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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784화 (781/1,567)

784화. 어디 뒈지게 한번 놀아 보죠. (4)

“고개 숙여라!”

“허튼 짓 하는 놈은 베겠다!”

튼튼한 쇠줄에 엮인 수적들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무당의 검수들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차가운 눈빛으로 주시했다.

“흠.”

허도진인은 주위를 둘러보다 낮게 신음했다.

‘지독하군.’

피비린내에 코가 아플 지경이었다.

물론 그 역시 무당의 제자로 살아왔고, 여러 번 협객행에 나섰으며, 여러 번 전투를 치렀다. 하지만 이번처럼 많은 이들과 싸우고 그 목숨을 거둔 경험은 그에게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예상 이상으로 제자들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군.’

이런 작은 수채 따위는 일각도 걸리지 않아 정리했어야 옳다. 무당의 힘을 과신해서가 아니다. 그저 객관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와류채와 무당의 힘 차이는 극명하니까 그리 예상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각이 아니라 반 시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너무 오래 실전을 겪지 못했어.’

무당이 과거보다 약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제 실력을 실전에서 온전히 발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작은 수채를 먼저 치길 잘했군.”

이런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한 채, 큰 수채와 전투를 치렀다면 분명 사상자가 생겼을 것이다.

피를 보기로 한 이상 희생이야 피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만, 그 수를 최소로 줄이고 싶은 것이 장문인의 당연한 마음이었다.

“제압을 완료했습니다, 장문인.”

허산자의 말에 허도진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포로로 잡은 이들은 모조리 관아에 넘기고, 창고에 쌓인 재물을 양민들에게 나눠 주어라. 물건의 주인을 찾을 수 있다면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고.”

말을 하면서도 허도진인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야 마치 우리가 화산을 따라하는 것 같군.’

설사 그게 아니라고 해도 세인들의 생각은 방금 그가 했던 생각과 대동소이할 것이다.

하지만 별수 없다.

따라한다는 소리를 듣는 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평보다는 나으니까.

“장문인……. 그게, 문제가 조금 있습니다.”

“문제?”

허산자의 말에 허도진인이 눈을 찌푸린다.

“문제라니?”

“수채의 창고를 확인해 보았는데…… 생각보다 재물이 많지 않습니다.”

“……많지 않다?”

“예.”

허산자가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무한 백성들의 말에 따르면 최근에 수적들이 기승을 부려 배를 타고 장강으로 나간 이들이 대량의 물품과 돈을 약탈당했다고 했는데…… 정작 이놈들의 곳간에는 그만한 양의 재물이 없습니다.”

“…….”

“그래서 수적 놈들을 취조해 보았으나, 그런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곳이 아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배를 습격한 수적들이 누구인지는 이들도 모른다고 합니다.”

“…….”

허도진인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한 끝에 말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저 다른 수채가 일을 벌인 것일 테고.”

“예.”

“그게 아니라면…….”

허도진인은 다음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누군가 이 상황을 유도했다.’

쉬이 말로 꺼내 놓을 만한 생각이 아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천하의 무당이 누군가의 수작질에 놀아났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으니까.

“어찌합니까, 장문인?”

“상관없다.”

“예?”

허산자의 되물음에 허도진인이 짧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해가 있었든, 적을 잘못 찾았든,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 음모를 꾸몄든,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양민들의 고통을 모른 척하지 않고 장강으로 와서 수적을 토벌했다는 사실이다.”

“…….”

“재물을 모두 걷어 양민들에게 나눠 주어라.”

“빼앗긴 재물이 많은데, 나눠 주는 재물이 적다면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까 걱정입니다.”

“곧 다른 수채도 토벌한다고 전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허산자가 깊게 읍하고 물러났다. 홀로 남은 허도진인의 마음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장강수로채를 상대로 음모를 꾸민다?’

장강이 아무리 넓다고는 하나, 저 수채들의 눈을 피해 수적을 가장하고 일을 벌일 만큼 능력 있는 곳이 천하에 몇 곳이나 있겠는가?

