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5화. 사숙! 자꾸 환청이 들립니다! (5)
실로 쾌검이었다.
뭔가 번뜩한다 싶더니 일장 여를 격하고 목에 거의 닿아 있었다. 선두에 선 수적이 기겁하며 목을 비틀었다.
스슷!
얇게 고기를 저며 내는 듯한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그의 피부가 깎여 나갔다.
목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보다 저 검을 피해 냈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너무 섣부르게 찾아온 것이었다.
촤락!
독사가 혀를 날름대는 듯한 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렸다.
“끄윽!”
하지만 그 반응조차 늦었는지 목에서 다시 한번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가까스로 비껴 나갔던 검이 빠르게 당겨지며 다시 그의 목을 긁어 댄 것이다.
촤라라락!
얇은 검이 독사처럼 영활하게 춤을 추며, 물러나는 그의 몸을 연이어 물어뜯었다.
서걱! 서걱! 서걱!
곳곳이 베여 나가며 순식간에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허벅지와 옆구리를 거의 동시에 베어 낸 검이 저항하듯 휘두른 그의 조를 단숨에 튕겨 내고 가슴께로 쇄도했다.
수적이 죽음을 직감하고 두 눈을 부릅뜬 바로 그 순간.
카캉!
뒤쪽에서 날아온 작살이 청명의 검을 쳐 냈다.
‘사, 살았…….’
파아아아앗!
하지만 튕겼던 암매검이 재차 뻗어졌다.
파아아앗!
작살은 섬전처럼 다시 날아드는 검을 가까스로 다시 쳐 냈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검은 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이익!”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커다란 경기를 품은 작살이 검 앞을 황급히 막아섰다.
하지만 그 순간.
빙글.
쾌속하게 날아들던 검이 속도를 훅 줄이더니, 작살 바로 앞에서 빙글 회전하며 우회했다.
‘뭣?’
푸욱!
“…….”
수적은 입을 쩍 벌리고 멍하니 제 가슴에 박힌 검을 바라보았다.
‘말도 안…….’
털썩.
생각이 많고, 할 말도 많았다. 하지만 숨이 끊어진 이는 그 어떤 것도 이어 갈 수 없다.
“이…….”
눈앞에서 동료의 목숨이 끊기는 것을 본 수적들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특히나 청명의 검을 막아 주었던 수적의 얼굴은 일그러진 모양새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왜?”
청명이 입꼬리를 뒤틀며 물었다.
“수적들 주제에 동료애라도 있어?”
“이…… 개 같은 새끼가!”
수적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이를 갈아붙였지만, 그 표정이나 험악한 목소리와는 달리 발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섬전같이 찔러 오던 검이 순간적으로 속도를 줄이며 작살을 비껴 돌아간 그 일 수가 눈에 선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말이 쉽지.
전력으로 찔러 넣은 검을 중간에 멈춘다는 건 찌르는 것에 비해 몇 배의 힘이 필요한 일이다. 심지어 그 멈춘 검을 쾌에서 유(柔)로 전환하여 작살을 타고 도는 신기를 보인다? 이건 단순히 멈추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렵다.
그 가공할 일 수만으로도 눈앞의 이자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검귀(劍鬼)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겉으로 보기에야 경박하기 짝이 없지만 검을 휘두르는 손길에 조금의 온기도 없다. 단박에 심장을 꿰뚫는 냉정함은 사실상 살귀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평생을 수적으로 살며 사람을 어지간히 죽여 본 그도 저리 망설임 하나 없이 사람을 죽여 대지는 못한다.
‘저놈은 혼자서는 절대 무리다.’
그의 동료들도 같은 생각인지 짧게 눈빛을 교환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이 수채의 최고 전력들. 각자가 수적선을 이끌고 단독으로 약탈을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들이다.
이들로도 이자를 막아 내지 못한다면 그 피해가 어디까지 늘어날지 상상도 할 수 없다.
“반드시 여기서 죽여야 한다!”
그 비장한 외침을 들은 청명은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네까짓 놈들이?”
“이놈이…….”
