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8화. 아니, 사람 말을 좀 들어! (3)
“어디 보자.”
절벽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는 임소병의 입가엔 미소가 맺혀 들었다.
“금방 끝나겠군. 하긴 수채 하나 처리하기에는 과한 전력이지.”
녹림이 대별채를 비롯한 몇몇 산채의 반란으로 전력을 좀 잃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정도로 평가절하 되기에는 신주오패라는 이름이 너무도 무겁다.
물론 상대하는 이들도 신주오패의 일원인 장강수로채의 수채이기는 하나, 녹림왕이 이끌고 온 녹채에 비하면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하니 속수무책이었다.
“녹림왕이시여.”
“음?”
옆에 부복해 있던 녹채의 장로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뗐다.
“감히 제가 녹림왕의 드높은 뜻을 미루어 짐작할 순…….”
“알아, 알아! 왜 새삼스레 장강 물귀신 놈들과 싸우느냐 이거지? 내부 정비도 덜 끝났는데.”
“……그렇습니다.”
“뭐 어쩌겠어? 저 양반이 오라는데.”
임소병의 시선이 슬쩍 청명에게로 향했다. 범처럼 날뛰는 청명을 보고 있으니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뒈지기 싫으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녹림왕이시여.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장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녹림왕께서는 중원 모든 산의 지배자이자 신주오패의 일원인 녹림칠십이채의 수장이십니다.”
“알아.”
“그런 분께서 저 화산의 어린 제자와…….”
“일 장로.”
“예. 녹림왕이시여.”
“입조심해야지.”
녹림왕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지만 장로는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눈빛에 드러난 경고를 읽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며 현명해지기도 하지만, 제 상식에 사로잡혀 우둔해지기도 하지. 저 어린 제자의 말을 내가 고분고분 들어주는 게 못마땅한가?”
“……그런 뜻은 아니옵고…….”
“뭐, 하긴 못마땅할 수도 있지. 나도 한 번씩은 짜증 나니까.”
“……예?”
임소병은 생각하다 보니 화가 치민 눈치로 부채를 얼굴에 파닥파닥 부쳐 댔다.
“전서 한 장 달랑 보내서 당장 있는 전력 없는 전력 다 끌어모아서 구강으로 가라니! 빌어먹을 황제도 나한테 그렇게 막 명령을 내려 대지는 않을 텐데, 사람을 뭐로 보고 젠장!”
그의 불평을 들으며 장로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런데…… 그 말을 그대로 따르신 건 녹림왕이시잖습니까? 그것도 있는 닦달, 없는 닦달 해 가며…….
그때 임소병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뭐 어쩌겠어. 전서를 쓴 사람이 화산신룡인데.”
그리고 슬쩍 웃으며 말했다.
“사람이란 시운을 볼 줄 알아야 하지. 내가 녹림왕이라는 체면에 연연하여 턱만 괴고 있었으면 지금쯤 목 잘린 시체가 되어 좋은 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어, 어찌 그런…….”
“도박은 소소하게 하면 재미가 없어.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가 패가망신할 정도로 걸어야 하는 거야. 그래야 딸 때도 무지막지 하게 딸 수 있거든.”
임소병이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저 사람이 내가 건 말이다. 어쩌면 저 양반 덕분에 나도 녹림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처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의 두 눈엔 기이한 열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 그리고 저 양반 앞에서는 정말로 입조심하도록 해. 남녀노소를 안 가리더라고.”
“…….”
입을 다물면서도 녹림이 어딘가 잘못되어 가고 있단 생각을 떨칠 수 없는 장로였다.
“크아아앗!”
잔포흑어의 조도(爪刀)가 벼락처럼 허공을 갈랐다.
마치 독 오른 살쾡이가 발톱을 휘두르는 것 같은 광경이었지만, 그 커다란 덩치 덕에 위압감은 감히 살쾡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까가가가각!
권갑(拳鉀) 끝에 달린 세 개의 날이 서로 마찰하며 더없이 위협적인 소음을 빚었다.
잔포흑어. 잔인하고 포악한 가물치.
가물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포악한 물고기다. 바다가 아닌 강이라면 가물치의 천적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집어삼켜 대는 강의 폭군. 그런 가물치가 별호로 붙은 것만 봐도 여광계가 장강에서 가지는 입지를 알 수 있었다.
카가가가각!
권갑 끝에 붙은 조도들이 가위처럼 맞물렸다.
‘이 애송이 놈!’
잔포흑어는 필승할 자신이 있었다.
그는 딱히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이도 아니고, 적을 얕잡아 보는 이도 아니다. 그리고 상대가 어리다 해서 방심하는 이도 아니었다.
강을 얕잡아 보는 이는 결국 강에 먹힌다. 그 강에서 살아남은 그는 신중하다는 게 어떤 건지를 가장 잘 아는 이 중 하나다.
