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762화 (760/1,567)

762화. 사숙! 자꾸 환청이 들립니다! (2)

“큭!”

백천은 이를 악물었다.

그물을 움켜잡은 그의 손을 타고 검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희던 손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고 소맷자락까지 시커먼 독에 젖어 들었다.

“숨 들이쉬지 마세요! 호흡으로도 중독돼요!”

당소소의 절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의 두 눈에 절망과 후회가 넘실거렸다.

‘내 탓이야.’

그녀는 사천당가의 딸이다.

물론 부계(父系) 중심이고 남자가 중심인 사천당가에서 그녀가 독에 대해 깊이 배우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어쨌든 사천당가의 여식이니 독에 대한 지식이 평범한 무인과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런데 적이 독을 쓰는 걸 보면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 깊은 자책이 무색하게, 이건 그녀의 잘못이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나 배운 대로 행할 수 있고, 배운 것을 실전에서 고스란히 적용할 수 있다면 강호는 천재들로 넘쳐날 것이다. 배운 것을 체화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필요할진대, 그녀에게는 독을 쓰는 적을 상대해 본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되레 독의 종가(宗家)인 사천당가 출신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대체로 사천당가에게 독이란 자신이 사용하는 것이지, 남이 자신에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큭! 이거!”

“의복을 뚫고 들어온다! 내력을 끌어올려 막아!”

“아악! 이거 그물에 가시가 있습니다!”

“제길!”

화산의 제자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당혹감.

정면에서 부딪치는 것에는 자신이 있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면으로 적을 돌파해 왔다. 하지만 그들이 이제껏 상대한 이들은 정면으로 달려드는 그들을 정면에서 맞상대했던 이들이다.

강하게 맞부딪쳐 오든, 그게 아니면 포기하고 항복하든.

그들에겐 힘이 아닌 수작질로 맞서는 이들을 상대해 본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스님!”

“압니다!”

혜연이 이를 악물고 주먹을 올려쳤다.

콰아아아앙!

강한 권력이 그물을 들썩이게 했지만,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힘이 분산되니 온전히 밀어 낼 수는 없었다.

“틈을 주지 마라! 찔러 죽여 버려!”

화산의 제자들이 당황한 모습에 용기백배한 수적들이 그물 위로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아미자와 얇은 창, 그리고 기다란 조도(爪刀: 장갑 끝에 긴 날을 달아 휘두르는 형태의 무기)는 그물 사이사이로 찌르며 공격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무기였다.

쇄애액! 쇄애액!

창과 아미자가 그물 틈 사이로 쉴 새 없이 파고들었다.

“빌어먹을!”

“이 새끼들이! 아악!”

화산의 제자들은 검을 휘둘러 창을 막고 몸을 비틀며 아미자를 튕겨 냈지만, 무거운 그물이 자꾸만 얽혀 들어 갈수록 몸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피하려고 할 때마다 그물이 온몸을 잡고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물이 닿은 부위는 점점 더 화끈해지고 시간이 갈수록 머리까지 어지러워졌다.

이대로 간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조걸, 윤종!”

“예. 사숙!”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조걸과 윤종은 백천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물을 한 번만 튕겨 내라! 한 번이면 된다!”

“예!”

조걸과 윤종이 눈빛을 교환했다.

“스님!”

“혜연 스님! 한 번만 더!”

“알겠소이다! 차아아아압!”

혜연이 지체 없이 권을 내뻗어 그물을 위로 튕겼다.

콰아아아아아!

수적들까지 올라타 더 무거워진 그물이 그 가공할 권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출렁였다. 이미 혜연의 권력을 여러 차례 받아 냈던 그물이 군데군데 끊어지며 구멍이 숭숭 뚫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조걸과 윤종이 검을 바닥에 꽂고는 양손을 위로 뻗었다.

“타아아아앗!”

“흐아아아아압!”

이윽고 둘의 손에서 푸른색 장력이 연신 발출되었다.

화산의 장공, 죽엽수(竹葉手).

아직 기초에 불과하다 해도 자하신공을 바탕으로 뿜어지는 죽엽수다. 혜연의 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솟구쳐 오른 그물을 잠시간 밀어 내는 정도는 가능했다.

“후읍!”

백천이 길게 호흡을 하며 검을 아래로 내렸다.

“모자라.”

하지만 그 순간 유이설이 먼저 바닥을 박차고 솟구쳤다.

휘리리릭!

손안에서 검을 한차례 빙글 돌린 그녀는 그것을 허공으로 던져 올렸다. 큰 기세랄 것도 없었다. 심지어 검의 날도 아니고 면이 그물에 턱 하고 부딪혔다.

