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4화. 뒤처지면 다 뒈진다고 해! (4)
“채주!”
“으…….”
장강 중앙의 섬을 장악한 신생 수채 ‘청사채(靑蛇砦)’의 채주 탁류청사(濁流靑砦) 가남평(賈南坪)이 뭍으로 밀려오는 배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내보냈던 배들이 쫓겨 와 모래톱에 처박히고 있었다. 적당히 속도를 줄여 배를 멈출 만한 여유조차 없다는 뜻이다.
그 뒤를 적선들이 엄청난 속도로 뒤따르고 있다.
패전.
적어도 수전은 완전히 패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우뚱기우뚱 넘어가는 배에서 그의 수하들이 허겁지겁 뛰어내려 뭍으로 기어 올라왔다.
“빌어먹을.”
누가 봐도 패잔병 꼴이다.
상대가 수채라든가 수상전을 제대로 익힌 이들이었다면 이 패배를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수하들 역시 제대로 훈련을 받은 건 아니니까.
하지만 저들은 누가 봐도 산적이 아닌가?
어설프게나마 수적이라는 이름을 쓰는 이들이 물에는 발도 담가 본 적 없는 산적들에게 쫓겨 오는 꼴이라니…….
이 천혜의 요새를 거점으로 삼으며 여러 상황을 고려했었지만, 설마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 어찌합니까?”
“어쩌긴 뭘 어째?”
가남평이 턱짓으로 배 쪽을 가리킨다.
“그래 봐야 산적 놈들이다. 모조리 잡아 죽여 버려라!”
“하, 하지만…….”
수하가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가남평의 눈매가 살짝 가느스름해졌다.
“아니면? 도망이라도 쳐 볼 테냐? 이 섬에서?”
“…….”
“물에 빠져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마찬가지다. 정말로 살고 싶거든 한 놈이라도 더 쓰러뜨리라고 해!”
“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수하가 전력으로 강변 쪽을 향해 달려갔다. 가남평은 짧게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았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들려오는 목소리에 가남평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검은 피풍의로 전신을 감싼, 차가운 인상의 사내가 보였다.
“그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으자고 한 게 누구였지?”
“설마 녹림이 개입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빌어먹을!”
가남평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는 일전에 은하표행의 특표를 습격했던 이였다. 얼굴에 십자로 그여 있는 깊은 흉터가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이젠 어쩔 거냐?”
“싸워야지.”
그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니면 다 버리고 도망이라도 치든가.”
“…….”
가남평은 이를 갈았다.
“흑모귀(黑毛鬼). 네놈이 충동질을 해 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충동질이라면 뭘 말하는 거지? 수채를 만들자고 한 것? 아니면 특표를 공격하자고 한 것?”
흑모귀라 불린 이가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어느 쪽이건 결국 너도 동의한 일이다. 그런데 이제 와 내게만 책임을 묻겠다면 조금 억울하지.”
“건방진 놈…….”
가남평이 독사 같은 눈으로 흑모귀를 노려보았다.
누군가 본다면 분명 괴이하다 할 일이었다.
수채란 기본적으로 수직적인 구조이다. 거친 이들이 모인 만큼 상하관계의 엄격함은 명문 정파들보다 오히려 더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 흑모귀가 가남평을 대하는 태도는 수채의 수적이 채주를 대하는 태도와는 분명 거리가 있었다.
“잘되었다면 모든 재물과 영광은 네 것이 되었겠지. 그렇지 않은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권리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지. 얻고자 한 것이 컸다면 감당해야 할 것도 큰 법.”
“하!”
가남평의 눈빛이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눈빛만 보면 금방이라도 도를 뽑아 흑모귀를 공격할 것만 같았다.
“그리 흥분할 것 없어. 이건 기회기도 하니까.”
“기회?”
“어쨌거나 저놈들은 산에서만 싸우던 놈들이다. 상륙전에는 그리 익숙하지 않을 거야. 저놈들만 모조리 수장시켜 버리면 수채의 명성은 더 올라가게 되고 얻을 수 있는 건 더욱 많아진다.”
“…….”
“이 위기만 넘기면 된단 말이지.”
“잘도 지껄이는군.”
빈정거리는 대답이 돌아오자 흑모귀의 눈도 순간 가늘어졌다.
“너무 삐딱하게 굴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백뢰포를 구해 오고 배를 모아 와 수채를 만들게 해 준 사람이 누구지? 그렇게 만든 수채의 채주 자리를 미련 없이 넘겨준 이는 또 누구인가?”
