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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769화 (766/1,567)

769화. 아니, 사람 말을 좀 들어! (4)

“채, 채주님이…….”

“어어…….”

잔포흑어가 반으로 갈려 죽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수적들은 현실을 믿지 못하고 두 눈을 부릅떴다.

포악하기 짝이 없는 성정 때문에 대경채의 수적들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그 실력만은 확실하기에 채주로 받들어 모셨던 이다.

그런데 그런 잔포흑어가 힘조차 써 보지 못하고 말 그대로 두 쪽이 나 뒈져 버린 것이다.

“……이, 이런…….”

수적들의 사이에 절망이 휘몰아쳤다.

믿었던 채주는 죽어 버렸고, 사방이 모두 더없이 강대한 적들로 가로막혔다.

대패라는 간명한 미래만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어, 어떻게든 달아나야…….’

그리고…… 꾀 많은 여우는 이들의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쏴라!”

멈췄던 화살이 다시 절벽 위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새 화살을 절벽 위로 더 옮겨 오기라도 했는지 그 양이 막대했다.

“쏴! 더 쏴라! 바닥에 빈틈이 안 보일 정도로 먹여 줘라!”

임소병이 신이 난 듯 큭큭 대며 웃었다.

병법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공격을 받지 않는 위치에서 상대를 일방적으로 타격할 수 있는 상황이란 하늘에서 황금이 쏟아지는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임소병은 절대 이 귀한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쏴라! 더 쏴! 잘하고 있다. 곤죽을 만들어 버려!”

임소병의 독려에 궁수들은 팔이 부러져라 시위를 당겼다. 무인용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철궁(鐵弓). 웬만큼 힘이 좋은 이도 시위를 당길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강력한 활이 쉴 새 없이 당겨졌다.

“으아아아아악!”

“피, 피해! 죽는다!”

피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 위에서 폭우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대체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비는 몸을 적시는 정도로 끝나지만, 이 화살의 비는 그들의 몸을 가열하게 꿰뚫었다.

“컥!”

“끄윽!”

화살에 목이 꿰뚫린 이가 눈도 감지 못하고 고꾸라진다. 의식을 잃은 그의 육체를 빽빽하게 쏟아진 화살이 순식간에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렸다.

“히이익!”

작살을 휘둘러 화살을 쳐 내던 수적들의 눈에 공포가 서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결국 모두가 저리 죽을 수밖에 없다.

“으하하하핫! 이 한심한 놈들이 겁……. 아악! 이 새끼들아, 화살 똑바로 안 쏴? 죽을 뻔했……!”

화살을 피한 번충이 절벽 위로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임소병과 눈이 마주치자 움찔하고는 고개를 슬쩍 내리깔았다.

“오오!”

쿠우웅!

그는 앞쪽의 수적을 쳐 날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녹림왕의 명이시다! 단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예!”

산적들이 기세를 더욱 높이며 수적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마아아아아아안!”

천둥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내력 실린 소리에 모두가 손을 멈추고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쯧.”

그들의 시선 끝에는 당연하게도 청명이 있었다.

그는 절벽 위 임소병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아, 그만 쏴! 이러다 다 죽겠다.”

“다 죽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 산적 놈 인성 보소.”

“……아니, 어…… 아니……. 그 말씀은…….”

순간 멍하던 임소병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반대편에서 그 모습을 본 화산의 제자들은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하며 눈을 감아 버렸다.

‘저 말만은 듣고 싶지 않지.’

‘저놈에게만은 말이야.’

‘차라리 욕이 낫지.’

청명이 혀를 차며 한마디 더 보탰다.

“이미 끝난 싸움인데 뭐 하러 소중한 노예……. 아니, 소중한 생명을 죽여 없애!”

임소병이 억울한 마음에 무언가 딴죽을 걸려는데 청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엔 수적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화살에 맞아 곳곳에 부상을 입은 수적들이 절망과 희망이 뒤범벅된 눈으로 청명의 눈치를 보았다.

“무기 버리고 투항하는 놈은 살려 준다.”

“……지, 진짜입니까?”

“이 새끼들이 속고만 살았나? 내가 명색이 도사야, 도사!”