“이놈이라……. 세상 참 많이 좋아졌네. 수적 놈들이 내 앞에서 주둥아리도 털고 말이야.”
옛날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건만.
“뭐, 좋아.”
청명이 씩 웃었다.
“다시 그렇게 만들면 되니까!”
“온다!”
청명이 먹이를 노리는 범처럼 달려드는 순간, 수적들이 이를 악물며 병기를 치켜들었다.
‘우선은 버틴다.’
마주 찌르며 공격하는 것이 호기롭기는 하지만, 지금은 호기 따위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상대의 검은 기괴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변화막측하다. 그런 검을 섣불리 맞상대하려 들다가는 언제 어떻게 목이 잘려 나가는지도 모르고 죽게 된다.
‘이놈! 우리가 먹은 강호밥이 하루 이틀인 줄 아느냐?’
화려한 것이 가장 좋은 검법이라면 이미 강호에는 그런 검법만이 남아 있을 터. 하지만 저런 검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는 보기에는 화려한 검이 내실은 부족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막아 내다 보면 반드시 빈틈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아미자는 그런 빈틈을 찌르기에 가장 적합한 무기였다.
‘한 번만! 딱 한 번의 틈만 찾아내면 된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으로 청명의 검을 막아섰다.
순간적으로 피어오른 붉은 매화가 비처럼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큭!”
평범한 수적들이었다면 이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피를 뿌렸겠지만, 그들은 나름 이곳에서는 한가락 하는 이들이었다.
아니, 따지고 보자면 사실 신주오패 일원인 장강수로십팔채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다. 단 일 검에 나가떨어질 정도라면 감히 장강수로십팔채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카가가각!
날아드는 매화검기와 작살이 맞부딪치니 신경을 긁어 대는 쇳소리가 울렸다. 눈으로 보기에야 날리는 꽃잎처럼 가냘프지만 그 검기 하나하나에 실린 힘은 절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괴물인가?’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은 다르게 보자면 크게 위협적이진 않단 뜻이다. 하지만 문제는 청명이라는 놈이 뿜어내는 검기가 고작 하나 둘이 아니란 점이었다. 동시에 뿜어내는 수백 개의 검기가 모조리 이만한 힘을 싣고 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나 되는 일인가?
심지어 쏟아지는 꽃잎의 양은 점점 불어났다.
비처럼. 혹은 폭포처럼.
‘버, 버티면…….’
아미자를 잡은 팔의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팔목부터 팔꿈치까지가 벼락이라도 맞은 양 덜덜 떨렸다.
‘버티…….’
하지만 아무리 버텨도 작살을 가격하는 꽃잎의 수는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늘어만 갔다. 가랑비처럼 쏟아지던 꽃잎이 이제는 흡사 폭우처럼 내리꽂혔다.
‘끄윽…….’
손목이 뒤틀리고, 단전이 진탕되기 시작했다.
물방울은 보잘 것 없지만, 그 작은 물방울이 모여 내를 이루고 강을 만들어 낸다. 이처럼 하나하나의 꽃잎은 크게 강하지 않다 해도 수백 수천의 꽃잎이 모여 만들어 내는 힘은 어마어마했다.
이십사수매화검법 낙매성우(落梅成雨).
쏟아지는 매화의 비에 버티지 못한 수적들이 뒤늦게 몸을 빼려 우왕좌왕했다. 이대로 버티다가는 저 매화의 비에 난자당해 죽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게 바로 청명이 노리는 바였다.
“흐아아앗!”
강하게 경기를 발출하는 동시에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던 수적이 두 눈을 부릅떴다.
쏟아지던 매화의 비 사이로 눈부신 빛이 번쩍이더니 가슴에서 인두로 지진 듯한 화끈한 통증이 느껴진 것이다.
“……끄륵.”
칠매검 매화섬(梅花閃).
무릎에 힘이 풀리고 시야가 점차 흐려져 간다. 제 상황을 직감하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죽음.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
청명은 그 모습을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죽어 가고 있지만 그는 딱히 외롭지 않을 것이다. 아직 감각이 죽지 않은 귓가로 주변의 동료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똑똑히 들릴 테니까.
