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787화 (784/1,567)

787화. 개처럼 살든가, 늑대처럼 죽든가. (2)

“교룡채가 소림에 당했습니다. 사마 채주가 수채를 버리고 도주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청하채(淸河砦)로 무당이 진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청하채주가 지원을 요청해 왔습니다.”

“나, 남궁세가가 북상 중입니다! 어, 어떻게든 대책을…….”

검은 옥좌에 앉은 중년인이 그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내가 앉은 옥좌는 빨려드는 느낌이 들 만큼 칠흑 같은 검은색이었고, 사내가 입고 있는 의복도 온통 검었다. 심지어 관운장을 연상케 하는 기다란 수염과 거칠게 자라는 머리카락도 모두 검디검다.

하지만 가장 어둠의 색과 닮은 것은 그의 눈동자였다. 그 짙은 눈동자가 부복한 이들을 응시했다.

“흐, 흑룡왕이시여!”

다급한 외침을 들은 사내의 눈썹이 순간 꿈틀했다.

장강을 지배하는 장강수로십팔채, 그 수로채를 지배하는 단 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지고한 명호.

제아무리 장강수로십팔채가 거대한 곳이라 한들, 구파일방과 천우맹 사이에 낀다면 너무나도 작은 곳에 불과하다.

구파일방의 소림과 무당, 오대세가의 남궁세가는 물론이고, 천우맹의 사천당가마저도 단독으로 장강수로십팔채와 자웅을 겨룰 만한 곳이다.

그만한 문파가 다섯, 열씩 연합한 세력을 장강수로십팔채 홀로 무슨 수로 상대한단 말인가?

나서지 않은 문파들도 사실상 뜻이야 함께할 걸 감안한다면 천하 정파의 절반 이상이 장강으로 몰려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예, 흑룡왕이시여.”

“대책은?”

“…….”

흑룡왕의 하문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 뚫린 입으로 설마 대책 없단 말을 지껄일 생각은 아니었을 테고.”

“…….”

“어디 한번 대책을 내놓아 보거라.”

부복한 이들이 슬쩍 서로의 눈치를 봤다.

이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다. 답이야 빤히 알고 있다 한들 흑룡왕 앞에서 정직하게 간언할 용기를 지닌 이가 있을 리 없었다.

“대답하지 않겠다?”

흑룡왕의 목소리가 다소 거칠어졌다.

“평소에는 그 주둥이로 잘도 수채의 녹을 먹더니 막상 입을 열어야 할 때는 처닫고 침묵하는구나. 그렇다면 그 주둥이며 모가지는 쓸모없는 것이라 봐도 되겠지?”

부복한 이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흙빛으로 물들었다.

흑룡왕이 달리 흑룡왕이겠는가.

그는 이곳에 있는 이들의 목을 모두 베어 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결국 그 압박에 이기지 못한 이 중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말해 보라.”

“……내리는 비는 피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들이 지금 장강으로 치고 들어온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원정입니다. 저들의 본거지를 생각하면 장강에 오래 머무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몸을 피하시고, 휘하 수채들에게도 장강을 잠시 떠나 몸을 사리라고 명한 다음에 비가 그치면 돌아오시는…….”

퍼어억!

말을 하던 이가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콰앙!

하지만 누구도 감히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저 머리를 더욱 깊게 조아려 흑룡왕의 진노가 자신에게 향하지 않기를 빌 뿐이었다.

가볍게 손짓하는 것만으로 사람 하나를 피떡으로 만들어 버린 흑룡왕은 거칠게 옥좌에서 일어섰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뭐가 어째? 장강을 버리고 몸을 피해라? 내가! 장강의 용인 내가 저 정파의 잡놈들을 피해서 달아나기라도 하란 말이냐? 이 내가?!”

벼락같은 노호성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어디 지껄여 보거라! 다시 한번 지껄여 봐!”

장강의 용이 노하면 장강이 폭풍에 휩싸인다고 한다. 흑룡왕의 노기는 장강은 몰라도 적어도 이 흑룡채를 살기로 뒤덮기에 충분했다.

“흐, 흑룡왕이시여. 제 아무리 산 왕인 범이라고 한들, 이리 떼가 몰려와 물어뜯으면 못 배깁니다. 장강의 용도 악어가 떼로 몰려와 물어뜯는다면 일단은 몸을 피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퍼어어억!

그러나 이번에도 간언을 한 이가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이 멍청한 놈들! 어디 범 따위와 비교하느냐! 악어 따위로 어찌할 수 없기에 용인 것을!”

말을 하지 않으면 목이 떨어지고, 말을 하면 맞아 죽는다.

폭군의 옆에 간신이 붙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 폭군의 입맛에 맞는 말을 하지 못한다면 제 목부터 달아나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를 살펴보면 폭정을 일삼는 폭군을 상대로도 제 목을 걸고 간언하는 이들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만한 강단을 지닌 이가 수채로 흘러들어 와 수적질을 하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

평소 같았으면 흑룡왕의 귀를 달콤하게 만들어 줄 꿀 발린 말을 늘어놓았을 이들이지만, 지금만은 그럴 수 없었다.

‘빌어먹을, 이대로라면 우리도 위험하다고.’

‘흑룡왕의 손에 죽으나 소림 놈들의 손에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야!’

“이 자랑스러운 장강의 호걸이라는 놈들이 싸워 보지도 않고 달아날 궁리만 해? 이 비겁한 놈들이!”

흑룡왕의 두 눈에서 노기가 뿜어진다.