백천은 참담한 마음에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지 필요할 때만 도사지, 저 망할 놈.’

아무리 생각해도 선계에 원시천존이나 태상노군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분들이 정말 실존한다면 저 마귀 놈을 저대로 내버려 둘 리가 없으니까.

“작살 안 버려? 확! 작살로 다 줄줄이 꿰어 버릴까 보다!”

수적들이 떨리는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수적이다.

수적들이 토벌당하고도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없다. 애초에 도적이란 관에 잡혀도 당장에 목이 잘리는 처지가 아니던가?

하지만…….

‘빌어먹을,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아니, 그래도 저항은 해 보고 죽는 게…….’

‘어떻게 하지?’

그때였다.

“아미타불.”

혜연이 가만히 반장을 하며 말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시는 분들은 결코 죽이지 않겠다고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승복을 입은, 선해 보이는 스님이 저리 말하니 신뢰감이 생겼다.

게다가.

“저희는 화산파의 제자들입니다. 저희 역시 적어도 목숨만은 보장해 드릴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백천이 앞으로 나서서 쐐기를 박자 수적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무래도 사람은 행색에 따라서 신뢰도가 달라진다. 누가 봐도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백천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니 신뢰도가 확연히 달랐다.

“투항하겠습니다.”

“항복하겠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모두가 무기를 버리며 투항했다.

하지만 원하던 결과가 나왔음에도 청명은 딱히 기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화가 치민 듯 날뛰기 시작했다.

“근데 이 새끼들이 사람 차별하나? 내가 말할 때는 콧구멍으로도 안 듣더니? 야, 안 되겠다. 작살 도로 들어, 이 새끼들아! 오늘 다 죽자!”

“말려! 저거 잡아!”

백천의 외침에 유이설과 당소소가 부리나케 달려가 청명을 잡고 늘어졌다.

당소소가 허리를 붙들었고, 유이설이 청명의 머리를 콩콩콩 때려 댔다.

“사형! 참으세요! 약속했잖아요!”

“혼나.”

“아니, 저 새끼들이!”

“알았다고! 알았다니까요!”

“혼나.”

청명이 으르렁대며 달려들려 할 때마다 수적들이 뒤로 우르르 물러섰다.

그 난장판에 백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사숙, 일단 정리부터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지.”

윤종의 말에 한숨을 내쉰 백천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노상 보던 광경이구나.’

이런 광경을 일관성 있게,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 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실감되었다.

동아줄이 칭칭 묶인 수적들이 나란히 꿇어앉았다.

무학을 익힌 무인들에게 동아줄이 뭐 얼마나 대단한 제약이 되겠냐마는 그 주변을 시퍼렇게 날선 무기로 무장한 산적들이 에워싸고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하…….”

“쓰읍.”

산적들이 영 못마땅한 얼굴로 수적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지금이라도 허락만 떨어진다면 단숨에 목을 죄 쳐 버릴 기세였다.

그 살벌한 분위기에 오금이 저린 수적들은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것들을 살려서 어디다 쓰신다고.”

임소병 역시 떨떠름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옆에 있던 백천이 나지막이 웃었다.

“그렇다고 모두 죽일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요.”

“뭐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줄줄이 엮어 놓은 김에 저기다가 던져 버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임소병이 장강을 가리키자 백천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사람이라면 정말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서였다.

화산의 제자들에게야 능청스러운 서생 같지만, 이 양반의 실제 지위는 녹림왕이 아닌가?

“청명이에게도 뭔가 생각이 있겠지요.”

“흐음.”

그때.

“없습니다!”

“창고에는 돈이랑 재물밖에는 없습니다! 사람은 안 보입니다.”

“예! 보물밖에는…….”

“으헤헤!”

순간 움찔했던 임소병과 백천이 동시에 묘한 시선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크흐흠! 크흠!”

청명이 입가에 주먹을 대고는 낮게 헛기침을 했다.

“그냥 곡식이랑 돈만 산처럼 쌓여 있습…….”

“꺄르르륵!”

“…….”

“크흠흠! 크흠!”

백천은 썩은 동태처럼 빛이 꺼진 눈으로 그 양을 보다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저리도 좋을까…….”