머릿속으로 몇몇 이름을 떠올렸던 허도진인은 이내 그 생각들을 도로 지워 버렸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저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이든, 원하는 것만 얻으면 된다. 지금 그들은 설사 눈앞에 있는 곳이 불구덩이라고 해도 걸어 들어가야만 하니까.

다만…….

“우리를 농락한 것이라면 누구든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짧게 이를 간 그는 찬바람이 나도록 몸을 획 돌려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아미타불!”

웅혼한 불호가 울려 퍼졌다.

우우우웅!

내기가 진동하는 소리는 흡사 수천 마리 벌떼가 웅웅대는 것처럼 들렸다.

“다, 달아나라!”

수적들이 두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황색의 승복을 입은 중은 강호에서 절대적인 힘을 상징한다. 같은 편에 선 이들에게야 더없이 든든한 모습이지만, 상대해야 하는 이들의 입장에선 이보다 더 두려울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강호에서 황색 승복을 입는 이들은 오로지 소림뿐이기 때문이다.

천년소림.

그 이름을 무시할 수 있는 이들이 누가 있겠는가!

신주오패라 불리는 장강수로십팔채의 모든 전력이 모인다고 해도 저 소림을 감당할 수 있단 보장이 없다. 그런데 그에 속한 일개 수채가 소림과 싸운다는 건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었다.

수적들 역시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애초에 맞서 싸울 생각 따윈 하지도 않았다.

황색 승복을 입은 중들을 보는 순간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여 비명을 내지르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려 전력으로 질주하는 이들도 있었고, 머리를 쓰는 이들은 푸른 장강에 주저 없이 몸을 던졌다.

“흐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법계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방장께서 세우신 의도는 알겠으나…….’

사실 이런 수채 하나 토벌하는 일에 소림이 직접 나서는 것은 낭비나 다름없다. 물론 협의를 지키는 건 무척 좋은 일이다. 그러나 반드시 시간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장강까지 오가는 시간 동안 수련하지 못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꽤 큰 피해를 감수한 여정이다. 저런 조무래기들 몇몇 처리한다 해서 실력이 늘 리도 없으니 말이다.

“아미타불. 수적의 수장도 머리가 아프겠군.”

소림에 무당, 청성까지. 구파일방 중 세 문파가 장강으로 들이치고 있다. 그리고 안휘의 남궁세가마저 검을 들었으니 제아무리 신주오패로 불리는 장강수로채라고 한들, 이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쩌면 이 일로 장강수로십팔채가 역사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한 문파만 왔다면 적당한 수준에서 토벌을 끝내고 돌아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천하를 오시하는 네 문파가 와 있다.

구파만이라면 적당히 체면치레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마저 참전했다. 체면 때문에라도 다른 문파보다 적은 전과를 올리고 돌아갈 순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산파가 수로채 토벌을 가장 먼저 시작했다는 사실은 천하의 곳곳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이의 이름이 뒤따른 이들의 것보다 더 크게 울려 퍼지는 것은 당연한 일.

소림과 무당, 남궁세가가 화산의 뒤꽁무니를 쫓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그들 이상의 전과를 올려야 한다.

“아미타불.”

법계의 입에서 흘러나온 도호에 갑갑한 마음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만일 이 일로 장강수로십팔채가 멸문하거나, 괴멸적인 피해를 입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강호의 균형은 반드시 무너진다.

중원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장강에서부터 균형이 깨진다? 그 말은 결국, 이 일이 대체 어디까지 번져 나갈지 모른다는 의미다.

‘방장.’

법정이 이런 사실을 모르셨을 리 없을 텐데……. 어찌하여 이리도 급히 토벌을 명하셨단 말인가?

눈앞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는 것은 불의(不意)다. 하지만 바로 눈앞의 몇몇을 구하기 위해 더 많은 이를 고통에 밀어 넣는 것 역시 불의 아닌가?

‘모르겠구나.’

법계는 알고 있다.

