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0화. 아니, 사람 말을 좀 들어! (5)
“뭐라고 한 거야?”
“여기가 아니라는데?”
“허허. 아니래.”
“이 산이 아닌가벼.”
“우와, 여기가 아니네.”
백천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망할 새끼들이 하나같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 죽었으면 말 그대로 개죽음 아냐?”
“물귀신 됐겠지. 원귀, 원귀. 나중에 장문인이 오셔서 제사 지내 주셨겠지.”
“이야. 대단한 계획이었네. 아주 믿음직해.”
“흐지믈르그…….”
“뭐라고요? 잘 안 들리는데요?”
“걸아……. 그러다 맞겠다.”
백천이 이를 악물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이미 청명의 관심은 그에게서 멀어진 뒤였다.
“뭐? 여기가 아니야? 그럼 우리 애들 패고, 양민들 끌고 간 새끼는 누군데?”
“그, 그건 저도 잘…….”
“잘?”
“자, 잘 모릅니다!”
“몰라? 모르면 끝나?”
청명이 조승의 멱살을 움켜잡고 아예 탈탈 털어 대기 시작했다.
“근데 이 새끼가 빠져 가지고! 그런 것도 모르는 새끼가 수적질을 해 처먹어? 오냐! 네가 그렇게 헤엄을 잘 친다며? 어디 온몸 꽁꽁 묶고 바윗덩어리 단 채로 처넣어도 잘 빠져나오는지 한번 보자!”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신다고 했잖습니까!”
“내가?”
“예! 분명히…….”
“내가?”
“…….”
조승이 망연한 눈으로 백천과 나머지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먼 곳만 제각기 바라보며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미안합니다.’
‘뭐 도리가 있어야지.’
‘아미타불. 극락왕생하소서.’
와…….
더러운 세상.
“그, 러, 니, 까! 내가 한 말을 들었다 이거지? 네 귀로 똑똑히?”
“……아니요. 제가 착각했던 모양입니다.”
눈치 하나로 그 잔포흑어를 버텨 온 조승은 이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는 귀신같이 알아챘다.
“뭐 아무튼…… 모른다고?”
“그, 그렇습니다.”
청명이 뚱한 얼굴로 돌아보자 백천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아니, 배에 올라서 특표를 찾았다니까! 우리가 화산파라고 했는데도 날붙이를 들이미니까 누가 의심하겠냐?”
“……그렇다는데?”
“그, 그…… 온 구강에 특표가 배를 탄다고 소문이 났는데, 수적 된 도리로 어떻게 한번 찔러 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 왜 화산파라는 말을 듣고도 계속 칼질한 건데?”
“그건…….”
조승이 어색한 얼굴로 겸연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먼 섬서에 있는 화산이 설마 이 장강까지 진짜로 올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하하하…….”
“하하하하!”
“하……. 하하하하!”
“웃어?”
콰득!
목이 부러질 듯 꺾인 조승의 입에서 짐승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니, 요즘 새끼들은 왜 이리 하나같이 눈치가 없지? 이제 하다하다 수적 새끼가 내 앞에서 실실 쪼개고 자빠졌네!”
퍽! 퍽! 퍽!
조승의 고개가 좌우로 획획 돌아간다.
“죽어! 죽어, 이 새끼야! 죽어! 아는 것도 없고! 눈치도 없고! 그럼 뒈져야지! 죽어!”
괴이한 광경이었다.
지금 청명의 손에 타작당하고 있는 이는 도적놈이다. 관아에 잡혔다면 참수 외에는 다른 벌이 없고, 다른 협객의 손에 걸렸다면 그때 역시 일격에 목이 달아나야 옳다.
하지만 청명은 그 죽어 마땅한 수적을 불쌍하게 만드는 신기를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아아악! 생각났습니다! 생각! 생각났습니다!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다!”
“오?”
청명이 주먹을 멈추더니 반색했다.
“생각났어?”
“예! 예! 지,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다!”
그 모습에 모두가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마른 오징어도 짜면 물이 나온다더니.’
‘없는 답을 만들어 내는구나…….’
‘아미타불. 눈 뜨고 못 볼 꼴이로다.’
