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5화. 어디 뒈지게 한번 놀아 보죠. (5)
남경.
“빌어먹을, 패 더럽게 안 붙는군!”
손에 든 골패를 판 위에 던져 버린 고태(高泰)는 짜증 어린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끌끌끌. 그런 날도 있는 법이지.”
“뭐? 그런 날도 있어? 아닌 날을 찾는 게 더 빠르겠구만!”
그는 이내 씩씩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버렸다.
“오늘은 텄어.”
“이제 겨우 저녁인데 벌써 손 빼겠다고?”
“더 해 봐야 잃기만 하겠지. 왜? 호구 하나 털어먹고 싶나?”
“호구라니. 저번에는 네놈이 따지 않았나?”
“그거 해 봐야 얼마 된다고!”
건너편에 앉은 이를 험악하게 노려본 그는 이내 분풀이하듯 의자를 툭 발로 찼다.
“여하튼 나는 빠질 테니 네놈들끼리 잘 쳐 보라고.”
“어디 가려고? 오늘 근무인 거 잊었어?”
“이 밤톨만 한 도박장에 몇 놈이나 붙어 있어야 한다는 거야? 수금이나 하고 올 테니 너희끼리 감시하든가.”
“저저, 성질머리 하고는. 쯧쯧.”
뒤에서 흉을 보든 말든 고태는 옆에다 아무렇게나 뒀던 도를 챙겨 들고 거친 걸음으로 도박장을 나섰다.
뒷골목을 따라 한참 걸어 나오니 난전을 펴고 있는 상인들이 보였다.
“과일이 맛있게 익었습니다! 한번 드셔 보세요!”
“전병 사시오, 전병!”
“서역에서 들어온 옷감입니다! 한번 구경하고 가세요!”
쭉 훑어보던 고태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이, 영감!”
“예! 어서 오……. 으…….”
고태를 발견한 상인이 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금세 태연한 얼굴을 가장한 상인이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 오셨습니까?”
“어때? 장사는 좀 잘돼?”
“하하……하. 장사야 항상 그렇지요. 하지만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입에 풀칠은 하고 있습니다.”
“그래?”
고태가 피식 웃는다.
“영감은 입에 풀칠을 하는데, 나는 입에 나무껍질도 못 넣게 생겼어.”
“왜…….”
“왜는 왜야!”
쾅!
그는 노인이 내놓고 팔던 물건들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아이고!”
“돈을 벌었으면 자릿세를 내야 할 것 아냐! 돈 벌어서 영감 주둥이에만 처넣으면 다 끝나나? 영감 자릿세가 벌써 세 달치가 밀렸어!”
“아이고, 호걸님……. 정말 돈이 없습니다.”
“돈이 없어? 그럼 장사 접어야지! 자릿세도 못 낼 만큼 돈을 못 버는데 장사는 뭐 하러 하고 있어! 산에 올라가 나무나 벨 것이지!”
“이, 이번 한 달만 더 기다려 주시면…….”
“그런데 이 영감이, 누군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아나!”
쾅!
물건이 실린 수레를 아예 걷어차 날려 버린 그는 고함을 쳤다.
“인심 써서 두 달이나 더 기다려 줬더니? 뭐? 한 달을 더 기다리라고? 이 영감이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너 우리 귀갈파(鬼蠍派)가 우스워 보여?”
“아이고,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돈을 못 내겠으면 물건이라도 내야지!”
고태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자신이 걷어찬 수레를 움켜잡았다. 그러자 상인이 기겁을 하며 고태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그, 그걸 가져가시면 저희 가족은 꼼짝없이 굶어 죽습니다요! 다, 다음 달에는 정말 꼭 낼 테니, 이번 한 번만……!”
“이 영감이 미쳤나!”
퍼억!
고태가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상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그러자 상인은 맥없이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고태는 상인이 붙들었던 옷을 불쾌한 듯 탁탁 털며 언성을 높였다.
“이래서 검은머리 짐승은 거두면 안 된다니까. 이 영감이 처음 장사 시작할 때는 자릿세는 얼마든지 내겠다고 하더니 이제 와 나를 나쁜 사람 만들어? 두 달이나 기다려 줬으면 됐지! 네놈 자식 새끼 먹이려다 내 새끼가 굶게 생겼어!”
