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2화. 어디 뒈지게 한번 놀아 보죠. (2)
“화산…….”
무당 장문인 허도진인의 얼굴이 살얼음이라도 낀 듯 싸늘해졌다.
보고를 마친 허산자는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냉한 기운에 마른침을 삼켰다.
허도진인은 화를 삭이는 듯 다탁을 꽉 움켜잡았다.
지난 비무에서 참패를 당한 이후에도 그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모자란 것은 채우면 될 일이라 고개를 내저었을 뿐이다.
하지만 단 하나의 단어에는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는구나. 화산……. 화산!”
말을 씹어뱉은 허도진인이 허산자를 노려보았다.
“그들이 수채를 토벌했다고?”
“예. 덕분에 장강 주변의 주민들이 화산을 칭송하고…….”
“우릴 욕하고 있겠지.”
“……이건 화산 탓도 있습니다. 그놈들이 들쑤셔서 그런지, 최근 수적들이 날뛰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유야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건 결과지. 결과적으로는 화산이 또 칭송을 받고 우리는 욕을 먹고 있다 이거겠지?”
“……예.”
잠시 침묵하던 허도진인이 입을 열었다.
“제자들을 준비시켜라.”
“예?”
“내가 직접 가겠다. 수채 하나 정도는 토벌해야겠어. 여력이 된다면 두어 개 정도.”
화들짝 놀란 허산자가 소리쳤다.
“자, 장문인. 장강으로 가시겠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어찌……. 장문인. 지금 떠드는 이들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곧 잊어버릴 겁니다. 굳이 힘을 낭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이야 잊겠지.”
“……예?”
허도진인이 차갑게 일갈했다.
“하지만 거기에 화산이 있다. 잊었느냐? 화산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치솟은 명성을 제 것으로 만들고, 그걸 이득으로 굴릴 줄 안다.”
“…….”
“이번에도 내버려 둔다면 또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저질러서 장강마저 제 손에 넣으려 하겠지.”
“하, 하오나…….”
쾅!
허도진인이 다탁을 내리쳤다.
“그렇게 망신을 당하고도 화산을 무시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미련한 것 아니냐!”
“…….”
“예전의 화산이라면 나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젠 예전의 화산이 아니야. 그들의 전력이 강해진 것은 별문제도 아니야. 문제는 화산이 천우맹이라는 세력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
“구파 대신 화산을 택할 멍청이는 없다. 하지만 구파 대신 천우맹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렇게 한 뼘 한 뼘 내어 주다 보면 언젠가는 입지가 뒤집힌다.”
“그들이 어찌 구파에 비견되겠습니까?”
“아직은 어림없지. 아직은.”
“…….”
“하지만 화산의 이름을 처음 다시 들었을 때도, 똑같은 말을 했었지.”
허산자는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하더냐? 직접 상대하기조차 가소로웠던 화산이 이제 날카로운 비수를 우리의 턱 밑에 들이대고 있다. 이 꼴이 되고도 체면을 차리는 게 중하겠느냐.”
“…….”
“잔말 말고 준비해라. 장강으로 갈 것이다. 선수는 뺏겼지만, 아직은 늦지 않았다.”
허도진인의 말에 틀린 구석이 없다는 건 허산자도 알고 있다. 애초에 허도진인은 생각의 깊이가 다르다. 당연히 더 멀리, 깊게 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허산자는 망설임을 떨칠 수 없었다.
지금 이 허도진인의 명령이 정말 깊은 통찰에서 나온 것인지, 저 화산에 대한 악감정에서 나온 것인지를 쉬이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장문인. 저는…….”
그때였다.
“장문인!”
문 밖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중요한 이야기 중이니 나중에 오거라.”
“장문인……. 그게, 서찰이 왔습니다만.”
“나중에 보겠다.”
“소림의 방장이 보낸 서찰입니다.”
“……가지고 들어오너라.”
“예.”
문이 열리자 들어온 이가 서찰을 건네고 다시 나갔다. 봉투를 뜯고 서찰을 펼친 허도진인의 입꼬리가 잠시 후 묘하게 비틀렸다.
그를 살피던 허산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내용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소림에서 장강으로 제자들을 파견한다는구나.”
“……예?”
“수채를 토벌하시겠다는군. 고고한 척하더니 이번만은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야.”
허산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 소림에서도?’
그렇다면 허도진인이 한 생각을 소림에서도 똑같이 했다는 뜻이다.
