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1화. 사숙! 자꾸 환청이 들립니다! (1)
“어, 어떻게 하지.”
“수채로 끌려간 이들은 다들 노예가 된다고 하던데.”
“……내가 왜 이 배에 타서는…….”
당황한 것은 화산의 제자들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검이라도 쓸 줄 아는 화산의 제자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수채까지 끌려온 양민들은 그야말로 사색이 되어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사숙! 지금이라도 혜연 스님께…….”
“무리야.”
물론 공격을 해서 배 몇 채를 가라앉게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 배로는 운항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장강 한가운데에 떠서 배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어 봐야 결국엔 천천히 말라 죽을 뿐이다. 그게 아니면 저들이 배를 가라앉히는 걸 눈 뜨고 지켜보거나.
죽으나 사나 취할 수 있는 방도는 이제 이곳까지 오는 것밖에는 없었다.
“끌어라!”
배가 물가에 정박하자 사슬이 팽팽해졌다.
우지지직!
배 하단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탄 선박이 죽죽 당겨졌다.
화산의 제자들이 배 난간에 다가가니 수채에 대기하던 수적들이 일제히 튀어나와 물가를 둘러싸는 모습이 보였다.
생각 이상으로 그 수가 많았다.
산에 사는 산적들을 모두 토벌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이고, 물에 사는 수적들을 모두 수장시키지 못하는 이유도 그들이 너무 많아서라고 하더니…….
“후우.”
그때 백천의 등 뒤에서 천천히 내뱉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사제들이 어느새 무사의 얼굴로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네요.”
“뭐 어차피 정해진 결과였지.”
“이제 저 새끼들을 조져 버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사숙?”
그들의 호기로움에 백천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적들이 저렇게나 많은 걸 봤으니 기가 죽을 만도 한데, 그의 사제, 사질들은 조금도 겁을 먹은 눈치가 아니었다.
‘멍청한 놈들이…….’
충분히 원망할 법한 상황이다.
수적들을 파악하기 위해 배에 올라 저들을 유인하자고 한 것은 백천이었고, 수적들이 다가올 때 빠른 이탈을 지시하지 못한 것도 백천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젠 이곳까지 끌려와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전투까지 치러야 한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그를 원망하는 기색 따윈 보이지 않았다. 백천은 그들을 가만 바라보다 졸지에 이곳까지 끌려온 혜연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스님, 죄송합니다.”
그러자 혜연은 빙그레 웃더니 불호를 외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빈승은 잘 모르겠습니다.”
“…….”
“명을 내리십시오, 시주. 비록 소림의 중이나, 시주의 명대로 살고 죽겠습니다.”
백천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겁다.
비로소 실감한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누군가를 책임지고 이끌어 나간다는 것의 무게를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그걸 이토록 절감하는 건 처음이었다.
‘단 한 사람도 죽게 하지 않는다.’
스르르릉.
검을 뽑아 드는 백천의 눈에 단호한 빛이 어렸다.
“매번 하던 일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예!”
백천의 시선이 절벽으로 향했다.
양민들이 저 높은 절벽을 오르는 건 무리다. 그렇다고 강 건너까지 맨몸으로 헤엄쳐 가는 것 역시 힘들다. 그러니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건 수적들에게서 멀쩡한 쾌속선 하나를 탈취해서 양민들을 싣고 달아나는 방법이지만…….
‘그게 그리 쉬울 리가 없지.’
하지만.
“애초에 지금까지 쉬운 일 따위는 해 본 적도 없었어! 배가 물가로 가면 우선 곧장 내려서 적들을 상대한다!”
“예!”
“싸우는 와중에도 누가 배에 오르지는 않는지 계속 신경을 써라. 단 한 사람이라도 죽는다면 우리의 패배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려운 일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려운 일을 해내야 한다.
사슬에 끌린 배가 물가에 거의 닿은 것을 확인한 백천이 소리쳤다.
“가자!”
그를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이 대답할 틈도 없이 일제히 난간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비조처럼 솟아오른 그들은 몸을 빙글 돌리며 수적들이 점령한 물가 한가운데로 낙하했다.
“찔러라!”
“꼬치로 만들어 버려!”
기다란 창과 아미자가 아래로 떨어지는 화산의 제자들을 수없이 찔러 왔다. 그 순간 당소소가 몸을 빙글 회전시키며 아래를 향해 비침(飛針)을 흩뿌렸다.
“먹어라!”
쇄애애애액!
