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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767화 (914/1,567)

767화. 아니, 사람 말을 좀 들어! (2)

“뭐, 뭐냐?”

“어떻게……!”

절벽에서 내려진 수십 개의 줄을 타고 녹빛 의복 차림의 이들이 강하하기 시작한다.

능숙하게 줄을 타는 모습에서 이 짓을 한두 번 해 본 이들이 아닌 게 확연히 보였다.

“저, 저 옷은?”

“녹림! 녹림이다!”

“녹림칠십이채라고?”

수적은 모두 당황하여 입을 쩍 벌렸다. 그럴 만도 했다.

산적이라니.

기본적으로 장강수로십팔채와 녹림칠십이채는 도적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묶여 언급되고는 한다. 하지만 강에서 활동하는 장강수로십팔채와 산에서 활동하는 녹림수로칠십이채는 웬만해서는 서로 마주칠 일이 없다.

서로의 존재는 알고 있지만, 굳이 반목할 이유도 없고, 굳이 친할 이유도 없는 곳.

그런데 그 녹림이 왜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단 말인가?

“크하하핫! 이 물귀신 새끼들!”

“잘도 뭍에 발을 들였구나! 모조리 베어 죽여 주마!”

단숨에 절벽을 타고 내려온 산적들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수적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다, 당황하지 마라! 내려오는 놈들부터 차근차근 죽이면 된다!”

“뭣들 하느냐! 활을 쏴라, 활을!”

궁수들이 아차 하고는 허둥지둥 화살을 챙겼다. 줄을 타고 절벽을 내려오는 이들은 화살에 무방비일 수밖에 없다. 이럴 때 공격을 하면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이 상대해야 할 건 평범한 녹림도가 아니라 임소병이었다.

“오, 화살? 그거야 이쪽에도 있지.”

임소병이 부채로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먹여 줘라.”

“예!”

그의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궁수부대가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미 먹여 놓은 화살을 일제히 쏘기 시작했다.

쉬이이이이잉!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연사.

궁수들은 시위를 튕기는 모습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화살을 날려 댔다. 검게 칠한 화살들이 쏟아지는 모습은 흡사 검은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아아아아아악!”

“화, 화살을 쏜다!”

“뭐해! 빌어먹을! 반격하라고!”

아래쪽의 수적들도 열심히 화살을 당겨 보았지만, 아래에서 위로 쏘는 화살이 위에서 아래로 쏘는 것과 같은 위력일 순 없었다.

아무리 내력을 실어 날린다고는 하지만, 화살이 절벽 위에 도달했을 때쯤에는 이미 위력이 다한 뒤였다.

“쯧쯧. 싱겁기는.”

임소병이 피식 웃고는 턱짓했다.

“화살이 다 빌 때까지 모조리 쏟아부어라. 수적 놈들이 물 밖에 나왔으면 그 대가를 치러야지.”

“예!”

임소병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맺혔다.

“……녹림?”

백천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눈을 끔뻑거렸다.

“노, 녹림이 여기서 왜 나오냐? 저 양반들 사파 아냐?”

“맞지.”

“그런데 사파가 사파와 왜 싸워?”

“뭐래? 그럼 녹림이랑 만인방은 왜 싸우는데?”

“어……?”

“그리고 우린 종남이랑 왜 싸우는데?”

“그야…….”

말문이 막힌 백천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눈만 끔뻑거렸다.

“사파라고 친하게 지낼 거면 저 새끼들이 사파겠어? 정파 놈들도 이득에 따라 치고받는 게 다반산데, 사파 놈들이야 말 안 해도 뻔하지.”

청명이 낄낄대며 웃었다.

“이게 바로 이이제이(以夷制夷)! 이독제독(以毒制毒)이라는 거지!”

저기요…….

댁이 부르셔 놓고 오랑캐라고 하는 건 좀…….

아니, 물론 저 양반들이 산적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당신 말 듣고 온 사람들을 그렇게 칭해 버리는 건 인성에 문제가 좀…….

“이히히힛! 잘한다! 잘한다! 싸워라! 죽여라!”

수적과 산적들이 서로 엉겨 붙는 꼴을 보며 청명은 좋아 죽겠다는 듯 웃고 손뼉을 쳤다. 화산 제자들의 두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절망감이 피어올랐다.

백상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세상에……. 여기 수적이랑 산적들이 떼거지로 있는데 저 새끼가 제일 나쁜 놈으로 보이다니.”

“실제로 그래서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저 새끼가 제일 나쁜 놈 맞잖아요, 사숙.”

“……그렇지. 그게 맞지.”

명문대파 화산파. 그 화산파가 배출한 사상 최고의 인성이 지금 이 순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저들은 어떻게 데리고 온 거냐?”