그리고 바로 그때.

빙글.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뒤집은 그녀가 그물과 맞닿은 검을 그대로 걷어찼다.

콰앙!

그물이 좀 더 위로 솟구쳤다. 위에 타고 있던 이들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후우우우.”

그 난리통에도 백천은 흔들림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반드시 사형제들이 시간을 벌어 주리라 믿는 듯했다.

이윽고 두 눈을 뜬 백천이 검을 느리게 움직였다.

고오오오오.

웅장하기 짝이 없는 노을빛 기운이 반월의 형상을 그리며 그물로 날아들었다.

“검기?”

“아, 아니! 검강(劍剛)이다!”

카가가가가각!

불타오르는 듯한 검강이 떨어져 내리는 그물을 단번에 찢어발겼다. 심지어는 그에 그치지 않고 그 여력만으로 갈라진 그물을 멀찍이 튕겨 냈다.

“아아아아악!”

“내 얼굴! 아아아악! 채주니이이임!”

그 바람에 독 그물에 덮쳐진 수적들이 비명을 질러 대었다.

“진영을 갖춰!”

“예!”

백천의 지시에 따라 화산의 제자들이 그의 좌우로 둥글게 포진했다.

“후욱! 후욱!”

“으…….”

어찌어찌 그물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들의 얼굴은 밝을 수가 없었다. 수적들이 죽어라 작살을 찔러 댄 탓에 이곳저곳에 상처를 입었다. 게다가 그물이 닿은 곳은 계속해서 불에 타는 것 같다. 발이 허공에 떠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자꾸만 어지럼증이 일었다.

“여기요!”

당소소가 품 안에서 해독단을 꺼내 사형제들에게 내민다.

“준비성도 좋지.”

“대단한 건 아니에요. 잠시 막아 주는 것에 불과해요. 이만한 독은 이걸로 해독 못 해요.”

“그게 어디야.”

화산 제자들이 그녀가 내민 단환을 재빨리 받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당소소야 무력이 조금 약하더라도 당가 특유의 내성이 있어서 버틸 수 있다. 그러나 백상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상아, 괜찮으냐?”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사형. 발목 잡을 바에는 혀를 물겠습니다.”

“개소리하지 마라. 아무도 안 죽는다.”

백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최악이다.’

설마 이런 수에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강호 경험이 일천한 명문의 제자들이 사파의 암수에 당해 목숨을 잃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고는 하지만, 그건 그들과 관계없는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다.

‘내가 오만했던가?’

지금까지 화산이 쌓은 실적은 실로 대단하다.

하지만 그건 모두 청명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해낼 수 있었다. 청명이 없었다면 지금도 그들은 화산 내에 갇힌 채로 종남의 등쌀을 버티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대체 뭘 믿고 이 인원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단 말인가.

신중했어야 했다. 스스로 애송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돌다리를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두들겨 건넜어야 했다.

‘두드리지 않고 건너는 건 용기가 아니야. 오만이다.’

하지만 이건 너무도 늦은 후회였다.

그물을 잡았던 손은 이미 퉁퉁 부어올랐다. 내력으로 최대한 억누르고 해독단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독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러니 시간을 끌수록 더욱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는 단기간에 앞을 가로막은 이들을 돌파할 능력은 없고, 독이 퍼지고 있는 상황에서 장강을 헤엄으로 건널 수도 없다는 점이다.

독 안에 든 쥐.

지금 그들의 처지가 딱 그러했다.

“비켜라.”

그때 앞쪽을 막고 위협하던 수적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물빛 피풍의(避風衣)를 걸친 사내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화산의 제자들 앞에 선 그는 옅은 비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꼴좋구나, 애송이들. 오검이니 어쩌니 하는 허명을 믿고 설치더니.”

“…….”

“강호에서 가장 쉽게 죽는 놈은 무명 무사가 아니다. 이제 겨우 명성을 얻은 애송이들이지. 그런 놈들은 제가 정말 잘난 줄 알거든.”

도발이란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뼈에 박혀 들었다.

“지금이라도 순순히 항복하면 목숨은 붙여 줄 수 있다.”

백천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평소라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말이지만, 지금만은 그럴 수 없다. 저항하면 죽는 건 그 혼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뭐래, 저 푸르뎅뎅한 놈이. 무식한 티 내나.”

“걸아. 수적이 무식한 건 당연한 거다. 그리고 무식하다고 사람을 놀리는 건 좋지 않은 태도다.”

“……그럼 얼굴 가지고 깝니까? 좀 못생겼는데.”

“흐음. 외양을 욕하는 것도 좋지 않은 태도니까 차라리 인성을 욕하자꾸나. 사람 새끼가 아닌 것 같으니까.”