“…….”
“잊지 말라고. 나는 자네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라는 걸.”
카각!
흑모귀의 소매 안에서 날카로운 삼지조가 튀어나왔다. 삼지조를 움켜잡은 흑모귀는 가남평을 빤히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시간을 끌면 시기를 놓친다. 상륙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걸 알려 줘야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물가로 향하는 흑모귀를, 가남평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뚫어져라 보았다. 입술 새로 이 갈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잘난 척해 대기는.’
그의 명성이 없었으면 수채를 만들 능력도 없었던 놈이!
“흥!”
가남평은 허리춤에 찬 도를 뽑아내었다.
도라기보다는 거의 검의 가까운 형태. 굴곡 없이 쭉 뻗은 쇠의 한쪽에만 날이 서 있는 횡도(橫刀)였다.
“모조리 죽여 주겠다!”
가남평이 두 눈에 불을 켜고 물가로 달려 나갔다.
“하선해라!”
“몰아쳐라!”
“다 죽여 버려!”
청명이 타고 있는 배야 속도를 줄이지 못해 앞의 배를 그대로 들이받았지만, 그 꼴을 보고도 같은 짓을 반복하는 멍청이는 많지 않았다.
물론 많지 않았다는 건 아주 없지 않았단 의미이긴 하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배는 속도를 줄여 물가에 무사히 멈춰 섰다.
첨벙! 첨벙!
배 위에서 뛰어내린 녹림도들이 단숨에 섬으로 박차고 들어갔다.
“저기 얘들아? 진영은 좀 갖추고…….”
“오오오오오!”
“싸워라!”
“다 물귀신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임소병은 할 말을 잃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팔자야.’
병법이라는 것은 우선은 군사를 지시대로 따르도록 훈련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 있는 산적 놈들은 그런 명령을 따르는 걸 세상에서 제일 못하는 놈들에 가까웠다.
그동안 녹림왕들이 하나같이 육체파에 단순무식하게 힘으로 때려 부숴 댄 것에도 나름 이유가 있다는 의미다.
애초에 지시를 받아 정확하게 따를 정도의 인내력이 있는 이들이 뭐 한다고 인적 없는 산에 틀어박혀 산적질을 해 대겠는가.
그리고 이건 녹림의 정예들만 모아 둔 녹채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녹림 자체의 한계였다.
그리고…….
“가자아아아아아아아!”
“오오오오오!”
선두에 선 청명이 칼로 허공을 저어 대며 녹림도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
복창하며 뒤따르는 녹림도들의 모양새가 임소병이 선두에 설 때보다 몇 배는 더 기운차 보이는 건 착각일까?
“으라차아아아아!”
청명이 선두에서 달아나는 수적들을 덮쳐들자, 화산의 제자들이 그 뒤를 잇고, 녹림도들이 굶주린 호랑이처럼 연약한(?) 수적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파죽지세(破竹之勢).
그 말이 아니고서야 딱히 표현할 방법도 없었다.
섬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적들은 배가 부리나케 도망쳐 와 모래톱에 처박히는 광경에 일 차로 겁을 먹었고, 그 배에서 쏟아져 나온 수적들이 혼비백산해 도망치는 광경에 이차로 겁을 집어먹었다.
그런 와중에 뒤쫓는 이들이 산이라도 허물 기세로 달려드니 정신을 차릴 수 있겠는가?
제대로 싸워도 과연 선전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전력에 차이가 있건만 기세부터 밀리고 들어가니 싸움이 될 리가 없었다.
“크하하하하하핫! 이 조무래기 같은 놈들! 감히 화산을 건드려?”
“그 대가를 확실하게 치르게 해 주마!”
좌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조걸이 당황하여 윤종을 돌아보았다.
“……저 양반들은 녹림 아닙니까?”
“알 게 뭐야! 빌어먹을! 죽어라! 이 수적 놈들아!”
같이 눈을 까뒤집고 달려 나가는 윤종을 보며 조걸이 입을 쩍 벌렸다.
“어…… 그건 내 역할인데? 사, 사형! 같이 갑시다!”
이를 악문 윤종이 검을 놀렸다.
파아아앗!
그의 검이 평소와는 다르게 좀 더 거칠게 적들의 사이를 누볐다. 순식간에 수적들 여럿을 쓰러뜨린 그가 다음 먹잇감을 찾아 달리려는 순간.
“이 애송이 놈이!”