“뭘 뻔한 소리를 하고 있어. 수적 새끼들이 화산을 노렸다며?”

“그렇…지?”

“뻔히 알고 일 벌인 새끼들이 얼굴 마주쳤다고 죄송하다고 빌겠어? 보나마나 싸움 날 게 뻔한데, 그 벌린 아가리에 쭐레쭐레 걸어 들어가는 등신이 어디 있어?”

푸욱.

청명의 말이 등신……. 아니, 백천의 가슴을 예리하게 찔렀다.

“화산에서 본대가 늦을 것 같으면 다른 방법이라도 강구해야지. 뭐. 세 살짜리도 할 만한 생각 아냐?”

푸욱.

“근처에 마땅히 부를 놈들이라고는 저 산적 새끼들밖에 없으니까 미리 불러 뒀지.”

“……오는 길에?”

“오는 길에는 접선을 한 거고. 연통은 소식 들었을 때부터 미리 넣어 놨지. 아마 쟤들이 사숙보다 먼저 와 있었을걸?”

백천이 입을 쩌억 벌렸다.

“그, 그럼 너는 일이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다는 거냐?”

“내가 뭔 제갈공명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럼?”

청명은 얘기하다 속이 터지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이 양반아. 만에 하나에도 대비를 하는 게 기본 아냐?! 준비했다가 못 써먹으면 그냥 좀 아쉽고 말 일이지만, 준비 안 했다가 아쉬우면 뒈지는 거여! 몰라?”

백천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 생각도 못 했다.

이놈이 단순히 힘만 믿고 설치는 인간이 아니라는 거야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이렇게 뼈저리게 실감한 건 또 처음이라서였다.

백천이 할 말을 잃고 망연히 있으니 백상이 재빠르게 물었다.

“그런데 그건 우리 입장이고, 녹림왕은 왜 갑자기 장강수로채라 싸우겠다는 하신 거야?”

“안 싸울 이유는 뭔데? 쟤네 안 그래도 천우맹에 가입시켜 달라고 맨날 징징대는 애들인데.”

“…….”

“신주오패랑 짝짜꿍하면서 천우맹에 들겠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쟤들도 이제 사파 놈들과 선을 그었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 줘야 한다 이 말이지.”

“드, 듣고 보니…….”

지나고 나서 말로 듣자면 사실 너무도 뻔하고 쉽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일이 터지기도 전에 생각하고 고려하여 움직이는 건 절대 말처럼 쉽지 않다.

‘미친 놈. 그 먼 섬서에서 이걸 미리 내다보고…….’

예측이라기보다는 대비에 가깝지만, 대비가 맞아떨어지면 그게 바로 예측 아니던가?

함께 움직일 때 이놈이 우다닥 뭔가를 해 대면 그 속도감에 정신없이 끌려다니기에 바빠서 무슨 일을 벌이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니 이놈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놈인지 새삼 실감되었다.

“뭐 해?”

“응?”

“등이 보이잖아! 찔러 줘야 예의지!”

생각에 잠겨 있던 백천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적들이 절벽을 타고 내려오는 산적들에게 정신 팔려 등을 훤히 내보이고 있었다.

“오냐!”

생각은 나중! 우선은 이놈들부터다!

“가라! 사숙! 사고! 사형!”

“네 사형들은 뒤에 있어, 이 망할 새끼야!”

“그럼 사제!”

“아악!”

당소소가 우렁차게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청명이 낄낄 웃어 댔다.

“자, 그럼…….”

그러다 슬쩍 옆을 돌아보는 시선은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대가리를 잡으러 가 보실까?”

“채, 채주!”

잔포흑어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이…….”

멍하니 풀려 있던 얼굴이 이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 빌어먹을! 녹림 새끼들이 왜 우리를 노린단 말이냐?”

저 위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이들이 화산 놈이나 다른 정파 놈들이었다면 놀라기는 했겠으나 이렇게 황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녹림이라니!

녹림이 대체 왜 장강수로채를 공격하는가! 왜!

“어디냐! 대체 어느 채냐! 저 문사철처럼 말라비틀어진 저놈이 대체 누구냔 말이다!”

“제 생각에 저자는 녹림왕 같습니다.”

“뭐? 녹림왕? 녹림왕은 칠척거한이 아니었더냐?”

“과거에는 그렇게 소문이 났으나, 이번 녹림의 난 때 알려진 바로는 녹림왕은 병 서생이라는 자로, 겉으로 보기에 문사처럼 유약해 보인다고…….”

잔포흑어가 입술을 깨물었다.

‘녹림왕이라니.’

