.
해가 채 서산 너머로 넘어가기도 전부터 주루에 모여든 이들이 거나하게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저 꼴 보기 싫은 수적 놈들이 아주 혼쭐이 나는군!”
“그러게 말일세! 젠장할, 그리 지독하게 설쳐 대던 놈들이 정말이지 코빼기도 보이질 않지 뭔가! 소림이나 무당 앞에서는 힘도 못 쓰는 것들이 말이야!”
“그러니 사파지! 괜히 사파겠는가!”
불콰하게 취한 이들이 저마다 감상을 늘어놓으며 기쁨의 술잔을 나누었다.
수적들이 걷는 통행세가 없어진다 해서 당장 삶이 확 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번 돈은 온전히 내 손에 쥘 수 있단 기쁨과 저 망망대해 같은 강 한중간에서 칼 든 강도를 만날 일이 없다는 안도감이 술을 부르고 있었다.
“쯧. 거꾸로 말하면 이렇게 한 번만 나서 주었으면 될 일을 그동안 안 해 줬다는 것 아닌가?”
“예끼, 이 사람아!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면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더니 딱 자넬 두고 하는 말이구먼. 저분들이 어디 보통 분들이신가! 공사가 다망하실 텐데 지금이라도 이리 찾아 주신 게 어딘가?”
“맞지! 그도 맞지!”
처음에는 화산의 뒤를 따라 장강에 당도한 구파일방과 남궁세가를 떨떠름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시선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이유가 무엇이든, 늦게 왔든, 일찍 왔든 어쨌거나 수적들을 소탕해주기만 하면 좋은 일이 아닌가.
“여하튼 이대로 수적들을 싹 몰아냈으면 좋겠구만.”
“거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게. 이 넓은 장강에서 수적을 어떻게 다 몰아내겠는가? 관도 못 하는 것을.”
“관이 못 하는 건가? 안 하는 거지! 자기들이야 배 타고 다녀도 습격당할 일이 없으니 손 놓고 방관하는 것 아닌가? 고관대작이 수적 놈들에게 털리는 일이라도 생기면 장강의 수적은 씨몰살을 당할걸?”
“어찌되었건, 그건 과한 기대일세. 저분들이 장강에 계속 상주한다면 또 모를까.”
“그것도 지켜볼 일이지. 듣자 하니 화산파 일부가 장강에 상주한다고 하던데?”
“응?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화산파 분들이 수적들을 소탕한 곳을 중심으로 배를 운항한다는구만. 정기적으로 강 건너까지 오가는 배 말일세.”
“그건 지금까지 흔히 있던 일 아닌가?”
“모르는 소리. 그렇게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배는 지금까지 수적들에게 털리는 게 일상이었지 않은가? 비정기적으로 오고가는 배도 손쉽게 털리는 판에 시간과 갈 길을 정해 놓고 출발하는 배야 차린 밥상이나 다름없지.”
“그랬었지.”
“그런데 수적 놈들이 저 화산파를 무슨 배짱으로 건드리겠는가? 구강에서 먼 곳이야 별수 없겠지만, 우리는 이제 강남으로 상행을 나가면서 수적 걱정을 안 해도 된다 이 말이지!”
“그, 그렇겠군.”
“그리고 그러려면 화산 분들도 웬만큼은 자리를 지키시겠지. 그럼 구강 일대만큼은 수적 구경을 안 해도 될지 모르네.”
“그렇게만 된다면야!”
사람들이 하나둘 희망에 부풀기 시작했다.
수적들에게 습격받을 걱정이 사라진다면, 당장 돈을 조금 더 챙길 수 있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돈이 더 풀린다 보면 여윳돈이 생기고, 여윳돈이 생기면 상계가 활성화되게 된다.
장강을 오가는 사람과 짐들이 가득해지는 날을 꿈꾸며 사람들이 모처럼 기운차게 술잔을 나눴다.
하지만 그런 곳에는 꼭 초를 치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모르지. 그렇게 잘될지.”
“……이 인간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런 식으로 수적들이 없어졌다면, 장강에 수적이 들끓을 일이 있었겠는가?”
“또, 또…….”
“장강수로십팔채네. 신주오패라 이 말이지. 절대로 저대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걸세. 그리고 어쩌면 이건 우리에게는 안 좋은 일일지도 몰라.”
