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6화. 뒤처지면 다 뒈진다고 해! (6)
턱!
잘린 머리가 모래톱에 처박히는 소리는 괴이할 정도로 섬뜩했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이 넓은 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채, 채주…….”
“어으…….”
채주가 죽었다.
그것도 조금 전까지 미친 듯이 날뛰던 놈의 손이 아니라, 다른 이의 손에 말이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확연했다.
‘모, 못 이겨.’
‘빌어먹을, 이런 곳에 오는 게 아니었어.’
기본적으로 산채든 수채든 새로 생기는 곳의 주축은 어설픈 실력을 가진 이들, 다른 곳에 어울리지 못한 이들, 또는 죄를 짓고 달아난 이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의리나 같은 게 있을 리 없으니 채주까지 죽은 마당에 더 싸울 의지 따윈 없었다. 오로지 공포와 혼란만이 퍼져 나갈 뿐.
수적들의 두 눈에 허탈함과 절망감이 가득 차올랐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생각이 든 청명은 히죽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다 뒈지기…….”
“무기를 버려라. 투항하는 자는 살려 주겠다.”
“…….”
청명이 눈을 뾰쪽하게 뜨고 획 돌아보았다.
어느새 백천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치고 있었다.
“저항하는 자는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라! 두 번 경고하지 않는다! 무기 버려!”
지엄하게 일갈하는 그 목소리에 수적들이 몸을 떨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사실 채주가 죽은 건 그저 상징적인 일일 뿐이다. 그의 생사 여부와는 무관하게, 승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들이 이길 확률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재빨리 무기를 던지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뭐야? 또 살려 준다고?”
“그냥 다 죽여 버리지! 이런 새끼들 살려 놔 봐야 뭔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자 산적이 수적을 다 죽여야 한다며 원성을 쏟아내는 괴이한 상황이 벌어졌다.
청명이었다면 그런 산적들부터 까고 봤겠지만, 그래도 백천은 자신들을 도와준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뭔지 아는 사람이었다.
“쓸데없는 살생은 피하고 싶습니다.”
“흐음……. 하긴, 뭐 도사님이시니까.”
산적들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섰다.
애초에 그들은 이곳에 단순히 지원을 온 입장이기도 했고, 이 전투에서 목소리를 높일 만큼 대단한 성과를 낸 것도 아니다. 전과는 저기 백천 옆에서 바들대고 있는 청명의 거의 다 올렸으니까.
“무기 버려, 이 새끼들아!”
“어쭈? 이게 반항을 해?”
대부분은 바로 항복했지만, 개중에는 끝까지 항전하는 이들도 있기는 했다.
만일 그들을 포위한 것이 화산의 제자들이었다면, 어떻게든 죽이지 않고 제압하려 애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들을 포위한 건 녹림도들. 저항하는 이들을 살려 줄 정도로 자비심이 넘칠 리 없었다.
“크아아아악!”
“끄윽!”
순식간에 도에 꿰뚫린 이들이 단말마를 내지르며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야 마지막까지 무기를 쥐고 있던 이들이 다급히 투항했다.
“음.”
그 광경을 보던 백천의 입매가 굳어졌다.
정말이지, 너무도 간단한 일이다.
그들에게는 분명 어려웠건만, 청명이 등장한 이후부터 수채 두 개를 정리하고, 저들을 제압하는 데까지 불과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허탈할 정도네.’
이 간단하기 짝이 없는 일을…….
아니, 사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이 모든 일이 간단했다면 다른 문파들에서 손 놓고 지켜볼 이유가 있었겠는가?
거꾸로다.
이 일이 간단한 게 아니라, 청명이기에 간단하게 처리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들이 겪은 일은 하나같이 험난하고 난해한 것들뿐이었다.
종남과 싸웠던 일이나, 사천당가와 친교를 맺고, 야수궁을 방문했던 일, 저 북해에서 마교와 싸웠던 일 등등.
‘모두 놈이 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다.’
그건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백천을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은 청명의 무력 부분에만 집중했을 뿐, 그의 수완을 과소평가해 왔다.
“뭘 그렇게 시무룩하게 있어?”
“응?”
그때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백천이 돌아보았다. 청명이 의아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이겼는데.”
“……어, 그렇지.”
백천이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청명은 슬며시 피식 웃었다.
‘실감했겠지.’
실력을 키운다는 건 좋은 일이고,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실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렇게 키운 제 실력을 백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번에 오검의 가장 큰 실수는 장강으로 나온 것도 아니고, 섣부르게 움직이다 적에게 승기를 내준 것도 아니다.
제 실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는 상황으로 끌려간 것이다.