“넵, 그러겠습니다.”

뒤에서 노골적으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당황한 백천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깨에 삐딱하게 검을 걸친 조걸과 그 옆에 선 윤종이 그를 보며 피식 웃고 있었다.

“우리 잘나신 사숙께서 오늘따라 왜 이러실까?”

“화산의 제자는 물러서는 법을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망둥이 같은 놈들이…….

그때 말없이 서 있던 유이설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백천의 옆에 섰다. 그러자 백상도 걸어 나와 잔포흑어를 검으로 겨눴다.

“사질들은 물러나 있어.”

“백자 배가 앞장선다, 애송이들아.”

혜연 역시 빙그레 웃으며 유이설의 곁에 섰다.

“아미타불. 아직 끝난 것도 아니건만, 시주의 표정이 너무 무겁습니다.”

“……스님.”

“그래요! 싹 조져 버리면 그만이죠!”

검을 든 당소소가 씩씩하게 외치며 백상의 옆에 섰다. 그들의 좌우로 조걸과 윤종마저 서니 모두가 백천을 중심으로 일자로 늘어선 형태가 되었다.

“일단은 저 뒤쪽 절벽으로 퇴로를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요.”

“절벽 타는 거야 우리 특기니까.”

“아미타불. 소승도 이제 숭산의 날다람쥐 정도는 됩니다.”

“스님은 멀었어요.”

“동감. 아직 멀었지.”

저들끼리 쑥덕대는 걸 들으며 백천은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튼 빌어먹을 놈들.’

목숨이 걸린 일이면 비장하기라도 할 것이지.

“오냐, 망할 놈들아. 한번 죽어 보자.”

백천이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자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가 그보다 나은 무인들이다.

백천마저 검을 앞으로 겨누자 잔포흑어가 씨익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군. 멀쩡한 몸으로도 어림없을 텐데, 그 몸으로?”

“멍청할지도 모르지. 그런데 하나는 안다. 살다 보면 멍청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흥! 입은 살았구나.”

잔포흑어가 손가락을 까딱했다.

“모조리 쳐 죽이고 물고기 밥으로 던져 줘라!”

“예!”

명령을 내린 그는 경계를 풀지 않고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백천은 입술을 짓씹었다.

‘빌어먹을.’

저놈은 수적질을 하고 있으나 강호인으로서 비교했을 때 백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용의주도했다.

처음 앞에 나섰을 때부터 물러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만일 저자가 허세를 부려 직접 상대하겠다고 나섰다면 기회가 한 번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하들에게 맡기고 물러난 이상 더는 기회가 없다.

‘아니야, 아직 안 끝났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길을 연다. 그리고 반드시 사제들만은 살려 보낼 것이다.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사숙.”

“헛소리할 생각 하지 마라! 길은 내가 연다.”

“아니, 사숙…….”

“됐다고 했잖느냐! 대사형의 말을 따라라!”

“아니, 그게 아니라요!”

“응?”

백천이 고개를 갸웃하며 조걸에게 시선을 주었다. 분명 지가 길을 여니 어쩌니 할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조걸은 백천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사, 사숙! 자꾸 환청이 들립니다!”

“……환청?”

“예. 들릴 리가 없는데. 그…… 그놈 목소리 같은 게.”

백천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걸이 저 녀석, 안 그런 척하더니 내심 떨고 있었구나.’

그러니 여기 있을 리 없는 그놈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겠지.

“걱정하지 마라. 그놈만은 못해도 나도 길 정도는 열어 줄 수 있다. 그러니…….”

“아니, 진짜 들린다니까요?”

“뭔 헛소리를…….”

그 순간 백천의 몸이 움찔했다.

“어?”

아, 아니. 지금…….

“잠깐. 나도 들은 것 같은데?”

“저도요.”

“……이 심술궂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다고……?”

화산의 제자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

“……아아아아아!”

또렷하게 꽂히는 소리에 화산의 제자들이 눈앞의 수적이고 뭐고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짠 듯한 움직임이었다.

“……뭐가 오는데?”

“맞는 거 같죠?”

“……저건 뭔 귀신인가?”

똑똑히 보였다. 저 먼 강 중앙에서 작은 배 하나가 이쪽을 향해 물보라를 일으키며 어마어마한 속도로 다가오는 모습이 말이다.

“처, 청명…….”

“야아아아아! 이 새끼들아! 배 타고 처나갔다더니 왜 뭍에서 처싸우고 있어! 아오, 빡쳐!”

허.

허허.

허허허허.

맞네.

허허허허허허허허허.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