“구차하게 달아나 목숨을 부지할 바에야 당당하게 싸우다 죽는다! 그게 장강수로십팔채의 이름을 짊어진 이들이 해야 할 일이다!”

부복한 이들은 티가 나지 않게 몰래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그들은 모두 알고 있다. 지금 흑룡왕이 쏟아내고 있는 말들이 모두 허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흑룡왕이 정말 앞뒤를 보지 않고 체면만 내세우며 저 정파 놈들에게 맞설 만큼 무모한 자였다면 흑룡왕의 자리에 오르기도 전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장강 바닥에 잠겼을 것이다.

사파의 세상에서 그저 살아남기만 한다면 힘만으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온갖 귀계와 모략이 판치는 이곳에서 정상을 꿰차기 위해서는 머리도 쓸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니까. 그러니 결국 흑룡왕도 우둔한 자는 결코 아니란 뜻이다.

그럼에도 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연신 늘어놓는 이유는, 명분을 만들어 체면을 아주 구기지 않기 위해서다.

적어도 흑룡왕은 나서서 싸우려 했다. 하지만 수하들이 눈물로 막아서기에 어쩔 수 없이 물러섰다. 그런 말들을 남기기 위해서다.

이 뻔한 연극은 그들 중 태반이 얻어맞고 나가떨어지기 전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연극에 동조해 줘야 하는 것이 그들의 처지였다.

“누구냐? 또 달아나란 말을 입에 올릴 이가 누구더냐? 이 장강에서 달아나는 방법은 시체가 되어 나가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내 똑똑히 알려 주마! 내가 가장 선두에 서겠다. 그럼에도 후퇴를 입에 담을 이가 있느냐?”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수채들이 습격을 받고 있다. 재기를 노린다면 수채 하나의 전력이라도 더 살려 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저 정파 놈들이 장강을 떠나기 무섭게 등 뒤에서 승냥이 같은 사파 놈들이 몰려들 테니까.

그들이 뻔한 연극을 이어 가기 위해 입을 열려던 바로 그때였다.

“웬 놈들이냐?”

“여기가 어디라고 목을 들이미느냐?”

수채의 입구 쪽에서 웅성웅성 소란이 일었다. 그에 부복하고 있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정파 놈들인가?’

‘벌써 여기까지?’

다행히도 그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입구 쪽에 보이는 낯선 이들은 아무리 봐도 정파 놈들은 아닌 것 같았다.

선두에 선 차가운 인상의 사내가 입꼬리를 뒤틀며 말했다.

“본디 사신을 겁박하는 경우란 없다. 무식한 수적 놈들이라 그런 것도 모르는가?”

“이놈들이…….”

역시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흑룡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크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러자 수하 하나가 빠르게 다가와 말했다.

“……흑룡왕을 뵙겠다고 합니다.”

“흐음? 어디 놈들인데?”

“그게…….”

방문한 이들의 정체를 전해 들은 흑룡왕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들여보내라.”

“예!”

수적들이 길을 터 주자 대여섯의 사신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더니 흑룡왕의 앞까지 다가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흑룡왕을 뵙습니다.”

“예의라……. 귀한 광경을 보는군.”

흑룡왕은 명백한 비웃음을 내걸고 물었다.

“잘도 여기까지 올 생각을 했군그래. 그 목숨을 걸고 전할 말이라는 게 뭔지 한번 들어나 보지.”

선두에서 무릎을 꿇은 사내가 품 안에서 봉인 된 서찰을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방주께서 전하라 하신 서찰입니다.”

흑룡왕이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자, 부복하고 있던 이들 중 하나가 눈치 좋게 일어나 서찰을 받아 흑룡왕에게 전달했다.

“흐음.”

서찰의 봉인을 뜯은 흑룡왕이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딱히 긴 내용이 아닌 듯했으나, 서찰을 읽는 흑룡왕의 표정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이고 변했다.

“…….”

마침내 눈을 뗀 흑룡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동시에 손에 들린 서찰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너희는 이 안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아느냐?”

“모릅니다.”

“하면, 이 서찰의 내용이 너희의 목숨을 담보해 줄 수 없다는 것도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그럼 무슨 배짱으로 이따위 서찰을 들고 내 앞으로 왔느냐! 이 하룻강아지 같은 것들이!”

흑룡왕의 살기가 돌연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 어마어마한 살기에 서찰을 가지고 온 이들의 전신이 금세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말해 보라. 이 서찰을 전하는 일이 너희의 목숨보다 중하더냐?”

“그건…… 그건 모릅니다.”

“그럼 왜 왔느냐?”

선두에 있는 이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방주께서 명하신다면 이곳이 아니라 지옥이라 해도 저는 갈 것입니다. 그런데 뭐가 두렵겠습니까?”

그 순간 그들을 짓누르던 살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허허.”

흑룡왕이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먼 남쪽을 바라보았다.

“장일소. 장일소라…….”

그의 입가가 뒤틀렸다.

“광서의 애송이 놈이 많이도 컸구나. 감히 나를 불러 대다니.”

“흑룡왕이시여?”

영문을 모르고 지켜보는 수하들을 돌아보며 흑룡왕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독망(毒蟒)!”

“예! 흑룡왕이시여.”

“각 수채에 한동안 싸움을 피하고 몸을 사리라 전하라.”

“그, 그 말씀은……?”

“어디 한번 보고 오지. 그 사갈 같은 놈이 뭘 준비했는지.”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흑룡왕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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