‘그리고 이건 내 실수기도 하지.’
이번 상황을 지켜보며 현종이 했던 말의 뜻을 뼈저리게 느꼈다.
청명의 존재는 저들에게 크나큰 행운이었지만, 거꾸로 커다란 장애물이기도 했다.
- 아니, 이 양반아! 생각이 있으면 말을 하고 움직이든가! 아니면 상식적으로라도 움직이든가. 그렇게 혼자 훌훌 날아가서 이쪽 찌르고, 저쪽 찌르고! 매번 그렇게 우다다닥 멋대로 뒤집어엎으면 뒤따르는 사람은 어쩌라고!
- 거 종알종알 시끄러워, 인마!
당보도 때때로 툴툴댔었다.
당문의 장로씩이나 되는 당보도 청명의 뒤를 따라 전장을 누비는 걸 버거워했는데, 실력도 당보에 비할 수 없고 경험은 말할 것도 없는 화산의 제자들이야 오죽했겠는가?
배움이라는 것은 이해할 때나 의미를 지닌다. 이해도 못 한 채로 끌려 다니다 보면 배워지는 게 아니라 관성이 생기게 된다.
일단 적을 찾아내어 확인하고, 그 현장의 상황에 맞춰서 최적의 방식을 찾아내는 건 청명이 가장 즐겨 쓰는 방식이다. 백천도 나름대로 보고 느낀 것이 있어 그 방식대로 움직였지만, 안타깝게도 백천과 다른 오검은 청명이 아니다.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감각적으로 흐름을 찾아내는 청명의 방식을 머리만으로 모방하다 보면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차라리 백천이 원래 자신의 방식대로 신중을 기했다면 상황은 훨씬 나았을 터. 이번엔 과한 의욕이 화를 부른 것에 가깝다.
청명은 이 모든 과정을 알기에 굳이 오검을 탓하지 않은 것이다.
‘실패는 뼈저리지만…… 결과적으로는 득을 봤지.’
죽지 않고 살아남기만 한다면 모든 경험은 반드시 자산이 된다. 이번 실패는 저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반드시 꼭 필요한 실패이기도 했다.
‘앞으로는 이끌고 싸워야 할 테니까.’
청명의 눈이 살짝 가라앉는다.
지금까지는 그들만으로도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그들이 겪을 전투의 규모는 점점 더 커져 갈 것이다. 그리고 청명이 없는 곳에서 저들이 다른 이들을 이끌며 싸울 일도 늘어날 것이다.
너무 늦게 실패했다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터, 미리 경험하고 반성할 수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어이, 사숙.”
“응?”
“모든 일은 마무리를 제대로 해야지. 아직 끝난 게 아니잖아?”
“…….”
청명을 빤히 바라보던 백천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말이 맞다.”
그리고 뒤쪽에 있는 수채를 돌아보며 말했다.
“정리를 마저 해야지.”
그는 곧장 화산의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우선은 수채에 잡혀 온 양민들부터 구출해라. 몸이 약해진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소소가 바로 상태를 봐주고.”
“예, 사숙!”
“그리고 실종된 유령문의 제자가 여기에 있는지도 확인해라. 포로가 된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상이는 수적들을 심문해서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인질이 또 있는지도 확인해 보고.”
“알겠습니다, 사형.”
“그래.”
빠릿빠릿하게 돌아오는 대답을 들으며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승장구했었지.’
항상 실력 이상의 결과를 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제 실력이라 믿어 버린 모양이었다.
겸손한 척했지만, 정말 겸손하지는 못했다.
“가장 큰 잘못은 패하는 것도 실수하는 것도 아니다. 패배와 실수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거지.”
“…….”
“나부터 반성하마. 그러니 너희도 이번 일로 배운 것을 잊지 말고 새기거라.”
“예.”
사제들이 진중한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자 백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었다.
“오우. 멋진 척하는데?”
“…….”
이내 들려온 심술궂은 목소리 때문에 피어날 때보다 더 빠르게 사라졌지만.
* * *
“후우.”
섬이 거의 보이지 않을 곳까지 한참을 헤엄쳐 온 흑모귀가 뭍으로 걸어 나왔다.
떠나온 섬은 이제 거의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전투는 끝났겠죠?”
그를 뒤따라 나온 수하 중 하나가 뒤쪽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그렇겠지.”
“그럼 탁류청사도 죽었겠군요.”
흑모귀는 흠뻑 젖은 얼굴을 소매로 훔치며 입꼬리를 비틀고 웃었다.
“병신 같은 놈. 끝까지 의심도 하지 않았겠지.”
