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0화. 인생은 원래 고통이라오. (4)
“손이 놀잖아, 이 산적 놈들아!”
사자후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현종이 본 것과 똑같은 일이 섬 반대편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에는 청명이 놈이 있다는 점이었다.
아주 작은 차이에 불과하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작은 차이가 만들어 낸 결과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끄으으으…….”
“소, 손에 힘이 안 들어가.”
배에 달라붙어 낑낑대던 이들 중 일부가 슬금슬금 물가에 버티고 선 청명 쪽으로 다가왔다.
“뭐야?”
청명이 눈을 부라리자 산적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어지듯 납작 몸을 숙였다.
“아이고, 도사님! 이러다가 다 죽습니다!”
“오전에만 물에 빠져서 떠내려간 사람이 서른을 넘습니다!”
“다들 너무 지쳤습니다. 물에 떠내려가려는 배를 잡고 있는 게 상상 이상으로 힘이 듭니다.”
이어지는 하소연에 청명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예?”
“그래서?”
“…….”
언어는 통하되 말이 통하지 않는다. 본디 말이라는 게 서로 그 뜻을 이해할 때에나 의미를 지닌다. 안타깝게도 이곳에 말을 하는 이는 있어도 이해하는 이는 존재하질 않았다.
‘웬만하면 이 작업은 포기합시다’ 하고 말하려 했던 산적들은 ‘얘들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고 정말 의아해하는 듯한 청명의 표정을 보며 슬그머니 말을 바꾸었다.
“조, 좀 쉬기라도 해야…….”
“뭐? 쉬어?”
“휴, 휴식을…….”
“휴우시이이이이익?”
청명의 두 눈에서 불똥이 파박 튀었다.
“아니, 산에 처박혀서 신선놀음이나 하던 것들이라 개념도 산에서 뛰놀게 두고 내려왔나? 어어디 팔다리 멀쩡하게 달린 것들이 벌건 대낮에 쉬어, 쉬기를!”
저기…… 보통 산에 처박혀서 신선놀음하는 사람들을 도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화산 도사님께서 산적에게 신선놀음한다고 하시면…….
그리고 저희는 어제도 밤새도록 일을 했는데…….
“도사님, 다들 너무 지쳤습니다…….”
“지쳐?”
청명의 고개가 못마땅하게 옆으로 살짝 꺾였다.
“산은 빨빨거리면서 잘도 타고 다니는 놈들이 고작 그 정도 일했다고 지친다고? 그러니까 녹림이 이 모양 이 꼴이지! 왜? 이 기회에 제대로 지치는 게 뭔지 내가 한번 보여 줘?”
“그, 그게 아니라…….”
“하여튼 근성들이 없어요, 근성이! 하기야 그러니 산적질이나 해 먹고 살겠지! 오냐, 내가 이번 기회에 너희 정신머리를 아주 뜯어 고쳐 주마! 당장 자리로 돌아가서 일하지 못해?”
“히이이이익!”
청명이 눈을 부라리며 산적들 궁둥이를 걷어차는 모습을 지켜보던 일장로가 슬쩍 임소병을 향해 입을 뗐다.
“저기…… 녹림왕이시여.”
“음?”
망루에 앉아 경치를 감상하고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임소병이 왜 부르냐는 듯 일장로를 마주 보았다.
“……저대로 내버려 두실 겁니까?”
“왜?”
“말이 좀 심한 것 같은데…….”
“아, 방금 그 말?”
우아하게 찻잔을 다탁에 내려 둔 임소병이 빙긋 웃었다.
“틀린 말은 없지 않나?”
“…….”
“원래 맞는 말이 속에 쓴 법이지. 이제는 일장로도 쓴 소리를 좀 받아들일 때가 됐어.”
말문이 막힌 일장로는 콧잔등이 다 시큰해졌다.
저런 놈이 화산신룡인 것도 분명 문제다. 천하제일후기지수이며 후대의 천하제일인 자리를 맡아 놓았다고 평해지는 화산신룡이 저런 놈이라는 건 분명 강호의 크나큰 불행이었다.
하지만 녹림의 입장에서는 그보다도 이 인간이 녹림왕이라는 게 더 문제였다.
‘강호가 어찌 되려고.’
산적질을 해 먹고 사는 사파 놈인 그가 강호의 미래를 걱정하는 참혹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접근한 배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뛰어내렸다.
“도자아아아앙!”
“음?”
내리자마자 희희낙락 청명을 향해 달려오며 내지른 기쁨의 함성이 활기차게 울렸다.
“백뢰포! 백뢰포 여섯 문 모두 회수했습니다!”