솜털처럼 가는 세침이 수적들의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크윽!”
“뭐, 뭐냐 이건!”
얼굴로 쏟아져 오니 수적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아미타불!”
짧은 불호와 함께 혜연이 내뿜은 권력이 가공할 기세로 수적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콰아아아앙!
수적들은 마치 태풍을 맞은 가랑잎처럼 쓸려 날아갔다. 깔끔하게 확보해 낸 구역으로 화산의 제자들이 사뿐하게 착지했다. 백천이 명했다.
“쳐라!”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저마다의 검으로 매화를 그려 냈다.
혜연이 벌어 준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단숨에 절초를 펼쳐 만들어 낸 매화검기가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내 주변을 둘러싼 수적들을 단숨에 휩쓸어 버렸다.
“아아아아악!”
“뭐, 뭐냐 이건!”
화산의 매화검기는 이제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본 특징이 되었다. 하지만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말 그대로 천지차이였다.
꽃잎이 휘날리는 듯한 검기라고 들었지만, 정말 꽃잎 같은 것이 휘날릴 거라고 생각한 이가 누가 있겠는가? 이건 눈으로 보지 않으면 절대 믿을 수 없는 기이한 일이었다.
“뭐, 뭔 놈의 검기가…….”
꽃잎처럼 작고 얇은 검기가 춤을 추듯 떨어져 내린다. 둔탁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병기를 아무리 휘둘러 봐야 이 꽃잎을 모두 막아 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뿐이랴.
서걱! 서걱!
그 연약해 보이는 검기가 날카롭기는 또 말도 안 되게 날카롭다. 하늘하늘한 꽃잎들은 흡사 예리한 면도날처럼 몸을 시시각각 베어 냈다.
“크윽!”
“이, 이 빌어먹을!”
만발한 붉은 매화가 삭막한 절벽 아래를 화사하게 물들였다.
“단숨에 밀어붙인다!”
“예!”
화산의 제자들이 크게 대답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 기세를 감당하지 못한 수적들이 뒤로 또 뒤로 물러났다. 물가에 닿아 있던 이들은 얼마나 물러났는지, 허리까지 물에 잠기고 말았다.
“채, 채주님!”
여기저기서 간절하게 외치는 소리가 울렸다. 용선에서 내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잔포흑어의 눈에는 흥미롭단 기색이 가득했다.
“과거에는 화산이 천하제일검문의 자리에 올랐었다더니, 그 말이 허언은 아닌 모양이군.”
요사스럽다.
화산오검이라는 저들이 특히 그런 것인지 아니면 화산의 무학이 다 저런 것인지 그가 알 방도는 없지만, 적어도 저들이 펼쳐 내는 검만 두고 보자면 사파의 것이라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였다.
현란한 변초와 환검으로 사람의 눈을 농락하지만, 일말의 망설임 없이 육체를 꿰뚫는 검기는 또한 더없이 실전적이다.
게다가.
“아-미-타-불!”
거대한 불호 소리가 웅장하게 울리고, 꽃잎이 만발한 화원 한가운데서 황금빛 금광이 솟구쳤다.
콰아아아아아아!
폭포가 쏟아지는 듯한 어마어마한 권력에 휩쓸린 이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튕겨 나가 장강 위로 떨어졌다.
풍덩! 풍덩! 풍덩!
그 경이롭기까지 한 광경에 수적들은 몸을 떨었다.
지켜보는 입장이라면 마냥 입을 벌리고 놀랄 수 있겠지만, 그들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저 권력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러니 기겁할 수밖에.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은 적들이 움츠러든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본디 매화검법은 화려한 만큼 시전 할 때는 어느 정도 틈을 감수해야 하는 검법이다.
화려하게 검기를 흩뿌려야 하는 검이 짧게 끊어 치는 간결한 검에 비해 발동이 느린 것은 어쩔 수 없는 법. 그렇기에 매화검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적당히 검을 교환하며 상대를 밀어 내거나 틈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적들이 이리 움츠러든 상황이라면 평소보다 더 과감하게 검을 뿌릴 수 있게 된다.
‘단숨에!’
‘기선을 잡아야 돼!’
청명은 여기에 없지만, 그와 함께 싸워 온 기억은 머리에 남고 몸에 새겨져 있다. 다수를 상대해야 할 때는 절대 기세에서 밀려서는 안 된다.
과감하고 화려한 검초가 연신 수적들을 향해 쏟아졌다.
“괴, 괴물들이다!”
