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5화. 뒤처지면 다 뒈진다고 해! (5)
“이 건방진 년이…….”
제 반도 살지 않았을 것 같은 어린 검수가 저런 말을 눈앞에서 해 대는데 화가 나지 않을 이가 누가 있겠는가?
가남평의 두 눈이 살기로 번들대기 시작했다.
“전신이 난자당하고도 같은 말을 지껄일 수 있는지 보자.”
두 사람 사이에 차가운 긴장감이 흘렀다.
“저, 저거…….”
어느새 청명의 옆에 바짝 붙은 조승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 대협. 아니, 도장! 말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응?”
‘너는 왜 여기 있니?’ 하고 묻는 듯한 눈으로 조승을 일별한 청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자는 가, 가남평입니다. 탁류청사 가남평! 장강 일대에서 꽤 유명한 고수입니다!”
“……응?”
“귀신같이 도를 잘 쓰고, 수공도 일절로 유명합니다. 여러 수채에서 어떻게든 영입하려고 애썼는데, 남 밑에 들어가기 싫다며 제안을 다 거절했다 들었건만……. 설마 직접 수채를 만들었을 줄이야…….”
마른침을 삼키는 조승의 얼굴에 긴장과 초조함이 가득했다.
“저 가남평은 장강을 떠도는 어중이떠중이 낭인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예전에 구파의 고수 하나와 시비가 붙었을 때 그를 주살하고 구파의 추적을 피해 낸 적이 있는 이입니다. 그만큼 강하고 위험합니다.”
“아, 그래?”
“예! 신생 수채가 어떻게 이리 사람을 많이 모았나 했더니……. 아무래도 가남평이 따로 키우던 이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흐으으음.”
청명이 묘한 눈으로 가남평을 바라본다.
“뭐 그렇게 대단한 위인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저도 그게 의문이기는 합니다. 제가 알기로 가남평은 무위는 뛰어나지만 수완이 좋은 이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이런 준비를…….”
“쟤 돈은 많아?”
“예?”
“돈 많냐고.”
“……낭인이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그렇단 말이지?”
청명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가늘어졌다.
‘돈도 없는 낭인 놈이 그 많은 백뢰포를 구하고, 거기에 이만한 인원까지 먹여 살리고 있었다고?’
수채가 알아서 돌아가기 시작하면야 수적 놈들이 벌어 온 돈으로 제 밥벌이야 할 수 있겠지만, 처음에는 생짜로 돈을 가져다 박아야 한다.
그런데 신생 수채 주제에 이만한 인원을 굴린다?
“제법 대단한 돈줄이 있지 않고서는 말이 안 되는데?”
청명이 제 뺨을 톡톡 두드렸다.
“뭐 그거야 뒤져 보면 나올 테고……. 그보다, 여기 지형이 꽤 희한하네. 그래 봐야 모래톱 정도를 뭔 섬이라고까지 하나 싶었는데, 이건 정말 섬이잖아.”
“도, 도장! 지금 그런 걸 보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저분이 죽는다니까요?”
“누가? 사고가? 아니면 저 가남평인지 남생인지 하는 놈이?”
“……예?”
청명이 피식 웃었다.
“너도 별걱정을 다 하네. 사고는 제 실력만 발휘하면 저따위 놈에게 질 사람이 아니야.”
“도, 도사님이 가남평을 잘 몰라서 그러시는 것 같은데…….”
“넌 우리 사고를 잘 알아?”
“……예?”
“피차 모르는 건 마찬가지잖아?”
조승의 얼굴에 의구심이 스쳤다. 이건 뭔 개소리냐 묻는 듯한 표정을 보면서도 청명은 어깨나 으쓱했다.
“도, 도장님, 정말 괜찮습니까?”
“괜찮냐니……. 어?”
그때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만.”
“예?”
“너 아까 내 욕 하면서 날아간 그놈이지?”
“……예?”
“하하.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네. 이리 와.”
“…….”
때로는…… 기껏 마음 쓴 선의가 안 좋은 결과로 돌아오기도 하는 법이다.
“후웁!”
가남평이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도를 내질렀다.
기본적으로 도는 베기보다는 휘둘러 가격하는 무기에 가깝다. 하지만 검의 형태에 가까운 가남평의 횡도는 오히려 찌르기에 특화되어 있었다.
수공을 익힌 이는 물속에서 싸울 일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무겁고 두꺼운 도는 물속에서는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난전을 치를 일이 많은 낭인에게는 무거운 도가 적합하고, 물속에서 싸울 일이 많은 수적에게는 날카롭게 찌를 수 있는 무기가 적합하다.
그의 횡도는 그 두 가지 면을 모두 고려한 무기였다.
휘이이이!
움직일 때마다 도 끝에 뚫린 구멍을 통해 소름 돋는 귀곡성이 뿜어져 나왔다.
가공할 속도로 도를 찔러넣은 가남평은 연이어 도를 다시 내질렀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십여 번의 칼질. 낭인의 그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도 위력이 대단했다.
중원의 절반에 걸쳐서 흐르는 그 거대한 장강 전역에 이름을 떨친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이 보장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가남평의 도는 그의 명성에 과장이 섞이지 않았음을 여실히 증명해 내고 있었다.