“크흑! 진짜 힘들었습니다.”
“수적 놈들은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용케도 다 살긴 했지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쨌든 지시하신 대로 모두 찾아왔습니다!”
“오?”
청명의 얼굴이 간만에 풀리며 부드러워졌다.
“다 찾았다고?”
“예, 도장! 크흑! 정말…… 정말 너무 힘들었습니다. 사슬이 짧아서 저희도 사슬을 잡고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다 보니 이게…….”
“그래, 그래. 고생 많았어.”
조잘조잘 그간의 고생을 설명하는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청명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다시 물었다.
“그런데 몇 문이라고?”
“여섯 문입니다.”
“아, 그래?”
그 순간 벼락같이 몸을 날린 청명이 산적에게 날아차기를 했다.
“꿰에에엑!”
돼지 멱따는 비명과 함께 산적이 데굴데굴 뒤로 나가떨어졌다.
“이 새끼들이, 내 눈은 옹이구멍이냐? 뭐? 몇 문? 여섯 문? 가라앉은 배들에 실려 있던 화포 수를 내가 분명히 싸우면서 똑똑히 봤는데! 뭐? 여섯 문? 여섯 무우우운?”
바닥에 엎어진 산적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저 독한 새끼……. 그리 지독하게 싸우는 와중에 그걸 또 세고 있었네.
“아, 무식한 산적 놈이라 수를 못 세는 모양이지? 오냐! 내가 지금부터 개수 세는 법을 확실히 알려 주마!”
청명이 냅다 달려 산적 위에 올라타고는 풍차처럼 양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 대! 두 대! 다섯 대! 열 대! 세, 이 새끼야! 맞은 만큼 세! 마지막에 맞은 거 숫자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맞는다!”
“아악! 아아아아악! 살려 주십쇼! 도장! 잘못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실언했습니다!”
“힘들어? 뒈지면 안 힘들어, 이 새끼야! 그냥 죽어!”
산적들과 수적들의 얼굴이 점차 허옇게 질려 갔다.
애초에 도적은 강자에게 꼼짝하지 못한다.
그들이 강자존의 율법을 따르기 때문이라기보다, 애초에 그들은 세간의 도덕이나 법률을 따르는 이들이 아니기에 더 강한 자의 압제에 힘이 아닌 다른 방도로 대항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뭘 어쩌겠는가?
산적 주제에 힘을 쓰는 사람에게 도덕을 논하겠는가? 아니면 수적 주제에 관아에 가서 신고라도 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청명은 도적들의 천적이나 다름없다.
일단 기본적으로 어쨌거나…… 도사고, 나름은…… 정파 놈이라 명분도 갖춘 데다가 힘은 무지막지하게 세다. 그런 놈이 눈에 독기를 품고 몰아붙이니 도리가 없을 수밖에.
“확 그냥!”
청명이 널브러진 산적에게서 눈을 떼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모두가 움찔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디 도적질하는 놈들이 사람대접을 바라! 살아 봐야 도움도 안 되는 놈들, 죄다 모아서 강바닥에 처박아 버릴라!”
그 도적들 데리고 일하는 놈이 도적을 비난하며 성질을 부리고 있다.
“백뢰포 모조리 회수하기 전까지는 밥 처먹을 생각도 하지 마!”
“그, 그럼 저희는 뭘 먹습니까?”
“물고기라도 잡아 처먹든가! 저기 널린 게 고기구만!”
“…….”
“아, 그리고 배 다 잇기 전에는 잠 잘 생각 하지 말고!”
“…….”
“허리를 펴지 말고 일을 하란 말이야! 허리를 펴지 말고! 중간중간 어설프게 쉬면 더 힘들어! 바짝 끝내 놓고 몰아서 쉬겠다! 기필코 해내겠다! 항시 그런 마음가짐이면 사람이 못 할 게 없어!”
잔소리 때문에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산에 가고 싶다.’
‘차라리 채주한테 욕먹을 때가 나았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은 섬이었다.
산적들은 청명과 임소병의 눈을 피해 이곳에서 달아날 방법이 없고, 수적들은 하나같이 다리에 쇠고랑을 차고 있다. 아무리 수공에 능하다 해도 이 무거운 쇠고랑을 차고 청명을 피해 달아난다는 건 말만 들어도 꿈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다른 게 노예냐. 이게 노예지.’
‘어흑. 내 팔자야…….’
노예……. 아니, 도적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 갔다.
애초에 청명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딱히 자비를 베풀지 않지만, 도적 같은 사파놈들은 왜 사람취급을 해 줘야 하는지 조금도 이해를 못 하는 사람이다.
