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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766화 (764/1,567)

766화. 아니, 사람 말을 좀 들어! (1)

“큭, 너무 많아!”

얼굴을 일그러뜨린 조걸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채주 주변에 머물러 있던 수채의 고수들이 청명을 둘러싸니 손이 남은 수적들이 일제히 그들에게 밀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사, 사형! 이 새끼들 너무 많습니다! 다다익선입니다!”

“중과부적이야! 이 등신아!”

윤종이 그 와중에도 속이 터진다는 듯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런 그의 얼굴에도 조금씩 힘겨움이 묻어났다.

‘빌어먹을. 많아도 너무 많다.’

장강수로십팔채와 녹림칠십이채는 둘 모두 신주오패의 일원으로서 거의 비등한 취급을 받는다. 그 말인즉슨, 수채 하나가 일반적인 산채 네다섯 개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물론 장강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 수채가 지형적인 이점을 지니고 있으니 가능한 평가지만, 그렇다 해도 수채 하나가 웬만한 산채 셋과 비등하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화산은 대별채를 토벌하기 위해 거의 모든 제자를 동원했었다. 고수야 그렇다 치고, 소속 수적의 수와 무위만으로는 대별채와도 비견될 만할 수채를 오검이 오롯이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앓는 소리 해 봐야 소용없어!’

윤종이 이를 악무는 그 순간이었다.

“아악! 뭐 합니까! 스님! 빨리 한 방에 날려 버리시라고요!”

“아, 아니…….”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혜연이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 내력은 끝없이 솟는 샘이 아니란 말입니다! 강한 일격을 끝도 없이 쏘아 댈 수는 없습니다, 시주!”

“그게 뭔 소리야! 소림 사람이 왜 내력이 없어!”

혜연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썩을…….’

아무래도 이들은 그가 자기들처럼 영약을 밥같이 먹고 산 줄 아는 모양이었다.

혜연이 아무리 소림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제자라고 한들, 대환단을 몇 알씩 먹여 가며 내력을 키우지는 못했다. 그가 얻어먹은 건 딱 한 알의 대환단뿐이다.

소림도 영약이 씨가 말라 가는 와중에 아끼고 아낀 대환단을 그에게 하사한 것이다. 그러니 받을 때는 사문의 은혜에 눈물까지 흘렸건만, 막상 화산 놈들이 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니 숭산 쪽으로 불만이 불쑥 솟았다.

‘한 알만 더 주지……!’

그럼 저 얄미운 인간의 잔소리를 듣고 있어야 할 이유도 없었을 텐데.

“그러니까 진즉에 자소단이라도 한 알 주셨으면 됐잖습니까!”

“어허! 타문의 영약을 탐내시다니! 그렇게 안 봤는데!”

“맞아.”

“탐욕에 찌드셨네.”

……개 같은 화산 놈들.

이 힘든 와중에도 남을 괴롭힐 때는 죽이 척척 맞는 꼴을 보니 수적이고 나발이고 몸 돌려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악! 빨리 치라고요!”

“으아아아!”

혜연이 이를 악물며 기운을 뽑아냈다.

“타아아압!”

콰아아아아아!

이내 폭포 같은 권력이 내뿜어졌지만, 확실히 이번엔 전에 비해 뒤가 조금 아쉬운 느낌이었다. 용처럼 솟아올라 미꾸라지처럼 잦아드는 권격을 물끄러미 보던 화산의 제자들이 표정 없는 얼굴로 혜연을 획 돌아보았다.

“……아, 아니…….”

그리고 다시 시선을 원래대로 획 돌렸다.

결국 혜연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흘렀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망할 화산 것들!’

“주둥아리 다물고 집중해!”

그때 백천이 크게 검을 떨치며 혜연이 만들어 낸 틈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입술을 짓씹었다.

‘빌어먹을!’

모두 집중하지 못해서 떠드는 게 아니란 사실을 백천도 알고 있다. 상황이 점점 나빠져만 가니 힘을 내기 위해 짐짓 밝은 척 뭐라도 떠드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멀쩡한 몸이었다 해도 이들 모두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진대, 중독까지 됐으니 상황이 오죽하겠는가?

아직 힘을 모두 잃은 건 아니지만, 밀려오는 수적 놈들을 보고 있으니 아연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조심하세요, 사형!”

“엇?”

유이설의 목소리에 백천이 고개를 획 돌렸다.

섬뜩하리만치 날카로운 작살 다섯 개가 동시에 날아들고 있었다.

“큭!”

백천은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다는 피할 수 없어도 두세 개는 쳐 내야…….

바로 그때였다.

“아니이이이이이이이이!”