이건 두 가지를 의미한다. 허도진인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저 화산이 이제는 구파일방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무당과 소림을 모두 움직이게 할 만한 문파가 되었다는 건가?’
격세지감이란 이럴 때 써야 하는 말일 것이다.
“꾸물거리다가는 소림에도 선수를 빼앗기겠군. 준비해라. 내 직접 제자들을 이끌고 장강으로 가겠다.”
“예, 장문인.”
일이 이리되니 허산자도 더 이상 허도진인을 말릴 수 없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허산자가 급히 밖으로 나가자 방에 홀로 남은 허도진인은 가라앉은 눈으로 다탁을 내려다보았다.
‘화산…….’
더는 날뛰게 두지 않는다.
더는.
* * *
화산의 달라진 위상을 온 세상이 실감하고 있었다.
장강에서 살아가는 이도, 먼 곳에서 그 소식을 듣는 이들도, 심지어 그 소식을 듣고 바삐 움직이는 이들조차도 이제 더는 화산의 움직임을 무시할 수 없었다.
본디 영향력이 커지다 보면 별것 아닌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없던 의미가 붙어 버리기 마련이다.
화산이 장강에서 벌이는 일들은 살이 붙어 더욱더 크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정작 그 당사자인 화산파 제자들은 그 달라진 위상을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실감하기는커녕…….
“끄으으으으…….”
“비, 빌어먹을…….”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오오오!”
수레를 끌던 곽회가 결국 앞으로 철퍽 엎어졌다. 그가 내려놓은 수레에는 돌과 흙이 말 그대로 산처럼 쌓여 있었다.
“빠, 빨리 일어나! 청명이 올지도 몰라!”
“난리 난다! 수련 안 해서 체력이 없는 거라고 장강 한 바퀴 뛰고 오라고 할걸?”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장강을 어떻게 뛰고 와?”
“언제는 그 새끼 하는 짓이 말이 된 적 있었어?”
어……. 그건 확실히 맞는 말이네.
결국 곽회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강가까지 이어진 기다란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미친놈이.”
청명이 그들에게 내린 지시는 아주 간단했다.
- 간단한 거 하나만 해 주면 돼. 저기 강 보여?
- 응. 보이지.
- 메워.
- 응?
- 메우라고.
- 으응?
강을 메운다.
이게 과연 사람이 생각할 만한 짓인가?
물론 사람이 노력으로 하지 못할 게 없으며, 인간이 하려고만 든다면 산도 없앨 수 있다고 배워 온 화산의 제자들은 정말 어지간한 강 정도는 거뜬히 메우고도 남을 인간들이다.
문제는 지금 그들의 앞에 있는 강이 웬만한 강이 아니라 천하에서 가장 넓고 긴 장강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그들이 있는 섬이 가운데에 껴 있다고 해도 그 너비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었다.
“이…… 이 미친 짓을 왜 하는 건데?”
“……섬 건너편 육지 쪽을 조금 메우면 뱃길이 짧아져서 방어하기가 쉽다잖아. 화포 사거리도 활용하기 좋고. 그리고 뭐라더라? 강이 중간에 좁아지면 유속이 더 빨라져서 배를 몰아 공격하기 어려워진다던가?”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 그걸 이렇게 해결하는 미친놈이 어디에 있냐고!”
“……그 새끼도 별생각 없었대.”
“그런데 왜?”
“유 사고가 역시 강폭이 넓다고 한마디 했더니, 청명이가 그럼 메우면 된다고 했다잖아.”
“사고……. 사고오오오오!”
왜…….
대체 왜 그럽니까! 왜!
그 새끼가 언제 문제를 정상적으로 해결하는 걸 보신 적 있냐고요!
“그런데 더 슬픈 건 말야…….”
“응?”
“……하다 보니 메워지긴 메워진다?”
“…….”
그게 더 슬펐다.
섬 건너편 육지에서 근처에 보이는 산을 다 깠다. 흙이고 돌이고 할 것 없이 퍼 날라 들이붓다 보니 아득할 만큼 넓어 보이던 강폭이 차츰 좁아졌다.
‘이걸 기어이 해내지 말라고, 이 미친놈들아…….’
시키는 놈이나, 시킨다고 그걸 해내는 놈들이나.
이럴 거면 차라리 도사로 살 게 아니라 나라에서 시키는 공사만 받아서 해도 삼대가 편히 먹고 살지 않을까?
“……이 기세면 칠 주야 내로는 끝나겠는데?”