타고난 천성이 도적은 쪄서 발라먹을 청명 본인도 화산의 가르침에 따라 이렇게나 참고(?) 사는데, 별것도 아닌 놈들이 도적이랍시고 막 사는 꼴을 도대체 무슨 근거로 참아 주겠는가.
“하여간 이 새끼들 더 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지!”
“청명아.”
“왜! 이 새…….”
어?
욕을 하려다 말고 청명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라?”
이 얼굴이 왜 여기 있지?
고개를 갸웃한 그는 조금 어색하게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어……. 언제 오셨어요, 장문인?”
“……방금 왔다.”
“아……. 오시면 오신다고 연락이라도 먼저…….”
아니지. 연락을 했겠지.
연락을 안 했으면 여기까지 어떻게 찾아왔겠는가…….
청명이 슬쩍 고개를 옆으로 빼 보니 현종 뒤에 숨은 백천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저걸 사숙이라고…….”
“크흠.”
이를 악물고 중얼거린 청명이 표정을 싹 바꾸며 현종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장문인,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죠? 어서 오십……. 아! 아아! 귀, 귀! 아! 귀! 장문인 귀! 귀 떨어져요!”
“이리 와라.”
“귀요! 귀! 아, 좀 놓으시고! 아악!”
청명의 엄살에도 현종은 빙그레 웃으며 귀를 더 쭉쭉 잡아당겼다.
“양민들이 노예로 팔려 나가는 걸 막으라고 명했더니, 산적이랑 수적을 직접 노예로 부리고 있어?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가서 한번 천천히 들어 보자꾸나.”
폭군이 모래사장에 긴 발자국을 남기며 질질 끌려간다. 그 와중에도 원독에 찬 눈으로 백천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그저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했다.
“으아아아아! 백처어어언! 진동료오오옹! 치사하게 말도 안 하고 어른 모셔 오기 있기 없……. 아아! 귀! 장문인! 귀! 아아…… 좀 뜯어진 것 같아요! 아니, 진짜로, 악!”
“입 다물고 따라오너라! 내 낯이 팔려서 원!”
“장문이이이이인!”
볼썽사납게 질질 끌려가는 화산신룡의 모습에 도적들은 모두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었다.
“……화산신룡이 끌려가?”
“그것도 귀를 잡혀서?”
이곳에 있는 이들은 청명이 대경채의 채주를 단숨에 두 쪽을 내 버리고, 물 위를 달려서 배를 검으로 자르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런 무시무시한 인간이 비명을 지르며 끌려가는 모습을 보니 황당하다 못해 영혼이 출타하는 것만 같았다.
“……저분이 화산의 장문인…….”
“세상에…… 얼마나 강하시기에 저런 괴물을 손쉽게 제압하시지.”
“크흠.”
백천은 아주 작게 헛기침했다.
불필요한 오해가 발생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뭐 굳이 정정해 줄 필요까지는 없을 듯싶었다.
“한동안 저놈은 밖으로 못 나올 테니, 다들 그 틈에 좀 쉬십시오.”
“가, 감사합니다, 도장!”
“크흑……. 드디어 쉴 수 있어!”
“장문인 만세! 만세!”
본디 정파의 도사와는 상극이어야 할 사파의 도적 놈들이 화산의 장문인을 입 모아 칭송하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고 보면 정사가 화합하는 역사적인 광경이겠으나, 그 속내는 너무도 짠내 나고 눈물겨웠다.
“그런데 저분은 여기까지 왜 오신 거래?”
“글쎄……. 보아하니 화산파 분들을 한가득 끌고 오신 것 같은데.”
“미리 이 상황을 예측하시고 여길 점거하러 오신 것 아닐까?”
“에이. 설마……. 사람이 천안통도 아니고.”
“아니지, 아니지. 생각해 보면 그게 맞지. 화산신룡이 아무리 천하제일후기지수라지만 그래 봐야 삼대제자 아닌가? 삼대제자가 이런 곳을 점령하고 지파를 만든다는 결정을 혼자 내리는 건 말이 안 되지.”
“어? 듣고 보니 그러네?”
도적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럼 화산 장문인께서 이 모든 것을 예상하시고…….”
“과연, 도가 깊은 도사 분들은 천기를 읽는다더니. 신통방통하네.”
“……나도 도교나 믿을까?”
“원시천존.”
“무량수불!”
백천이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합니다.’
정정해 줄 엄두도, 용기도 나질 않았다.
뭐…… 그리고 사실 의도야 어떻든 결과는 좋은 거니까…….
“원시천존…….”
백천의 입에서 힘없는 도호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