다른 상인들이 멀리서 그 광경을 흘끗거리며 수군거렸다.
“또 뭔 일이래?”
“몰라. 미친놈이 도박장에서 또 돈을 잃은 모양이지.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이 꼴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 건지…….”
모두의 입에서 불평과 한숨이 푹푹 새어 나왔다. 하지만 나서서 고태를 말릴 용기를 지닌 이는 아무도 없었다.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그들이 귀갈파의 흑도인인 고태를 상대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그의 옆구리에 매달려 덜렁거리는 도만 보아도 오금이 저리고 소름이 돋았다.
나이 든 상인이 다시 매달리다가 걷어차이는 꼴에, 상인들은 결국 차마 더 보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더러워서 때려치우든 해야지.”
“그런 소리 말게. 장사 그만두면 우린 뭘 먹고 사는가?”
“화전이라도 일구면 못 먹고 살겠나?”
“화전은 무슨! 산에는 어디 도적놈들이 없다던가? 사람 사는 곳에 도적 없는 곳은 없네.”
“……빌어먹을.”
그때 고태가 수레를 한 손으로 움켜잡으며 위협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 쥐새끼가 찍찍대고 있느냐!”
그 살벌한 눈길에 상인들이 재빨리 수군대던 입을 닫고 눈을 내리깔았다. 순간적으로 정적이 돌았다.
“이달부터 자릿세 제때 못 내는 놈들은 판 아주 걷어 버릴 테니 그렇게 알아! 염치도 없는 것들이 제 처먹을 것 다 처먹고 남는 돈을 내려고 해?”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음 달부터는 자릿세를 일 할씩 올릴 테니까 그런 줄들 알아.”
“아, 아이고, 호걸님!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면…….”
“내가 아니라 우리 두령이 정한 일이다. 징징대 봐야 소용없으니 돈이나 늦지 않게 준비해!”
무섭게 눈을 부라린 고태가 몸을 획 돌려 수레를 끌고 갔다. 아니 가려 했다.
“모, 못 가십니다!”
수레를 빼앗긴 상인이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고태의 바짓단을 잡고 늘어졌다.
“이 영감이 정말 죽고 싶어?”
“이, 이걸 뺏기면 저는 정말 죽습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제발……. 제발…….”
“오호라? 마찬가지다?”
고태가 수레를 놓더니 허리춤에 찬 도를 뽑아 들었다.
스르릉 소리를 들은 상인들이 순간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얼굴들에 당혹과 불안이 가득했다.
“누, 누가 좀 말려 봐!”
“노야! 노야! 그러시면 안 됩니다!”
“영감님!”
주변인이 비명을 질러 댔지만, 고태를 붙든 상인은 물러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울분에 차 고래고래 악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차라리 죽여라, 이 도적놈아! 여기서 장사해서 몇 푼이나 번다고 그걸 다 뺏어 가느냐! 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차라리 죽여라!”
“허허, 이놈 보게?”
퍼억!
고태가 상인의 가슴을 힘껏 걷어차더니 도를 꽉 움켜잡았다.
“오냐. 죽여 달라니 죽여 주마!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그가 포악하게 고함을 치고 도를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멈춰라!”
“…….”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고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주변에 있는 상인들이 소리를 쳤다면 들은 척도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 들려온 목소리에는 내력이 가득 실려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청색 무복을 입은 이들이 우르르 다가오고 있었다.
“퉤!”
바닥에 침을 뱉은 고태는 다가오는 이들을 불만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아이고, 잘나신 추의문(追義門) 분들이 여기까지 어인 행차실까?”
“물러나라.”
“물러나?”
고태의 입가에 명백한 비웃음이 내걸렸다.
“물러나야 하는 건 그쪽이지. 여기는 우리 구역이라는 걸 잊으셨나? 언제부터 추의문이 우리 구역에 발을 들이미셨는지 모르겠네.”
선두에 선 차가운 인상의 중년인이 고태를 노려보았다.
“구역?”
“그래, 구역. 여기는 우리 구역이다. 서로 얼씬하지 않기로 한 걸 잊었나? 아니면? 뭐, 전쟁이라도 하시려고?”