“거 돈도 많은 양반이.”

“에이, 시끄럽고! 그러니까 돈……. 크흐흠! 돈이랑 보물……. 곡식만 있다 이거지! 기진이보랑 기화요초! 온갖 약재와 영단!”

“……그런 건 없어, 이 새끼야.”

“에이!”

뭐 뀐 놈이 성낸다고 괜스레 성질을 부린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그러더니 산적들을 옆으로 밀어 내고 수적들 사이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청명은 중앙에서 유독 자세를 낮추고 있던 이의 멱살을 단번에 틀어쥐었다.

“이 새끼가 고개 숙이고 있는 꼬락서니 보게?”

“히, 히이이익!”

“왜? 그러고 있으면 모를 줄 알고? 내 눈은 무슨 옹이구멍인 줄 아냐, 이 새끼야?”

“사, 살려 주십시오!”

“나와!”

잡은 이를 질질 끌고 나와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악!”

나동그라진 조승이 비명을 내지르더니 덜덜 떨리는 눈으로 청명을 올려다보았다.

콰앙!

그때 그의 얼굴 바로 옆을 청명이 콱 내리밟았다. 바닥에 발자국이 깊게도 파였다. 만일 조금만 방향을 틀어 그의 얼굴을 밟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청명이 조승의 멱살을 다시 움켜쥐어 들어 올리곤 소리쳤다.

“사람들 어쨌어, 이 새끼야?”

“사, 살려 주십시오, 대협! 저는 아무것도……!”

“근데 이 새끼가 정신 안 차리지?”

쫙! 쫙! 쫙! 쫙! 쫙!

청명이 조승의 뺨을 좌우로 후려쳤다.

“정신, 이 새끼야! 정신!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이야기 못 들었냐? 엉?”

그 참혹한 광경에 백천은 슬쩍 눈을 감았다.

청명아……. 너한테 물리느니 호랑이한테 물리는 게 낫지……. 너는 정신 차린다고 안 봐주잖아…….

순식간에 양 볼이 퉁퉁 부어오른 조승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모, 모읍이다.”

“뭐? 말 똑바로 안 해, 이 새끼야?”

조승이 다시 신명나게 맞기 시작했다. 백천은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임소병이 감탄한 듯 박수를 쳐 대며 중얼거렸다.

“히야……. 찰지게도 패시네. 저건 산적 놈들도 배워야 돼. 쯧쯧쯧. 이런 부분에서 도사한테 지다니, 산적 자존심이 있지.”

……이 양반이 누구 놀리나?

백천이 눈을 흘겼다.

쫘아아악!

“똑바로 말해 봐. 뭐라고?”

“모, 모릅니다!”

조승은 아예 엉엉 울어 댔다.

“저희는 사람을 자, 잡아 온 적이 없습니다. 대체 뭘 말하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뭐든 다 말할 테니 살려만 주십시오!”

“몰라?”

“예! 진짜 맹세코 그런 일을 벌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저 배는 뭔데? 왜 끌고 왔어?”

“그, 그건 저분들이 워낙에 저항을 하시니까. 일단 기지로 끌고 오려고……. 야, 양민들은 풀어 주려고 했습니다! 저희가 진짜로 인신매매를 해 댔으면 지금까지 터 잡고 장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일은 함부로 못 합니다!”

“……아니라고?”

“예!”

청명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꺾였다.

“진짜?”

“제, 제 말이 거짓이면 죽이셔도 됩니다! 목숨을 걸고 진짜입니다!”

“어……. 그렇단 말이지?”

청명이 멱살을 쥐고 있던 손에서 살짝 힘을 풀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을 마주한 백천이 입을 꾹 닫더니 천천히 먼 산을 바라보았다. 청명의 시선을 피하고 싶단 필사적인 바람이 묻어 있었다.

“사숙.”

“…….”

“여기 아니라는데?”

“…….”

숨 막히는 침묵이 둘 사이를 오갔다.

“그러면…….”

“…….”

“다들 도대체 왜 여기서 뒈지게 싸우고 있었던 건데?”

“……청명아.”

“응?”

“……차라리 때려라.”

“…….”

화산을 떠나 온 이후,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 백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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