천하만민이라고는 하지만, 그들 모두가 천하의 정세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 세상을 움직이고 흐름을 이끄는 이들은 불과 몇몇에 지나지 않는다.

그 안에 들지 못하는 법계로서는 그저 맡은 바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달아난 수적들이 양민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나도 놓치지 말고 제압하라!”

“예!”

우렁찬 대답을 쏟아 낸 소림승들이 중이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기세를 내뿜으며 달려들었다.

“……아미타불. 큰일은 없어야 할 터인데.”

화산이 굴린 작은 눈덩이가 장강이라는 비탈을 타고 점점 불어나고 있다.

이제 소림도 무당도 이 눈덩이를 멈출 방법이 없다. 그저 이 눈덩이가 산 아래의 민가를 덮치지 않기를 빌고 또 빌 뿐이다.

* * *

소림과 무당이 수채들을 토벌한다는 사실이 순식간에 장강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장강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이들은 그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하고 환호했다.

그동안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겨 참고 살았지만, 생돈을 수적들에게 빼앗기고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더구나 최근에는 수적들의 패악질이 너무 심해져 다들 몸살을 앓던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다른 곳도 아닌 소림과 무당, 남궁세가가 나서 준다니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 구파일방의 하나인 청성마저 초라해 보일 정도로 대단한 곳들이다. 당연히 장강의 주민들은 상황이 나아질 거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구파일방이야. 역시 오대세가다. 일이 심각해지니 결국 이렇게 나서 주는군!”

“그러니 말일세! 진즉에 좀 나서 줄 것이지.”

“일이 심각해지는지 지켜보고 있었던 거겠지. 협의지문들 아닌가?”

사람들이 호의 어린 말을 늘어놓았다. 과거였다면 한동안 그저 이렇게 상찬만이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조금 바뀌어, 다른 말을 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멋모르는 소리 말게. 저 고고하신 양반들이 진짜로 우릴 돕겠다고 나섰을 것 같나?”

“그럼? 수적을 토벌하는데 당연히 우릴 도와주러 온 거지.”

“그럼 지금까지는? 지금까지는 수적이 없었나? 수적에게 목숨을 잃고, 노예로 팔려 나가는 이들이 없었냐고!”

“그건…….”

신경질적으로 말을 뱉은 사내가 혀를 찬다.

“감사할 곳을 똑바로 알아야지. 이게 다 화산의 덕이니 화산에 감사하게.”

“그게 뭔 소린가? 이게 다 화산 덕이라니? 물론 화산이 토벌을 시작한 것은 맞지만, 이 모든 게 거기 덕이라고 할 수는 없잖은가?”

“거 물정 모르는 소리 하기는! 화산이 나서지 않았다면 구파일방이고 오대세가고 장강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을 걸세. 천우맹의 수장인 화산이 장강에서 수적을 토벌하고 민심을 얻는다 싶으니 배알이 뒤틀려서 장강으로 앞다투어 뛰어온 것 아닌가?”

“……그건 너무 꼬인 생각 같은데.”

“그럼 저들이 수십 년 동안 장강에 수적이 있다는 걸 몰라서 내버려 뒀다는 말인가?”

“…….”

“순진하게 박수 쳐 대지 말라 이거야! 그게 저 양반들이 노리는 거니까. 감사는 화산에 해야지! 화산이야말로 아무 조건 없이 장강으로 와 수적을 토벌해 주지 않았는가?”

“그건 그렇지. 화산에게는 참 고맙지.”

“두고 보게. 내 생각에는 화산이 속한 천우맹이 구파일방을 누를 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저저, 저치가 또 망상병이 도졌구먼그래.”

“진짜라니까 그러네?!”

누군가는 화산에 호의를 가졌고, 누군가는 그래도 뿌리 깊은 역사를 등에 업은 구파일방을 옹호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어느 쪽에 호의를 가지건 간에, 장강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단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산발적으로 벌어진 전투의 결과는 천하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강호의 흐름과 판도를 완전히 바꿔 버릴 과격한 급류가 장강을 타고 천하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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