너무 반가우면서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앞쪽에서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동시에 백천의 주위로 달려들던 수적들이 바짝 마른 가랑잎처럼 날아갔다.

“청명아!”

일단 반가움에 목청을 높였던 백천의 귀로 청명의 말이 비수처럼 박혔다.

“이 인간들이 그간 하나같이 다 피죽만 끓여 먹었나! 왜? 장문인이 돈을 안 챙겨 줘서 굶기라도 했어? 뭔 놈의 검수라는 것들이 이리 매가리가 없어! 그러다가 뒈지면 원시천존이 잘 왔다고 어깨춤이라도 춰 줄 줄 아나 보지?”

아……. 정신 나갈 것 같아…….

폭풍 같은 잔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진 백천 대신 조걸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항변했다.

“너무 많다고, 이 새끼야!”

“많아 봐야 수적이지. 토끼 많다고 처리 못 하는 범 본 적 있어?”

쯧 하고 혀를 찬 청명은 검을 떨치며 몸을 획 돌렸다.

“자, 내가 보여…….”

그러자 푸른 무복을 입은 수적들이 끝도 없이 꾸역꾸역 밀려오는 모습이 두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

어……. 좀 많긴 많네.

어…….

아니, 씨. 좀이 아니라 과도하게 많은데?

청명이 다시 뒤를 획 돌아보았다.

“혹시 지금 황제가 엄청 무능하냐?”

“갑자기 뭔 미친 소리야, 이 새끼야!”

“으아아아! 귀 막아, 귀! 나는 못 들었어.”

청명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수적인데 이렇게까지 많은 게 말이 되나? 뭔 치어 새끼 그물에 가둬서 키우는 것도 아니고.”

“수로채잖아! 수로채! 당연히 많지!”

“……허허, 말세로다.”

수적이 이리 범람하다니. 세상이 어찌 되려고!

그 순간 청명의 얼굴을 향해 날카로운 작살이 쇄도해 들어왔다.

“근데 이 새끼가!”

손등으로 작살을 쳐 내고, 달려든 이의 사타구니를 걷어차 버린 청명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수적을 일별한 후 벌컥 역정을 냈다.

“와 봐! 많으면 네까짓 놈들이 뭘 어쩔 건데! 내가 싹 다 저승 보내 준다!”

“처, 청명아!”

“아, 걱정 마시라고! 내가 처리한다니까! 하루 종일도 싸울 수 있어!”

“그게 아니라 이 새끼야!”

“응?”

“뒤에, 뒤에! 배!”

“으응?”

청명은 떨떠름하게 백천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뒤쪽에 있던 수적들이 화산의 제자들을 크게 우회하여 상선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저 배에는 왜 가는데? 등신들도 아니고. 어차피 우린 달아나지도 않을 건데.”

“저기 양민들이 타고 있어!”

“양민?”

“그래!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 말이다!”

“아, 양민? 나는 또…….”

청명이 빙그레 웃다가 눈을 까뒤집었다.

“근데 뭘 보고만 있어! 이 새끼들아! 막아아아아아!”

“에라, 씨바!”

“하나만 해라, 하나만! 이 새끼야!”

조걸과 윤종이 필사적으로 상선으로 달려가 수적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소소가 외쳤다.

“사형! 그런데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아요! 진짜 우리끼리 되는 거예요?”

“흐음.”

청명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 줄까?”

“네!”

“될 리가 있나.”

“……솔직하게 말하지 말지, 이 양반아.”

“솔직하게 말해 달라며.”

청명이 산뜻하게 웃었다. 당소소는 손에 든 비침을 수적들이 아니라 저 얼굴에 박아 넣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꾹 참았다.

“솔직히 말해서 수로채면 웬만한 구파보다 센 곳이잖아. 그중 수채 하나면 못해도 구파 무력대 하나쯤은 될 거고.”

“그렇죠.”

“그런데 그걸 일곱이서 무슨 수로 피해 없이 이겨? 양심이 있어야지!”

“……사숙. 진짜 딱 한 번만 독 풀어도 돼요?”

“안 돼.”

한숨을 쉰 백천이 검을 앞으로 겨누고 수적들을 위협하며 말했다.

“청명아. 그 말인즉, 피해를 감수하면 이길 수는 있다는 의미겠지?”

“어. 저 상선에 양민들이 타고 있다는 걸 알기 전에는 그랬지. 그런데 저 사람들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 있어?”

“……안 된다. 그건 절대 안 돼!”

“이래서 정파는 피곤하다니까.”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실리적으로 따지면 계산을 좀 더 해 봐야겠지만, 저들이 눈치 좋게 양민들을 노리기 시작한 이상 승산은 반 이하로 떨어졌다고 봐야 한다.