그 말에 중년인은 대답 대신 묘한 표정으로 고태를 빤히 보았다. 고태는 더욱 의기양양해져선 떠들었다.
“왜? 천하의 남경쾌검(南京快劍)도 전쟁이라는 말을 들으니 오금이 저리시는 모양이지?”
“전쟁이라…….”
남경쾌검 초상길(焦翔吉)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못 할 것도 없겠지.”
“뭐?”
그 말에 고태는 되레 당황했다.
‘이놈이 미쳤나?’
남경쾌검이 속한 추의문과 그가 속한 귀갈파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조약을 맺었다. 그렇기에 남경의 경계를 두고 서로 소 닭 보듯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저놈이 오늘 돌연 제자들을 이끌고 귀갈파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뭔 일이냐?”
“저 새끼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추의문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도박장 안에 있던 귀갈파 문도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리고 추의문의 제자들 뒤쪽으로도 사람이 하나둘 충원되고 있었다.
시전이 금세 긴장감으로 휩싸였다. 서로 수십씩은 모인 각문의 제자들이 흉흉한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했다.
“남경쾌검의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구나.”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 너희들이지.”
“뭐라?”
초상길은 입꼬리를 뒤틀며 비웃었다.
“그동안 우리가 너희의 패악질을 내버려 두고 있었던 이유는 너희 뒤에 장강수로십팔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너희 따위가 두려워 지금까지 참아 주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이 새끼가…….”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다.”
“……그건 무슨 말이냐?”
“무당과 소림이 장강수로십팔채를 치고 있다. 그 말은 수로채의 운명도 이제 끝이란 소리지.”
“…….”
“그럼 우리가 너희 같은 조무래기들을 좌시해 줘야 할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더러운 쥐새끼 같은 놈들. 오늘부터 남경 땅에 너희가 발붙일 곳은 없다! 마지막 기회를 주지. 지금 당장 짐을 싸서 남경에서 꺼져라. 그렇지 않다면 오늘 너희는 모두 죽는다.”
고태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었다.
‘이, 이놈들이 미쳤나?’
정말 전쟁을 하자는 건가?
이건 그가 감히 대답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건 적어도 그의 윗선은 돼야…….
“셋.”
“자, 잠깐! 기다려라, 초상길!”
“둘.”
“이, 이런!”
“하나. 쳐라! 오늘 귀갈파를 남경에서 모조리 몰아낸다!”
“예!”
남경쾌검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명을 내렸다. 대기하고 있던 제자들이 검을 뽑아 들고 일제히 귀갈파를 항해 달려들었다.
“모조리 무찔러라!”
“이 개자식들! 그동안 우리가 힘이 없어서 참아 준 줄 아느냐!”
추의문도들이 달려들자 귀갈파 역시 분분히 병기를 뽑아 들었다.
“뭣들 하느냐! 저 샌님들을 모조리 쳐 죽여 버려라!”
“이놈들이 우리를 만만히 봤다 이거지?”
“다 죽여 버려!”
시전 한중간에서 검과 도가 오가니 순식간에 주변이 난장판이 되고 피가 사방으로 솟구쳤다.
“아, 아이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시전 상인들은 기겁하며 황급히 흩어져 달아났다.
두 문파는 아랑곳하지 않고 살벌한 싸움을 이어 갔다.
‘세상에, 전쟁이라니.’
‘십 년 내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추의문이 드디어 칼을 뽑았구나!’
그때 시전의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거지 하나가 심각한 얼굴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전쟁이라니.”
이건 그냥 단순한 충돌 정도가 아니다. 서로의 존망을 걸고 싸워 대고 있다. 누가 이기든 간에 남경의 판도가 바뀔 만한 일이었다.
‘빨리 상부에 알려야 해.’
그는 헐레벌떡 자신의 움막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겉으로 나름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던 남경 땅이 순식간에 전화에 물들어 갔다.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곳은 비단 남경뿐만이 아니었다.
사파와 정파가 공존하는 도시라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호수처럼 고요하던 강호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장강에 던져진 거대한 돌은 장강뿐 아니라 천하를 뒤흔들어 놓았다.
전 중원 각지에서 날아오른 전서구들이 개방의 총단을 향해 쉼 없이 날았다. 천하에 벌어진 이변을 알리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