하나.
휘이이이이!
내뻗은 횡도는 유이설의 바로 한 치 앞에서 더 뻗어 나가지 못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치 그가 일부러 그녀의 목 바로 앞에서 도를 멈추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남평의 표정이 일그러진 데에 반해 오히려 유이설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상황이 보이는 것과 다르다는 뜻이었다.
‘이놈!’
가남평의 눈에 조금 더 신중이 깃들었다.
딱 반 보다.
그가 횡도를 내뻗을 때마다 유이설은 그의 도가 닿을 거리보다 딴 반걸음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가 만들어 내는 궤적을 완전히 파악한 채, 일체의 낭비 없이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그의 도를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펼치고 있는 보법에 대한 완벽한 확신과 담대함이 없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자신을 상대로 그런 여유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가남평의 심기를 더욱 거세게 뒤틀어 놓았다.
하지만 그는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숨을 가다듬었다. 전장에서 이성을 잃는 것은 적의 칼에 목을 들이미는 것보다 더 위험한 짓이다.
‘그래 봐야 아직 경험이 일천한 어린놈이야.’
이 일 수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은 파악했다. 열 번 싸운다면 그가 이기는 건 기껏해야 두어 번일 것이다.
하지만 그 두어 번을 십 할의 확률로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경험이고 노련함이 아니던가?
휘이이이!
가남평의 도가 다시 한번 유이설의 목을 파고들었다.
유이설이 가벼운 발놀림으로 그의 도가 닿는 곳 반 보 뒤로 물러난다.
휘이이이! 휘이이이이!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하는 찌르기가 연이어 쏟아졌다.
귀를 찢는 귀곡성과 눈에 보이지도 않는 빠른 찌르기의 연격. 거칠고 화려하지만 실속은 없어 보이는 공격이었다.
‘흐음?’
그때 그 광경을 바라보던 청명이 묘한 미소를 흘렸다.
“잔재주를 부리는군.”
그 말을 듣기라도 한 양 가남평이 두 눈을 빛내며 다시 한번 도를 뻗었다. 이번에도 당연하다는 듯 유이설이 몸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그 순간, 분명 중간에서 멈췄어야 할 가남평의 도가 길쭉하게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더니 순식간에 유이설의 목을 꿰뚫을 듯 쇄도했다. 두 눈을 크게 뜬 유이설이 지체 없이 뒤로 몸을 날렸다.
“타아아앗!”
하나 가남평도 그녀가 순순히 물러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발출된 날카로운 도기가 가공할 속도로 그녀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유이설이 섬전처럼 검을 휘둘러 제 앞을 가로막았다.
카가가가각!
검과 맞부딪힌 도기가 쇠를 긁어 대는 소리를 자아내며 옆으로 비껴 나갔다.
우둑.
부상은 피했으나 도기에 실린 내력은 유이설의 손목에 둔중한 통증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파아아앗!
가남평은 여유를 주지 않고 앞으로 곧장 달려들었다. 그러더니 이내 발밑에 깔린 모래를 한차례 걷어찼다. 모래가 유이설을 뒤덮을 기세로 날렸다.
“큭.”
무표정한 유이설의 얼굴에 아주 찰나의 당혹한 기색이 스쳤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본 백천 역시 당황했다.
‘뭐지? 도대체 사매가 왜……?’
물론 저 가남평이라는 자도 만만한 이는 아니나, 지금 유이설은 그에게 실력으로 눌린 게 아니라 무언가 때문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냉정하던 유이설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린 것만 봐도 그렇다.
“거리감이야.”
“응?”
백천은 들려오는 청명의 목소리에 시선도 돌리지 않고 되물었다.
“저 도 끝에 뚫린 구멍에서 나는 소리. 저거 음공(音功)이다. 저 소리를 계속 듣고 있다 보면 내부가 뒤흔들려.”
“…….”
“그리고 저놈, 아까부터 도를 뻗는 거리를 조절하고 있어. 눈과 귀를 동시에 어지럽히고 있지. 생각보다 굉장히 똑똑한 놈인데?”
모래를 차올린 것도 그렇다.
가남평도 유이설 정도 되는 이에게 저런 잔재주가 통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 모든 것들이 누적된다고 생각해 보면 어떤가. 지속적으로 귀를 뒤흔들고, 시야를 계속 혼란스럽게 만들다 보면 결국에 한 번은 실수가 나온다.
“더럽게…….”
“싸움에 더러운 건 없어. 깨끗하게 뒈지는 것보다는 구차하게 사는 게 백배는 나아.”
“…….”
백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사적으로 비난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실전을 수없이 겪어 본 입장에서 이 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어때? 도와주러 가지 않아도 돼?”
“헛소리하지 마.”
청명이 넌지시 묻자 백천은 단호하게 딱 잘랐다.
“그 정도로 질 사매가 아니다.”
“흐음.”
청명은 조용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떠냐!”
가남평이 범처럼 표효했다. 이건 흥분의 증거가 아니었다. 우렁우렁한 목소리 역시 유이설을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방편일 뿐.