이들이 독에 중독되지 않고 완전한 상태에서 청명이 합류했다면 또 모를까.

“그래서 방법이 없다고?”

“하. 내가 또…….”

“그래, 뭐 네가 신선도 아니고. 없으면 없는 거겠지.”

“그 말이 아니고.”

“됐다! 열심히 싸우는 수밖에.”

“아니, 사람 말을 좀 들어!”

청명이 조바심이 난 것처럼 버럭 고함을 쳤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던 모두가 속으로 감탄했다.

‘저쯤 되면 조련사 아닙니까?’

‘배우고 싶다.’

청명이 이를 빠드득 갈고 콧방귀를 뀌었다.

“이 몸이 이딴 일도 해결 못 할 리가 없잖아. 다 준비를 해 왔다는 말씀!”

“준비라니?”

“그래서 시간 걸렸잖아.”

“……거기서 여기까지 달려오는 와중에 다른 것도 하고 왔다고?”

사람인가?

모두가 황당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자 그제야 청명이 엣헴 하고 배를 내밀었다.

그래, 이 시선이지! 날 이렇게 봐야지!

“우리끼리 안 되면 더 끌고 오면 그만이잖아!”

“서, 설마……!”

백천이 눈을 부릅뜬다.

“사제들이 온 것이냐? 사숙들과?”

“뭐래.”

“……응?”

청명이 얼굴을 확 구기며 퉁명스레 말했다.

“그 양반들이 이 시간에 여기 도착할 수 있으면 내가 왜 애를 쓰냐, 내가! 화산에 오두막 하나 지어 놓고 신선놀음이나 하고 있겠지!”

아……. 너 나중에 그럴 생각이구…….

아니, 이게 아니고!

“그럼?”

“세상에 쓸 수 있는 놈들이 화산만 있는 건 아니란 말씀이지.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청명이 히죽 웃으며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검술을 펼치면서 절벽 위까지 매화검기를 날려 댔으니 그놈이라면 지금쯤 알아보고 잘 찾아왔을 것이다.

“야, 인마! 뭐 해? 다 뒈지고 나올 거야?”

청명이 절벽 위를 향해 커다랗게 소리쳤다. 함께 그곳을 바라보는 모두의 눈에 기대가 넘실거렸다. 심지어 그들을 견제하고 위협하며 거리를 좁히던 수적들마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절벽 위에?’

‘누, 누가 왔다는 거냐?’

삽시간에 긴장감이 공간을 맴돌았다.

“…….”

“…….”

묘한 침묵이 잠시 이어졌고…….

“없는데?”

“뭐여.”

수적들이 떨떠름하게 청명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마저도 뚱한 얼굴로 청명에게 물었다.

“꿈꿨냐?”

“저 새끼가 그럼 그렇지.”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당황한 청명의 눈이 흔들렸다.

“야! 이 새끼야! 안 나와? 당장 안 나오지?”

“……그만해라, 청명아. 창피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좀 멋지게 죽어야지. 그게 뭐냐?”

“죽긴 뭘 죽어!”

청명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야! 폐병 다시 도져 봐야 정신 차릴래? 당장 안 튀어나와?”

“갑니다아아아아아!”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 빠르게 절벽 위로 돌아갔다. 다급하고도 커다란 고함은 분명 절벽 위에서 터진 것이었다.

‘서, 설마?’

저 먼 절벽 위.

한 사람이 부리나케 뛰어와 배를 움켜잡고 몸을 구부렸다.

“헤엑! 헤엑! 헤엑! 아니! 뭔 놈의 배가 사람 뛰는 것보다 빨라?”

배는 원래 사람이 뛰는 것보다 빠르지만, 그것도 사람에 따라 다른 이야기다.

그를 발견한 백천이 저도 모르게 입을 쩌억 벌렸다.

“노, 녹림…….”

아니, 댁이 여기서 왜 나오십니까?

“녹림왕?”

허리를 쭉 편 임소병이 부채를 펼쳐 들었다.

“물에서 수적을 상대하는 건 금기시되는 일이지만.”

그리고 부채로 얼굴을 살랑살랑 부쳐 대었다. 예전보다 혈색이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창백한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웃음이 가득했다.

“물가라면 좀 미묘하겠지? 그렇지, 얘들아?”

“예!”

“가라. 저 양반 더 성질 내기 전에 수적 놈들 피 맛 좀 보자꾸나.”

임소병이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부채로 앞을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긴 절벽 아래로 수십 가닥의 동아줄이 축제를 알리는 금줄처럼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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