평범한 산채도 아니고 녹림왕이 직접 수하들을 이끌고 왔단 말인가? 어쩐지 저 절벽을 타고 내려오는 이들의 경신법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녹림왕이 왜 우리를 공격한다는 말이냐!”

“그, 그건 저도 잘…….”

웬만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조승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말을 더듬었다. 상식 안에서는 도무지 벌어질 수 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본디 평범한 책사인 그가 이 상황을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익! 비켜라!”

조승을 밀치며 앞으로 나선 잔포흑어가 절벽 위를 향해 우렁우렁 고함을 내질렀다.

“녹림와아아아아앙!”

그러자 절벽 위에 있던 임소병이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잔포흑어를 바라보았다.

“목청 좋네. 부럽다.”

“왜! 녹림이 왜 수채를 공격하는 것이오! 어째서 녹림이 장강수로십팔채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오?”

“애초에 친구인 적도 없었는데 뭘 새삼스럽게.”

임소병이 낮게 비웃었다. 그러더니 금세 안색을 싹 바꾸고 크게 소리쳤다.

“녹림은 정도를 걷는다 떳떳하게 말할 곳은 아니나! 적어도 힘없는 양민들에게는 피해를 끼치지 않고 살기 위해 애써 왔다! 그런데 너희가 양민들을 인신매매하고 외국에 팔아넘기기까지 하니, 그 무도함을 더는 참을 수 없다!”

“뭐, 뭐라 지껄이는…….”

“녹림의 이름으로 너희를 단죄하고 너희에게 잡힌 양민들을 풀어 주어 구휼할 것이다! 더 말할 것 없다! 저놈의 수급을 내게 가져와라!”

“충!”

산적들이 목이 터져라 복창하고 더욱 기세를 올려 수적들을 베어 넘겼다.

“으하하핫! 이 조무래기 새끼들이!”

“물고기만 씹던 놈들이라 그런지 약해 빠졌구나! 이리 와라, 두 쪽을 내어 주마!”

“모두 쳐 죽여라!”

일반적인 산채는 수채를 상대로 이 정도까지 우위를 점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일반적인 산채가 아니라 임소병이 고르고 골라 뽑은 녹채의 정예들이다.

심지어 대별채의 난을 제압하며 녹채를 한 번 더 정비하였으니 이들은 녹림 최고의 정예들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상황이었다.

“음하하하하하하! 이 하찮은 것들이! 형님! 제가 왔습니다!”

선두에 선 철신장 번충이 고함을 내지르며 솥뚜껑 같은 주먹을 휘둘러 수적들을 날려 버렸다.

그 뒤로 흑야호 곽민이 따르며 빛살 같은 쾌검을 날려 댔다.

“아아아악!”

“무, 물러나!”

수적들의 일각이 완전히 무너졌다. 하지만 그들의 등 뒤에서는 녹림보다 더 무서운, 열받은 화산파가 달려들고 있었다.

“어딜 도망가, 이 새끼들아!”

“기분 내실 때는 좋았겠지! 다 썰어 버린다!”

양쪽에서 공격을 받으니 수적들은 이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전세를 파악한 잔포흑어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이건 틀렸다.’

어찌할 방도가 없다.

애초에 저만한 전력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만약 저들만 쳐들어온 상황이었다면 잔포흑어는 미련 없이 배를 띄우고 남은 이들은 자맥질하게 해 달아났을 것이다.

어떤 세력이든 물속으로 그들을 쫓아올 만큼 간 큰 놈들은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화산파 놈들에게 정신이 팔린 덕분에 등을 잡혔고, 달아나야 할 강은 화산파에게 점거당해 가로막혔다.

지금이라도 물로 뛰어들란 명령을 내리면 반수 정도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배를 모두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럼 수채는 끝장이라 봐야 할 것이다.

“조승!”

“채, 채주님!”

“일단 몸을 뺀다.”

“예? 하, 하지만…….”

“우선 나라도 살아야 뒷일을 도모할 수 있다. 아니면 여기 남을 테냐?”

조승의 얼굴에 갈등이 피어났다. 하지만 그의 갈등은 이내 무색해졌다.

“어이.”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잔포흑어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누가 보내 준대?”

“…….”

화산신룡 청명. 그가 어느새 등 뒤로 다가와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보내 줄 순 있지. 그 목은 말이야. 대신…….”

청명이 검을 슬쩍 들어 잔포흑어의 목을 겨누었다.

“몸뚱이는 두고 가도록 해.”

“……이 개자식이.”

잔포흑어의 두 눈에 불타는 듯한 살기가 차올랐다.

“너만은 내가 죽이고 가겠다! 이 개 같은 놈아!”

“하핫!”

미친 듯 달려드는 그를 보며 웃어젖힌 청명은 이내 기괴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적의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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