이제는 얼굴이 만두처럼 부어 원래 이목구비를 찾아볼 수 없게 된 조승이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 근래에 웬 수적 놈들이 동정호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게 뭔 소리야? 너희가 수로채 아냐? 그런데 웬 수적 놈이라니?”
“저, 저희 대경채가 장강수로채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강의 모든 수채를 관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려면 수채를 새로 만들려는 이들마다 흑룡왕을 찾아가 허가를 받아야 할 텐데 그게 말이 되겠습니까?”
“그래?”
청명이 진위를 확인하겠다는 듯 임소병을 돌아본다. 그러자 임소병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사실입니다. 산채가 먼저 생기고 그 산채의 규모가 커지면 녹림을 찾아오는 거지요. 그럼 칠십이채에 끼워 주고 다른 산채를 제외할지, 아니면 그냥 녹림의 이름만 쓰게 할지 결정합니다.”
“엄청 번거롭네.”
“한 번씩 보면 청명 도장은 세상사를 다 아는 것 같아 보이면서 정작 기본적인 건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런 건 상식인데.”
“내가 산적 놈들이나 수적 놈들 상식을 알아서 뭐 하게? 그냥 잡아 죽이면 되는데.”
“…….”
말문이 막힌 임소병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자 백천이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듯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누가 봐도 저 새끼가 나쁜 놈이죠.”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그 짧은 시간 만에 피해자를 숱하게 만들어 낸 청명이 다시 조승을 끌어당겼다.
“그래서?”
“수, 수로채에 속해 있는 수채들은 그런 과격한 방식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어장이 박살이 나면 어부가 죽는 법 아닙니까! 마, 만약 양민들을 잡아간 게 사실이라면 아마 그놈들일 겁니다. 초짜들은 멋모르고 과격한 법이니까요.”
“흐으으음.”
청명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처에 다른 수채는 없어?”
“구, 구강 근처는 대경채가 꽉 잡고 있어서…….”
“너희 별로 세지도 않던데?”
“…….”
조승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네가 괴물인거지, 이 개새끼야!’
절대 입 밖으로는 낼 수 없는 마음의 소리가 절절히 울렸다.
“쯧.”
청명은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눈앞의 오검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리고 오검은 하나같이 애꿎은 발밑만 툭툭 차 댈 뿐이다.
“거…….”
“…….”
“그…….”
“…….”
“에이, 됐다. 말을 말자.”
“욕을 해! 이 새끼야!”
“화를 내라고!”
“아, 잘못했다고!”
결국 참다못한 모두가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청명은 이번에도 혀만 차고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본디 가장 서글픈 것이 무관심 아니던가. 화산의 제자들은 불현듯 지독하게 서러워졌다.
하지만 청명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죽을 판이었던 것도 사실이니, 뭐라 변명할 말도 없었다.
“뭐, 됐어. 이 정도면 나름 잘했지.”
“……진짜?”
“설마 배를 통째로 끌고 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어쩔 수 없지.”
저 새끼가 왜 저러지?
평소 같으면 제 화를 못 이겨 뒤집어져 데굴데굴 구르고도 남았을 텐데?
“다만.”
청명이 조금 싸늘해진 눈으로 백천과 그 일행을 바라보았다.
“의욕만으로 뭐든 다 할 수 있다면, 강호가 아니겠지.”
“……미안하다.”
“알면 됐어.”
그 말을 끝으로 청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오고 갔다.
기본적으로 오검은 지은 죄가 있으니 할 말이 없고, 청명은 누군가를 물어뜯어 본 적은 있어도 위로해 본 적은 없는 인간이다. 그러니 서로 할 말이 없을 수밖에.
그 어색한 분위기 사이로 임소병이 파고들었다.
“그래서 이제 어쩌실 겁니까, 화산신룡? 그 수채는?”
은근슬쩍 화제를 바꾸려 드는 그의 말에 청명은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
“어쩌긴. 박살을 내야지!”
“우선은 포로로 잡은 수적들 중 몇을 근처에 있는 다른 수채로 보냈습니다. 혹시 양민들을 잡은 곳이 있는지 확인해 오라고요.”