“왜? 수적들이 소탕당하는데 왜 안 좋은 소식이란 말인가?”
“그동안 우리가 저 놈들에게 적당히 통행세만 내고 물길을 갈 수 있었던 건 놈들도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돈을 뽑아먹으려 들기 때문이 아닌가?”
“그야 다 아는 사실이지.”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나면, 저놈들도 평생 장강에서 수적질을 해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할 거란 말이지. 그럼 당장 눈앞에 있는 돈을 모조리 챙기려 들지 않겠나? 토벌이 오기 전에?”
“……그건…….”
말을 하던 이가 고개를 휘휘 젓는다.
“어설프게 뱀을 건드리면 독만 오를 뿐이야. 저리 기분 내다가 발을 빼 버리기라도 한다면 저 수적 놈들의 화는 우리에게 쏟아질 걸세. 그런데 저 양반들이 정말 장강을 끝까지 지키려 할까? 수로채와 목숨 걸고 싸우려 들까?”
“…….”
다들 입을 닫았다.
부정하고 싶지만, 저 말에는 분명 일리가 있었다.
“긁어 부스럼이 아닌지 모르겠군.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다만.”
“재수 없는 소리를.”
“자, 자! 그만들 하고 마시세! 마셔!”
분위기가 가라앉자 사람들은 부러 흥을 돋우고 목소리를 높이며 다시 술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미 파고든 불안함은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그들의 가슴 한편에 웅크리고 있었다.
* * *
“수채가 비었다고 했느냐?
“예!”
법계의 입에서 침음이 흘렀다.
“추적은? 추적은 가능하더냐?”
“쉽지가 않습니다. 산적들처럼 육지로 달아나는 게 아니라 배를 타고 장강 한가운데로 나가 버리는 터라…….”
“…….”
“장강 중앙에 떠 있는 이들을 공격하려면 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들과 수전을 치르는 것은…….”
“어렵겠지.”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그렇구나. 하면 어쩔 수 없지. 우선은 빈 수채를 다시 살펴보고 점검하거라.”
“예, 장로님.”
법계의 눈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내색할 입장이 아니라 겉으로야 태연한 척했지만, 내심은 꽤 초조한 상태였다.
‘곤란하군.’
수적들이 지금처럼 배를 타고 몸을 빼 버리면 소림은 추적할 방도가 없다. 조금 전 제자와 말했듯이, 넓디넓은 장강의 중앙으로 나가 버린 수적들과 수전을 벌인다는 것은 피해를 자초하는 일이다.
물론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수적들을 궤멸시키는 게 목적이라면 못 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 싸움은 수로채와 소림이 서로의 운명을 두고 겨루는 격전이 아니다. 장강으로 출정한 다른 문파들보다 더 적은 피해로 더 많은 전과를 올리는 게 목적이지 않은가?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끌 확률이 높아졌구나.’
장강은 넓다.
저들이 강 한중간으로 달아나지 않는다고 해도 이 넓고 긴 장강을 샅샅이 뒤져 가며 수적들을 소탕하는 건 버거운 일이다. 제아무리 소림과 무당, 청성과 남궁이 장강에 모였다고 해도 말이다.
법계가 생각에 잠긴 채로 장강을 바라보았다.
‘지금이야 한마음 한뜻으로 공격을 하고 있다지만, 네 문파 중 한 문파라도 지지부진함을 느끼고 발을 빼 버린다면…….’
그렇다면 다른 문파들도 염증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아직은 먼 이야기다.’
지금 당장은 눈앞의 일에 전념하는 게 옳다.
다만 한 가지.
‘괴이할 정도로 저항이 적구나.’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장강수로십팔채. 이쯤이면 수로채의 중심인 흑룡채도 움직일 만하건만…….
“그저 노파심이겠지. 아미타불.”
법계가 고개를 내저었다.
머릿속에 가득한 의혹을 털어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 * *
항주(杭州).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
하늘 위에는 천당이 있고, 하늘 아래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
서호(西湖)를 끼고 있는 항주는 전 중원에서도 손꼽힐 만큼 아름다운 도시다. 그 뛰어난 경관은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들의 붓끝을 취하게 만들었다.
다만 항주가 그저 빼어난 경관으로만 유명한 곳은 아니다.
천하의 모든 즐거움과 사치, 그리고 환락을 맛볼 수 있는 곳. 불야성(不夜城)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도시가 바로 지금의 항주다.