그럼에도 그가 필승을 자신한 이유는 저 청명이 다름 아닌 검수이기 때문이다.
가각!
그의 조도(爪刀)는 일반적인 병기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검, 창, 도, 봉 같은 익숙한 십팔반병기(十八般兵器)가 아니라 웬만해서는 상대해 볼 일이 없는 기괴한 무기들. 보통 기문병기(奇門兵器)라 불리는 것이다.
강호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들에 비해 그 깊이가 얕고 범용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특정한 상황에서는 일반적인 무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점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잔포흑어가 생각하는 조도의 특징은 바로 검을 상대할 때에 말도 안 되게 강하다는 점이었다.
검보다 짧기에 장병으로써 이점을 발휘할 수는 없지만, 짧은 만큼 더 섬세한 움직임이 가능하고, 교차한 날로 검을 잡아 챌 수 있다.
날과 날 사이에 검을 끼워 제압하기만 한다면 검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더구나 그의 조도는 양손에 하나씩, 모두 두 자루니까.
그의 앞에서 현란한 검술을 자랑하던 이들은 하나같이 검을 제압당한 채, 반대쪽 조도에 배가 꿰뚫려 내장을 쏟으며 죽어 갔다.
설사 저 청명이 그보다 더 강한 고수라고 해도 검수인 이상 절대지지 않는다. 그게 잔포흑어의 확신이었다.
‘배를 찢어 죽여 주마!’
이놈만은 용서할 수 없다. 이놈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지 않았는가!
이렇게 수채를 버리고 달아나면 다시 재건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아니, 어쩌면 진노한 흑룡왕의 추적을 피해 평생을 도망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그 모든 불안과 분노가 청명에게로 쏟아졌다.
“죽어라라아아아앗!”
그의 조도가 맹렬하게 청명의 전신을 노리고 움직였다.
하지만 청명은 몸을 긁으려 드는 그의 공격을 별다른 힘도 들이지 않고 요리조리 피해 냈다.
“이 날다람쥐 같은 놈이!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셈이냐? 그 잘난 검은 뒀다 팔아먹기라도 할 셈이냐?”
“아, 그래? 보고 싶구나?”
청명이 그 순간 뒤쪽으로 몸을 날리며 거리를 벌리더니 히죽 웃었다.
“정 그렇게 보고 싶다면, 보여 줘야지. 화산의 검이 어떤 건지 말이야.”
이에 잔포흑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이는 부러 겉으로 내보인 모습일 뿐, 내심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걸렸구나, 이 멍청한 놈!’
어떤 검법이든 상관없다. 그 어떤 강맹한 검법이라 해도 결국엔 검 한 자루에서 나오는 법. 공격해 들어오기만 한다면 단번에 검을 낚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노오오오옴!”
분노를 가장한 잔포흑어의 고함이 울려퍼지는 순간, 청명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르르르르.
검 끝이 아주 가볍게 살짝 떨렸다. 그 떨림은 점점 커졌고, 이내 검이 수십, 수백 개로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뭐?’
잔포흑어의 두 눈에 당혹감이 피어올랐다.
‘아, 아니!’
당황할 것 없다.
이미 저 화산 놈들이 쓰는 검술을 몇 번이나 보지 않았던가. 현란하고 화려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영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혹되지 않고 냉정하게 받아친다면 못 받아 낼 것은 아니…….
그 순간.
수도 없이 불어난 청명의 검이 허공으로 쫙 펼쳐지듯 퍼진다 싶더니, 이내 그 많은 검 끝마다 꽃을 피워 내기 시작했다.
가지를 뻗친 매화나무에서 일제히 피어나는 매화처럼.
‘자, 잡아…….’
잔포흑어의 얼굴이 일순 시커멓게 물들었다.
피어난 꽃들이 일제히 바람에 휘날리며 날아오른다.
화원(花園). 세상이 꽃으로 뒤덮인 것만 같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파란 하늘과 그 하늘을 뒤덮으며 흩날리는 꽃잎뿐이었다.
“어…….”
잡는다고?
뭘? 대체 뭘 잡아야 한다는 말인가?
보이는 것은 꽃잎뿐인데.
이미 본 검술이라고?
같은 무학이라고 해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서 그 격은 달라진다. 사미승이 쓰는 나한권과 소림의 고승이 쓰는 나한권은 같은 무학이되 완전히 다른 무학이다.
그 뻔한 사실을 왜 잊었다는 말인가?
피이잇!
날아온 매화잎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콧날이 갈라지며 붉은 피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잔포흑어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몸 곳곳이 베여 나가며 붉은 핏물이 산발적으로 뿜어졌다.
“으, 으아아아아아!”