“아니지. 가면 갈수록 강이 깊어지잖아. 열흘은 걸리겠지.”
“에헤이, 모르는 소리. 청명이 놈이 그 정도로 끝낼 리가 없지. 보나마나 유속에 흙 쓸려 가면 안 된다고 뭘 또 시킬 거야. 나는 보름 본다.”
제자들은 이제 제법 능숙하게 견적도 내기 시작했다.
워낙 이런 일 저런 일에 불려가 육체 노동을 해 대다 보니 어지간한 전문가들보다도 계산이 빨랐다.
“닷새.”
“뭐? 참나, 닷새는 말이 안 되지. 사람이 그걸 어떻게 하냐?”
“괜찮아. 할 수 있어.”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어?”
맞은편 섬을 보며 왁자지껄 떠들던 제자들이 고개를 천천히 뒤로 돌렸다.
악귀……. 아니, 청명이 서 있었다.
“처, 청명아…….”
“되지. 왜 안 돼? 이렇게 모여서 노가리 깔 시간도 있는데 닷새 내로 못 끝내면 사람이 아니지? 안 그래?”
“…….”
“가서 일해.”
“……안 때려?”
“내가 뭐 심심하면 사람 패?”
곽회는 순간 ‘응’ 하고 대답할 뻔했지만 놀라운 기지로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오 일 내로 못 끝내면 그때 두 배로 맞는다.”
“…….”
“계속 놀아 봐. 아예 힘닿는 데까지 놀아 봐, 한번. 강바닥이 얼마나 차가운지 알게 해 줄 테니까.”
“이, 일할게. 지금 바로.”
“확!”
곽회와 그 무리가 기겁하며 수레를 끌고 부리나케 강변으로 달렸다.
“쯧.”
그 광경을 본 산적들의 얼굴에는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하나는 저 망할 인간이 도적이란 이유로 괴롭힌 게 아니라 그냥 누구든 잡으면 괴롭힌다는 사실에서 오는 미묘한 기쁨. 그리고 똑같은 이유에서 오는 확연한 서글픔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놈.’
‘야차!’
‘진짜 사람도 아니야…….’
마침 청명이 손을 탁탁 털고 다시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화-산-신-료오오오오옹!”
“아오! 귀 아파!”
저 멀리서부터 우렁우렁 들려오는 소리에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그의 눈에 이쪽으로 전력으로 달려오는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엥? 저 양반은 여기까지 또 언제 왔대?”
홍대광이 전력으로 달려와 그의 앞에서 죽어라 숨을 몰아쉬었다.
“아오, 헥헥! 어으, 숨차!”
“……여긴 또 왜 왔어요?”
“바늘 가는데 실이 안 갈 수 있나.”
“누가 실인데. 옷 꿰맬 실도 없는 거지가.”
“아니, 그 정도는……. 아,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화산신룡! 큰일 났다!”
“왜요? 왜 또 호들갑이신데?”
“지, 지금 소림이랑 무당이 장강으로 오고 있다! 수채를 토벌한단다!”
“오?”
“그뿐 아니다! 안휘의 남궁세가도 움직인다! 그리고 사천 쪽에서 청성도 장강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이다!”
“소림, 무당, 청성에…… 남궁세가라.”
청명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주 엉덩이에 불이 붙은 모양이네. 하기야…… 이제 예전처럼 느긋하게 보고 있을 수는 없겠지.”
움직일 것은 예상했다. 다만 청명의 예상보다 배는 더 빨랐다.
심지어 남궁세가까지 움직이는 것을 보면 천우맹의 존재가 청명의 생각 이상으로 저들에게 상당한 압박인 모양이었다.
“이,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뭘요?”
“구파랑 남궁세가가 장강으로 온다니까.”
“그러니까 그게 왜요?”
“대, 대책을 세워야지!”
“내가 왜요?”
“응?”
청명은 말 같잖은 소리를 들은 듯 코웃음을 쳤다.
“걔들이 나랑 싸우러 오는 것도 아니고, 수적들이랑 싸우러 오는 건데 내가 왜 대책을 세워요? 수로채가 대책을 세워야지.”
“……어?”
그러네?
“나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지. 애들 피 터지게 싸우는 거 구경이나 해야겠다. 낄낄낄낄.”
청명은 간만에 기분 좋다는 듯이 웃으며 휘적휘적 멀어져 갔다.
“……나 왜 온 거지?”
그 소식을 전하겠다고 발바닥에 땀나도록 달려온 홍대광의 어깨만 힘없이 축 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