보다 뛰어난 이를 상대로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다. 내가 더 강해지거나, 상대를 자신과 같은 위치까지 끌어내리는 것.
도에 방울을 달아 음공을 함께 펼치며 상대를 혼란에 빠트리는 것은 사파에서는 꽤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무학 중 하나다.
그의 귀곡도(鬼哭刀)는 그런 무학의 발전형이라 할 수 있다. 움직일 때마다 자연적으로 도에서 내력을 실은 음파가 뿜어져 나와 상대의 내공을 진탕시킨다.
사파의 무학을 견식 한 경험이 많다면 대처법을 찾아내겠지만, 눈앞의 어린 검수에게 그런 경험이 있을 리 없다.
게다가 깔끔하게 최선의 공격만을 주고받는 것이 당연했던 이라면, 공격 하나하나 힘이 달리 실리고 다르게 뻗어 나가는 그의 도에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증거로…….
파앗!
유이설의 어깨 바로 아래 팔 부분을 그의 도가 스치고 지나갔다. 갈라진 의복이 이내 붉은 피로 서서히 물들었다.
파앗!
옆구리에도 또 하나의 상처가 생겨났다.
조금 전까지는 닿지도 않던 도가 이제는 유이설의 몸에 확실하게 닿고 있었다.
‘조금 더.’
본디 사냥을 할 때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럴 때 기분을 내다가는 어설픈 반격에 당해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시간은 그의 편이니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잡아 내면 된다.
‘일단 너부터 죽인다!’
가남평의 두 눈에 냉정한 살기가 어렸다.
“하아압!”
내지른 고함에 내력을 실으며 가남평이 다시 검을 내찌른 그 순간이었다.
카앙!
그의 도가 채 다 뻗어지기도 전에 유이설의 검에 부딪히며 뒤틀렸다.
“큭!”
하지만 가남평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도를 회수해 다시 내질렀다.
카앙!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
채 뻗어지기도 전에 유이설의 검이 도가 그려야 할 궤적을 선점해 밀쳐 냈다.
카앙! 카앙! 카앙! 카앙!
몇 번이고 도를 뻗어도 매번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도가 절반도 뻗어지기 전에 유이설은 마치 알고 있다는 듯 검을 뻗어 튕겨 냈다.
기겁하며 물러선 가남평은 경악 어린 눈으로 유이설을 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다시 무감해진 얼굴로 말했다.
“대충 알았어.”
“…….”
“소리, 거리, 감각. 다 도가 끝까지 뻗어져야 의미가 있지.”
“뭐, 뭔…….”
그래서 도가 뻗어지기 전에 쳐 낸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저자의 검이 가남평의 도보다 최소 두 배 이상은 빨라야 한다.
후발제인(後發制人).
공격이 시작되고 난 후 뒤늦게 뻗어진 검이 그의 도보다 더 먼 거리를 날아온다는 의미니까.
“그,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으아아아아!”
가남평이 괴성을 내지르며 다시 한번 도를 찔러 댔다. 이 괴성은 음공이 아니었다. 절박한 마음에 내지른, 말 그대로 괴성이었다.
카캉! 캉! 카앙!
하지만 그의 도는 여전히 끝까지 제 길을 따라 움직이지 못했다. 도를 찌를 때마다 귀신같이 날아든 검이 연이어 튕겨 냈다.
있는 내력 없는 내력을 모두 짜내어 도를 더 빠르게 찔러 댔지만, 여전히 저 검은 그의 도가 향할 곳에 미리 와 있다.
“으아아아아아아!”
이제 도를 찔러 넣는 가남평의 움직임은 발작과도 비슷해 보였다.
막는다면 이쪽에선 힘으로 밀어 버리면 될 일!
내력으로 뒤질 일은 없다. 저 어린놈의…….
그 순간.
빙글.
유이설의 몸이 회전하더니 가남평의 도를 옆으로 부드럽게 흘려 냈다.
그러더니 마치 나비처럼 가볍게 유영하며 검을 뻗어 왔다.
세상이 느리게 흐른다.
제 운명을 직감한 가남평은 그 순간 한 가지를 깨달았다.
‘없……어?’
흑모귀가 보이지 않는다.
분명 그보다 먼저 싸우겠다고 전장에 합류했던 흑모귀의 모습이 전장 어디에도 없었다.
‘어, 어디?’
없다.
흑모귀쯤 되는 실력자라면 어디에서든 눈에 띄었을 터. 하지만 그는 물론이고 수채를 만들 때 그와 함께 합류했던 그의 수하들도 보이지 않았다.
“이 개자…….”
서걱.
말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유이설의 검이 가남평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둥실.
별다른 소음도 없이 가남평의 목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빙글빙글 도는 세상 속에서 가남평은 똑똑히 보았다.
섬의 건너편.
흑모귀 무리가 장강의 물길에 몸을 맡긴 채 섬에서 멀어지고 있는 광경을 말이다.
‘날 속였…….’
세상에 빠르게 암전되었다.
분노도 증오도 살아 있는 자의 것.
가남평에게는 더는 분노할 자격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