“뭐 이런 놈들이……!”
수적들은 혼비백산하여 분분히 뒤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제 목숨을 걸고 적을 상대할 의지가 있는 이라면 애초에 수적질을 할 이유가 없다. 사파는 이기고 있을 때는 그 누구보다 잔인하지만, 패색이 짙어질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곤 한다.
명예보다는 이득을 중시하고, 세상 그 무엇보다 제 안위를 위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수적들이 속절없이 물러나기 시작하자 잔포흑어가 눈살을 찌푸렸다.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
“어찌합니까?”
“직접 나서서 짓밟는 것도 나쁘지야 않겠지만…….”
잠깐 고민하던 잔포흑어가 잔인한 미소를 내걸며 중얼거렸다.
“천지를 모르고 날뛰는 애송이 놈들에게 세상을 알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강호에선 꼭 강한 이가 이기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알겠습니다.”
조승이 옆에 있는 수하에게 눈짓을 하자 수적들 몇이 재빨리 달려 나갔다.
“흐음.”
잔포흑어는 가볍게 허리에 찬 권갑(拳鉀: 쇠로 만든 전투용 장갑)을 두드렸다.
“피라미 같은 것들이.”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실로 득의양양했다.
‘좋아!’
백천의 두 눈에 열기가 일렁였다.
기선을 제압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이 많은 수적들을 그들만으로 무찌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몇십을 쓰러뜨렸음에도 수적들은 강가의 모래알처럼 바글대고 있으니까.
게다가 이 수채의 진짜 전력들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백천은 잠깐 얻은 승기로 들떠 일을 그르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뒤쪽.’
그의 시선이 힐끔 뒤로 향했다.
이 순간에도 수적들이 배에서 뛰어내려 이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건 다시 말해 저 정박선에는 수적이 몇 타지 않았다는 것.
‘뒤쪽을 단숨에 점거하고 양민들을 옮겨 타게 하면…….’
알고 있다. 저들에게는 배를 부술 수 있는 작살이 있다. 그러니 배를 타고 나간다 해서 안전을 보장할 순 없다. 쾌속선이니 상선보다야 빠를 테고, 이쪽도 선원이 있으니 짐을 버리고 몸만 실어 나가면 속도에서 크게 뒤지지 않겠지만 그렇다 해도 지난한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싸우는 것보다는 낫다.
‘일단 뒤를 점거하고 양민들이 배를 옮겨 탈 시간을 벌어야…….’
바로 그때였다.
퍼엉! 퍼엉!
그들의 머리 위로 무언가 튀어 오르더니 연기를 내뿜으며 터졌다.
“뭐?”
화약? 아니면 화포?
본능적으로 고개를 든 백천의 눈동자는 이내 크게 흔들렸다. 연기를 뚫고 나온 것이 다름 아닌 커다란 그물이었기 때문이다.
“피, 피해…….”
몸을 날리려 했지만 그 크기가 너무도 컸다. 어찌나 큰지 화산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들 주위를 포위한 수적들까지 모조리 덮칠 기세였다.
“큭!”
수적들 사이로 파고들어 달리지 않는 이상 저 그물을 피할 방도가 없을 듯했다.
“빌어먹을!”
화산의 제자들은 반사적으로 떨어지는 그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기로 단숨에 그물을 끊어 버릴 심산이었다.
카강!
하지만 검기가 닿았음에도 그물은 갈라지지 않고 커다란 쇳소리만 내며 변함없이 떨어져 내렸다.
“큭!”
“이, 이런!”
그리고 시커먼 그물은 마침내 검은 물처럼 화산의 제자들을 덮쳐 짓눌렀다.
백천은 전신을 무겁게 누르는 그물을 움켜잡고 필사적으로 검을 그어 댔다.
‘대체 뭐로 만든 거야!’
검기로는 잘리지도 않을 만큼 단단한 그물이라니 들어 보지도 못했다. 이대로라면 움직임이 제한되어 그물 위에서 찔러 대는 작살을 피할 방법이 없다.
그는 아예 한 손으로 그물을 움켜잡고 필사적으로 검기를 뽑아내 다시 한번 그어 댔다.
가가가각!
그제야 그물이 잘리기 시작했다.
“됐다!”
백천이 기쁨의 고함을 내지르려는데, 순간 귀를 찌르는 목소리가 울렸다.
“도, 독이에요! 다들 그물에 손대지 마세요!”
당소소의 다급한 비명에 백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