뒤쪽에서 커다란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전까지의 수적들과는 구별되는 차림새의 사내 하나가 윤종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왔다.
“목줄을 잡아 뜯어 주겠다!”
그러자 윤종의 눈이 새파란 살기를 내뿜었다.
탕!
땅을 박찬 윤종이 달려드는 수적을 향해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엇?”
설마 이리 정면에서 맞받아 올 줄은 예상 못 했는지 달려들던 수적의 얼굴에 일순 당황이 어렸다.
그 찰나간 윤종의 검이 빛살처럼 수적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큭!”
카가강!
수적의 도가 날아드는 윤종의 검을 가까스로 쳐냈다. 하지만 튕겨 나간 윤종의 검은 처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여 수적의 도를 다시 한번 강타했다.
카앙!
그 강렬한 타격에 수적의 도가 뒤쪽으로 훅 밀려났다.
이어 휘둘러진 윤종의 검이 수적의 가슴을 종횡으로 베어 냈다.
“끄윽…….”
쿵!
신음하는 수적의 배를 걷어차 날려 버린 윤종이 우렁차게 외쳤다.
“무찔러라!”
“우와…….”
“너도 정신 차리고 제대로 싸워!”
“예, 예! 사형!”
조걸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검을 휘두른다.
아마도 이놈들이 양민들을 잡아갔다는 사실 때문에 윤종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이럴 때 잘못 걸렸다가는 한 달 내내 잔소리를 듣게 된다.
그때였다.
“사숙, 선두로! 사고는 왼쪽 맡아 줘!”
“알았다!”
“응.”
“소소야! 사숙 뒤에 붙어라!”
“알았어요!”
청명이 이리저리 손짓을 하고는 녹림도들을 보며 고함쳤다.
“밀어붙여라아아아!”
“오오오오오오!”
녹림도들이 용기백배해 돌진했다.
“흠.”
전장의 상황을 적당히 살펴본 청명이 슬쩍 검을 내린다.
이미 전투는 끝났다.
대규모의 전투라는 건 한번 기세를 잡은 쪽이 웬만해서는 승리하기 마련이다. 특히나 이런 지형을 타지 않는 곳에서는 전력 그대로의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 공연히 그가 나서서 사형제들의 먹잇감을 뺏어 먹을 필요가 없다.
‘부지런히 경험을 시켜야지.’
화산에서 그가 한 말이 다 빈말은 아니었다. 그동안은 끌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많은 것을 겪고 더 많은 걸 경험하게 해야 한다.
‘그건 그렇고…….’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청명이 묘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 이상으로 간단한데?’
수채의 규모는 꽤 커 보이지만 조금 전 수전을 벌일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조금도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백뢰포는 분명 위협적이었지만 맞닥뜨린 이놈들은 거의 허수아비 수준이다.
이런 놈들이 수채를 만들고 화산을 건드렸다고?
“……신생이라 그런가?”
거꾸로 생각하면 힘이 있는 수채라면 이미 수로채에 들었을 것이다. 이제 막 생겨난 수채가 힘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멋모르는 놈들이라 생각 없이 양민을 건드리고 화산을 들쑤셨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묘하게 찝찝한데?’
그 찝찝함의 근원을 찾기 위해 잠깐 고민에 빠진 그 순간이었다.
“아아아아악!”
앞쪽에서 돌연 터져 나온 커다란 비명에 청명의 고개가 획 들렸다. 지금까지 듣던 비명과는 뭔가 달랐다.
“뭐야?”
비명이 터져 나온 곳에, 남들보다 키가 반 자는 더 큰 사내가 기다란 횡도를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를 상대하려던 산적들은 전신이 난자당한 채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그 사내가 사나운 기세로 외쳤다.
“뭣들 하느냐! 등을 돌려라! 이곳에는 달아날 곳이 없다! 죽고 싶지 않으면 끝까지 맞서 싸워라!”
“호오?”
한눈에 봐도 이놈은 실력이 조금 남달라 보인다.
“채주인가?”
하기야, 어중이떠중이라고 해도 이만한 인원을 끌어모으려면 대가리는 힘이 있을 것이다.
자, 그럼 누굴 보내 볼…….
탓.
하지만 청명이 고민을 시작도 하기 전에 누군가가 허공을 사뿐하게 날아 가남평 앞에 내려섰다.
“……뭐냐?”
“화산의 유이설.”
그녀는 검 끝으로 가남평의 목을 겨누며 나직이 말했다.
“그 목, 받아 가지.”
가남평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