잔포흑어는 비명을 지르고 이를 악물었다.
그 역시 전투로 잔뼈가 굵다. 지금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물러나는 순간 죽는다.
그가 주춤하며 뒤로 물러나는 순간 이 꽃잎들은 쉴 새 없이 그를 물어뜯어 넝마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가야 할 곳은 뒤가 아니라 앞!
있는 모든 내력을 끌어 올린 잔포흑어가 양팔과 복부에 집중시켰다. 양팔을 교차하여 머리를 보호하며 앞으로, 또 앞으로 내달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서걱! 서걱! 서걱!
매화가 분분히 그의 팔과 다리를 갈라낸다. 마치 칼날이 가득한 구덩이에 빠져 자맥질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격통이 정신을 아득하게 앗아 갔다.
‘하, 한 번만!’
잔포흑어의 두 눈에 검은 불길이 치솟았다.
서걱!
찰나간에 또 옆 목이 깊게 베이며 한 줄기 핏물이 쭉 솟구쳤다.
서걱!
옆구리가 길게 베여 나갔다. 이건 분명 뼈가 드러날 정도의 중상이었다.
서걱! 서걱!
몸에 아예 박히는 매화는 베고 지나가는 꽃잎만큼 치명적이진 않지만, 탄탄한 육체를 적어도 한 치씩은 파고들었다.
‘하, 한 걸음만!’
전신에 상처가 없는 곳을 찾는 것이 더 빠를 지경이 된 잔포흑어가 짐승 같은 괴성을 내지르며 눈앞에 보이는 꽃잎의 벽을 그 몸으로 꿰뚫는다.
“으아아아아아아아!”
파아아앗!
피투성이가 된 그의 얼굴에서 이제 붉지 않은 곳은 오로지 형형한 두 눈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청명의 모습을 포착한 그가 울부짖었다.
“이 개 같은 노오오오오오옴!”
벼락같이 내리친 조도가 청명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 순간 청명이 회수한 검을 들어 잔포흑어의 조도를 막아 내었다.
카아아아아앙!
두 병기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카각! 가가가가각!
이 순간이야말로 잔포흑어가 전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노려 오던 것.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잔포흑어는 온 힘을 다해 조도로 청명의 검을 조였다. 단번에 부러뜨려 버리기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가가각! 가가가각!
조도와 암매검이 얽혀 들며 청명의 검이 일순 멈추었다.
‘잡…았다! 이 쥐새끼!’
잔포흑어의 두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죽어라아아아아!”
그는 자유로운 우수를 과격하게 휘둘렀다. 청명을 단번에 가로로 갈라 버릴 듯한 움직임이었다.
하나 그 순간.
쿠우우우우웅!
강렬한 기의 충돌이 사방으로 바람을 일으키고 그 기운에 호응한 것처럼 흙먼지가 치솟았다.
잠시 후,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흙먼지가 천천히 가라앉는 순간 펼쳐진 광경은 이전의 상황과 전혀 달랐다.
잔포흑어.
분명 청명의 배를 거의 베려 했던 그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양손의 조도를 교차하여 청명의 검을 옭아매고 있었다. 아니, 그건 차라리 양손으로 힘겹게 막아 내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앞에 청명이 무심한 눈으로 검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누가 수적 놈 아니랄까 봐 잔재주를 부리기는.”
“끅……. 끄으윽…….”
실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청명은 딱히 힘을 주는 기색도 없이 한 손으로 잡은 검을 가만히 내리누르고 있을 뿐이다.
반면 청명보다 두 배는 더 덩치가 커다란 잔포흑어는 전신에 핏줄이 터져 나갈 정도로 힘을 써 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무지 청명의 검을 밀어 내지 못한다.
“끄윽…….”
우득! 우드드득! 우득!
잔포흑어의 팔이 비명을 질러 댔다.
온몸의 상처에서 피가 미친 듯이 솟구치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청명은 그 광경을 오만한 눈길로 내려다보다 입꼬리를 비틀었다.
“멍청한 놈이.”
청명의 검이 노을빛의 검기를 폭발적으로 뿜어내더니 검을 막고 있는 조도를 단번에 갈라 버렸다.
파아아아앗!
어느새 잔포흑어의 뒤쪽에 나타난 청명이 검에 묻은 피를 바닥에 털어 냈다.
“…….”
툭. 투둑.
잘려 나간 조도 날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잠시 후 잔포흑어의 머리끝부터 사타구니 끝까지 생겨난 붉은 선을 따라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말…도 안…….”
촤아아아아악!
두 쪽으로 갈라진 잔포흑어의 육체가 바닥으로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스르릉.
납검한 청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화산을 건드린 걸 지옥에서 영원히 후회해라.”
전투의 끝을 알리는 차가운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