“……걔들이 순순히 말을 들어?”
“그럴 리가요. 독 먹였죠. 다섯 시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내장이 녹아 죽을 거라고 했더니 사색이 되어서 헐레벌떡 가던데요?”
“…….”
‘똘똘한 놈 하나 있으니 일이 편해지네.’라는 말을 준비해 놨던 청명이 슬그머니 입을 닫았다.
저 새끼가 산적이란 사실을 한 번씩 잊는다니까.
“아무튼 보아하니 수로채 수적들의 소행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가 보네. 뭐 어쩔 수 없지. 에이, 괜히 헛고생했네.”
윤종은 그 대화를 내내 들으며 ‘그럼 난데없이 얻어맞은 수로채는 대체 무슨 날벼락이냐?’라는 생각을 했지만,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사실 뭐 수적 놈들이 얻어맞는 데 딱히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
그 말을 하고 있는 놈들이 산적 놈과 산적보다 더한 도사 놈이라는 게 문제지.
“수적 놈들의 정보를 탈탈 털어 보니 그놈들은 섬을 거점으로 삼은 모양입니다.”
“섬? 섬이라니?”
청명이 이해를 못 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임소병이 차근차근 들었던 내용을 다시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임소병의 설명을 모두 들은 청명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장강이 워낙 넓다 보니 중간 중간 바다처럼 섬이 있는 곳도 있는데, 그놈들은 거길 수채 삼아 세력을 키우고 있다고?”
“그런 모양입니다.”
“……세상에 별놈들이 다 있구나.”
“어쩌시겠습니까?”
“뭘 어째?”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섬에 쳐들어가는 건 그리 권장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산적이지 수적이 아닙니다. 발이 땅에 닿는 곳에서라면 겁날 것이 없지만, 배 위에서 싸우는 건 영 부담스럽습니다. 배를 몰 줄 아는 놈도 없잖습니까.”
“별걱정을 다 하네.”
“예?”
“저기 많잖아, 배 모는 애들.”
청명이 턱짓으로 묶여 있는 수적들을 가리켰다.
“설마…….”
임소병의 눈가가 살짝 경련을 일으켰다.
“수적은 수적으로 상대하는 게 기본이지! 이게 이이제이!”
결국 참고 또 참았던 오검들이 수군댔다.
“거 이이제이 엄청 좋아하네.”
“냅둬. 몇 안 되는 아는 문자라 그래.”
그러거나 말거나 청명은 장강 쪽을 돌아보며 씩씩하게 이를 갈았다.
“섬이고 나발이고, 화산을 건드렸으면 지옥까지 쫓아가서 대가리를 깨 줘야지! 쟤들한테 배 몰라고 해! 당장 쳐들어간다!”
“……아니, 제 의사는…….”
임소병이 무어라 말하는데 순간 청명이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거 왜 이러실까. 한배를 탄 입장에서.”
“……진짜 한배를 타게 생겼으니 이러는 거 아닙니까. 저는 뱃멀미가 심하다고요.”
“괜찮아, 괜찮아. 내가 다 알아서 한다니까? 나 못 믿어?”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까?”
“안 되지.”
“……예.”
청명의 눈치를 살피던 임소병이 슬쩍 말했다.
“아니……. 이쯤 왔으면 저도 반대까지는 안 할 생각입니다만, 그럴 거면 차라리 화산파의 지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같이 가시죠. 그럼 일이 더 쉬워지잖습니까.”
“에이. 그건 안 되지.”
“왜요?”
청명은 세상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들은 양 임소병을 보며 힐난을 퍼부었다.
“만에 하나라도 배 가라앉아서 우리 애들 물에 빠지면 어떡해? 뻔한 소리를 하고 있네.”
“……그럼 저희는 사람도 아닙니까?”
“솔직하게 대답해도 돼?”
“……하지 마십쇼.”
“얼른 준비해, 얼른. 나 바쁜 사람이야.”
“…….”
임소병의 선택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놓친 것이 있었다.
세상에는 정해진 길을 빨리 달리는 경주마만 있는 게 아니라, 때로는 길을 이탈해 사람을 걷어차는 경주마도 있다는 사실.
슬프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