수적들에게 의리가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살아생전 함께하던 이들과 지옥까지 함께 가게 되었으니 기뻐해도 좋을 일이었다.
털썩.
털썩.
동시에 세 사람이……. 아니, 이제 세 구의 시신이라 바꿔 불러야할 육신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매화의 비는 이제 씻은 듯 사라졌고, 그 자리엔 진득한 피 냄새만이 남았다.
환상보다 더 환상 같은 광경은 결코 풍길 리 없는 매화 향을 코끝에 남긴다.
한편 두자룡(頭子龍)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는 이 수채에선 적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로 인정받는다. 그럼에도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지금 상대해야 할 이가 이제껏 상대해 본 적 없는 수준의 고수라는 점뿐이다.
‘이, 이게 화산신룡…….’
딱히 제 입으로 그 이름을 밝힌 적은 없으나, 바보가 아닌 이상 이자가 누군지 모를 수는 없다.
‘소문이 실제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잖은가?’
당연히 정파 놈들 특유의 과장이 섞인 소문이라고 생각했다. 적당한 후기지수가 나타나면 용이니 봉이니 해 가며 천고의 기재 취급을 하는 것이 정파 놈들의 특징이니까.
하지만 이놈은 다르다.
실전에 들어가면 제 명성의 반만큼의 실력도 내지 못하는 그런 어중이떠중이와는 달리, 이놈은 진짜다. 말 그대로 검귀다.
“걱정할 것 없어.”
그 순간 가벼운 목소리가 그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청명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 줄 테니까. 누가 먼저 죽느냐의 차이일 뿐이야.”
위협하는 말에 겁을 먹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저 말은 심장을 얼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저건 결코 단순한 허세나 협박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저 제 생각을 고스란히 전했을 뿐이다. 일말의 과장도 없이.
‘채, 채주.’
그들이 상대할 이가 아니라고 생각한 두자룡의 눈이 순간적으로 옆으로 향하려다 청명에게 고정된다. 이만한 고수를 앞에 두고 시선을 돌린다는 건 목을 잘라 달라 외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
“흐음. 그럼…… 누구…….”
그때 청명이 말을 하다 말고 획 뒤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에 두자룡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깨물었다.
적을 앞에 두고 시선을 돌린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말도 안 되는 방심이자 안일함의 극치였다.
하지만 달려들 수가 없다.
철저한 무시에 치가 떨리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면서도, 저 빈틈을 훤히 드러낸 등을 공격해 적의 안일함을 징죄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격의 차이. 청명의 검은 이미 그들의 전의를 완전히 부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저, 저…….”
그때 청명의 입에서 짜증과 심술이 뒤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 이 사숙, 사형 새끼들아! 그거 하나 처리를 못 해서, 에라!”
청명은 아예 획 돌아서더니 왔던 길을 도로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
눈앞에서 적이 홀연히 멀어진다. 반드시 잡아 죽여야 할 적이 등을 보이고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두자룡은 이번에도 그 등을 쫓기는커녕 작살을 바닥에 꽂아 넣고 휘청대는 몸을 지탱할 수밖에 없었다. 식은땀에 흠뻑 젖어 버린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쪼, 쫓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부하의 물음에 결국 짓깨문 두자룡의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수하들을 모두 이끌고 싸워야 한다. 너희끼리는 무리다.”
정확하게는 너희끼리가 아니라 우리끼리여야겠지만,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것은 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산산조각 나다 못해 이제는 형체조차 찾기 어려운 자존심 말이다.
“총포든 화약이든 뭐든 끌고 와라!”
“하, 하지만 그건…….”
“시키는 대로 해라! 책임은 내가 진다! 저놈만 죽일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다.”
“예!”
빠르게 달려 나가는 수적들을 잠시간 보던 두자룡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참을 수 없는 노화가 치밀어 올랐다.
‘빌어먹을…….’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용이라 부른다.
평생 장강의 용을 숭상해 온 그가 이제야 절절히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