“제까짓 게 무슨 수로 의심을 했겠습니까. 그 비싼 백뢰포와 배를 가져다 바친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생각하니 아깝군.”
백뢰포나 배나 하나같이 거금을 들여야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이 강바닥에 가라앉았으니 아깝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애초에 그의 것도 아니었으니까.
“모르겠군. 어차피 이리될 일을.”
흑모귀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저 수채를 만드는 데 들어간 것들을 생각하면 생돈을 강바닥에 퍼부은 것이나 다름없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그의 머리로는 도통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야 뭐 돈만 받으면 되니까.”
“맞는 말이지.”
수하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에 흑모귀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강가로부터 이어지는 숲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살짝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흑모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굳이 마중을 나오실 필요는 없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급박하게 흐르는 것 같아 와 봤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그런 것 같군.”
흑모귀와 마주선 문사풍의 사내가 냉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이 필요하십니까?”
“굳이 그럴 필요야 있겠는가?”
그는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흑모귀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네.”
흑모귀는 조심스레 그가 내민 종이를 받아 펼쳐 보았다.
“중원전장에서 발급한 확인표네. 자네가 지정한 곳에 금전을 보냈네. 일전에 준 선금과 합하면 약속한 금액과 꼭 맞을 걸세.”
“……확실하군요.”
고개를 끄덕인 흑모귀는 종이를 잘 접어 품 안에 갈무리했다.
“직접 받아도 될 것을.”
“세상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 같은 조무래기는 만사를 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해 못 하는 건 아닐세. 자네 말대로 매사는 신중해야 하는 법이지.”
사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거래는 끝난 걸세.”
“예, 감사합니다.”
“이제는 뭘 할 생각인가?”
“약속대로 손을 씻고, 강호에는 발을 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돈을 챙겨 먼 나라로 떠나거나 적당한 벽지에 박혀 여생을 보낼 생각입니다.”
“신용이 있군.”
“제가 뭔가 떠들어 댄다고 사람들이 믿지도 않겠지만, 일은 확실한 게 좋으니까요.”
“내가 그래서 자네를 찾은 거지.”
흑모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저딴 놈들 속여 먹는 건 일도 아닌데, 제가 너무 과한 금액을 받은 것 같습니다.”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네.”
“혹시나…… 왜 이런 일을 벌이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문사풍의 사내가 검지를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입은 화를 부르지. 세상에는 모르는 게 나은 일도 있네.”
“……잊겠습니다. 아니, 잊었습니다.”
“그래. 그럼 고생 많았네. 잘 가게나.”
“예. 안녕히…….”
그 순간이었다.
쇄애애액!
사내가 나왔던 숲에서 수십 개의 비도가 엄청난 속도로 쏟아지더니, 물가에 서 있는 이들의 목에 정확하게 틀어박혔다.
“끄륵!”
“끅!”
두 눈을 부릅뜨고 목을 부여잡은 이들이 덜덜 떨다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
흑모귀는 망연한 얼굴로 제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가슴에도 역시 짧은 비도가 거의 손잡이까지 박혀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는 앞에 선 사내를 보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왜…….”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문사풍의 사내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매사는 확실한 게 좋지. 그런데 굳이 내가 자네의 입을 남겨 둘 이유가 없지 않은가?”
“……도, 돈은 이미…….”
“그것과는 별개일세. 아, 물론 의심할 건 없네. 돈은 보냈으니까. 그리고 그걸 찾으러 올 자네의 가족들도 걱정할 필요 없네. 손을 대지 않겠다고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자네의 가족들은 편안한 여생을 보낼 걸세.”
“…….”
흑모귀가 그 자리에 구겨지듯 허물어져 내렸다. 무릎을 꿇고 앉은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구, 굳이 나를…….”
“이건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 그렇다네.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지. 그래, 그 누구도 말일세. 그러니 자네가 걱정한 만큼 과한 비용은 아니라네. 자네의 목숨 값까지 생각하면 말이야.”
“…….”
“이제 쉬게나.”
털썩.
흑모귀가 절명하여 쓰러지자 사내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는 잘라 따로 묻고, 몸은 강에 던져라.”
“예, 군사!”
사내.
만인방의 군사 호가명이 저 먼 섬을 향해 살짝 복잡한 시선을 던졌다.
“수확. 수확이라…….”
이내 그의 얇은 입술에 뒤틀린 미소가 번졌다.
“씨를 뿌렸으면 수확을 해야겠지. 화산 놈들 덕분에 일이 한결 쉬워지겠군.”
호가명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들키기 전에 돌아간다. 서둘러라.”
“예!”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깨끗이 치워진 강변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강물만이 도도히 흐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