삼경에 이른 시각. 구름 낀 하늘에서는 별 하나 찾아볼 수 없지만, 항주의 밤은 대낮보다 더 환했다. 곳곳에 밝혀진 등불과 연등이 거리를 눈부시게 밝혔다.
“자자! 끝내주는 술과 더 끝내주는 안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최상층의 가장 좋은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영웅님들께 딱 어울리는 자리입니다!”
“서역에서 공수해 온 진귀한 먹거리가 가득합니다!”
술에 취해 거니는 이들과 호객하는 점원들의 목소리가 눈 부신 밤거리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 항주의 불야성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곳.
항주에서 가장 높은 십 층 전각, 취향루(取香樓).
그곳의 최상층 창가에서 한 사내가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건 꽤 기이한 광경이었다.
취향루의 최상층은 그 자릿세만으로도 웬만한 일가의 몇 달 생활비를 내야 하고, 같은 술을 마시더라도 아래층에서 마시는 것보다 열 배는 더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
그럼에도 취향루의 최상층에는 언제나 빈자리가 없다.
열린 창으로 항주의 거리와 서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그 자체로 항주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항주의 환락공자들은 물론이고, 소문을 듣고 항주를 찾아 온 있는 집안 자식들도 어떻게든 취향루의 최상층에 다녀갔다는 추억을 남기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취향루의 최상층엔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아니, 이 넓은 최상층에 앉아 있는 이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 모르는 이가 이 광경을 본다면 제 눈을 의심할 것이다.
하지만 아는 이가 이 광경을 본다면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고, 더 잘 아는 이가 이 광경을 본다면 그 즉시 몸을 돌려 달아날 것이다.
취향루의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홀로 즐기고 있는 사내가 다름 아닌 패군 장일소이기 때문이다.
“흐음.”
패군은 술잔에 담긴 노란 술을 가만히 바라보며 읊조렸다.
“소흥주라.”
천하에 소흥주라는 이름을 달고 팔리는 술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진정한 소흥주는 바로 이곳 절강의 감호(鑒湖) 물로 빚어 낸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절강에 와야 진짜 소흥주를 맛볼 수 있다는 의미다.
게다가 지금 패군이 맛보고 있는 술은 소흥주 중에서도 상급으로 치는 설향주. 그중에서도 바로 이 취향루에서만 취급하는 최고급품인 취향주(醉香州)였다.
“향에 취하다라…….”
빙긋 미소를 지은 패군이 가만히 술을 입 안에 머금었다.
과연.
그 향긋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깊고 고아하다. 한 모금 머금는 순간 전신이 향으로 가득 차는 기분이다.
“좋구나.”
물론 그가 있는 광서의 술도, 귀주의 술도 이 절강의 술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술이란 비슷한 급이라 해도 그 향과 느낌이 모두 다르다. 그 어느 것이 가장 뛰어나다 순서를 매길 수 없다.
천하란 넓고도 넓다. 그리고 그 넓은 천하의 각지에서 수많은 술이 만들어진다. 각각의 특색을 가진, 빼어난 술들이.
평범한 이는 천하 각지에서 만들어지는 술 중 십분지 일도 맛보지 못하고 죽기 마련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군.”
소흥주를 구하는 것쯤은 그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지역의 명주란 그 지역에 직접 가 풍류를 즐기며 마셔야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광서에서 먹는 취향주와 이곳 항주 취향루에서 먹는 취향주가 같을 리 있겠는가?
그리 생각하면 어디에라도 갇힌 듯 갑갑증이 인다. 그가 마음 놓고 발을 디딜 수 있는 땅이 이 넓은 천하에 얼마나 되던가?
또 한 잔의 취향주를 쭉 들이켠 패군은 검지 끝으로 입가를 가볍게 문질렀다.
‘하나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세상을 발아래에 둘 것이다.
그 누구보다 넓은 땅을 발아래에 두고, 그 누구보다 많은 술을 마실 것이다.
“바로 이 장일소가 말이지.”
그때 아래층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흠.”
패군이 슬쩍 시선을 돌려 계단 쪽을 바라본다. 이내 온통 검은 의복으로 전신을 감싼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애송이 놈이…… 감히 나를 오라 가라 해?”
“어서 오시지요, 흑룡왕.”
장일소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화사하게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